광해군(1575~1641)은 삶이 파란만장했다. 18살에 세자로 정해져, 아버지 선조 대신 임진왜란에서 크게 활약했다. 16년의
세자 시기를 거쳐 34살에 왕이 된다. 15년 동안 재위했고, 1623년 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났다. 그 뒤 제주도로 귀양을 간
상태에서 67살까지 18년을 더 살았다. 반정으로 폐주가 되었지만 27명의 조선 왕들 중 네번째로 장수했다.
극적
반전을 거듭한 그의 삶을 평가하기는 쉽지 않다. 현실외교에 그는 매우 높은 식견을 보였다.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밀고 당기기를
계속했으니, 예민한 현실감각을 갖게 된 것은 자연스럽다. 반면 국내 정치에서는 국정 운영, 민생 측면에서 좋은 평가를 얻기
어렵다. 특히 중신 이항복의 귀양은 미필적 살해에 가까웠다. 중풍이 재발한 63살 노인을 1월에 서울에서 1000리나 떨어진
북청에 귀양 보내, 도착해서 죽게 했다. 또한 끝없는 궁궐 등의 토목공사로, 대동법을 좌절시키고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민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2000년 나온 한명기 명지대 교수의 <광해군>은 주로 외교 치적에, 이번에 나온
오항녕 교수의 <광해군>은 주로 민생 파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앞 책의 부제는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이고,
뒤 책의 부제는 ‘그 위험한 거울’이다.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앞 책은 광해군을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뒤 책은 반대로 그의
실정을 이야기한다.
조선시대 역대 국왕 중 광해군만큼 엇갈린 평가를 받는 인물도 드물다. ’승자의 기록’인 역사는 광해군을 ’폭군’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20세기 들어오면서 명청 교체기에 실리 외교를 펼쳐 전쟁을 막은 ’개혁 군주’로 재조명되고 있다. 오항녕 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신간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에서 개혁군주로 21세기 화려하게 부활한 광해군에 대해 “우리의 미래를 망칠 위험한 인물”이라는 냉혹한 평가를 내린다.
오항녕 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광해군에 대한 재평가는 일본 식민사학자 이나바 이와키치에서 시작됐다”고 지적한다. 1933년 조선사편수회 간사였던 그는 광해군을 ‘실용주의 외교로 백성들에게 은택을 입힌 군주’라고 평가했다. 저자는 “유럽 계몽주의자들에게 중세가 암흑기였듯이, 근대주의적 역사관에서 인조반정 이후 조선 후기는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일 뿐 빨리 끝났어야 할 해체기로 바라본다”며 “이런 관점에서 광해군이 재평가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나바는 광해군이 “실용주의 외교로 백성들에게 은택을 입힌 군주”라며 그의 폐위를 ‘비극’으로 평가했다. 인조 반정에 대한 사관의 반정이라 할 만한 이러한 해석은 남북한 모두에서 맥이 이어졌다. 북한에선 “광해군과 정부 안의 일부 관리들은 명나라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그에 치우치지도 말며 녀진을 홀대하지도 말고 그들과의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는 립장을 취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들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 정세를 어느 정도 옳게 인식한 데서 나온 주장이었다”(사회과학원력사연구소, <조선전사>)고 했다. 한국에선 “광해군은 대내적으로 전쟁의 뒷수습을 위한 정책을 실시하면서 대외적으로는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신중한 중립 외교정책으로 대처하였다”(교학사, <고등학교 국사>)고 가르쳤다.
오 교수는 “광해군이 부활한 토양은 근대 역사학의 근대주의”라면서 근대주의적 역사관에 의해 인조반정이 부정적으로 인식되면서 광해군이 재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유럽의 계몽주의자들에게 봉건사회가 암흑시대였듯이 근대주의적 역사관에 따르면 조선 시대는 빨리 끝났어야 할 해체기였는데 광해군을 쫓아낸 인조 반정이 일어나면서 조선 사회가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오 교수는 광해군 시대를 이해하는 기초 사료인 ’광해군일기’를 토대로 광해군시대를 조명한다. 오 교수는 광해군 시대를 크게 세 시기로 나눴다. 1기는 즉위부터 1613년 계축옥사까지다. 2기는 1613년부터 1617년까지로, 본격적으로 대북 정권이 독주하면서 다른 정치세력을 배제하는 시기다. 3기는 1617년부터 인조반정까지다.
오 교수는 특히 광해군 재위 기간 내내 계속된 궁궐 공사에 주목한다. 후금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던 때 군량미마저 궁궐 공사비로 쓰는 등 너무도 절박하고 중요한 시기를 허망하게 보냈다고 오 교수는 비판했다. 궁궐 공사는 대동법이 좌절된 주요 원인이기도 했다. 오 교수는 “대동법의 좌절에는 광해군 내내 지속된 토목공사가 한몫을 톡톡히 했다”면서 “물자와 인력이 대대적으로 동원되는 궁궐 공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조세제도를 개혁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조선 사회와 인민들은 광해군 15년 동안의 시간을 ’잃어버렸다’”면서 “그 15년을 잃지 않았다면 동아시아 판도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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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저자가 지적하는 것은 광해군 치세기가 ‘잃어버린 15년’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광해군을 복권시키는 사관이 서양식 근대주의 목적론에 물들었다는 사실이다. 광해군은 중세의 해체를 촉진할 수 있는 군주였는데, 인조 반정에 의해 그 기회가 무산되고 조선의 중세는 다시 늘어졌다는 것이다. 근대주의 역사학자들은 어느 사회나 근대로 갈 수밖에 없으며, 그곳은 자유·평화·인권이 보장되기에 바람직하기까지 하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저자는 의심한다. 서구와는 완전히 다른 삶의 양식, 구조가 작동하던 조선 사회가 서구식 근대 모델에 포섭되는가. 그리고 조선 사회를 근대의 관점에서 비판하는 것이 타당한가. 저자는 “근대주의자들의 사이비 보편사관과 조급증”을 지적하면서, 이 때문에 인조 이후 300년간 조선 인민의 자구 능력이 무시당했다고 본다. 조선 사람들은 중세를 지속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 광해군을 몰아냈고, “다시 일어서 하루하루 이 땅에서의 삶을 이어갔”다.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은 광해군과 조선시대를 그 자체로 이해하길, 즉 내재적으로 접근하길 권한다.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
광해군 |
그래도 광해군은 폭군, 그의 복권은 서양의 근대주의 발상
광해군 복권? 민초들이 지하에서 운다
광해군 시대는 '잃어버린 15년'이었다
‘삽질’만 하다 ‘잃어버린 15년’… 광해군의 실정
광해군 재임기간은 조선의 잃어버린 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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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단순했다. 독재는 불의고 반대 편은 정의였다. 이념은 척도였고의심은 사치였다. 시대가 변했다. 이분법의 시대는 가고 다분법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럼에도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건 이분법의 논리다. 산업화를 이끈보수 이데올로기와 민주화를 꽃피운 진보 이데올로기는 각각의 공훈과 정통성을 주장하며 내 편과 네 편을 가르고 선택을 강요한다. 소통의 공간은 없고모두가 의심과 비판 없는 자기 목소리만 내세운다. 사회학자 송호근 교수가 분석한 한국사회의 오늘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방정식은 무엇일까.
우선 현실을 좌우하는 다섯 개의 변수는 세계화, 정부, 시장개방,양극화, 분배구조다. 이 변수를 2012년 대선 정국이란 상황에 적용하면 복지와 경제민주화란 과제가 드러난다. 이 방정식에는 정확한 해답이 있는데,바로 ‘일자리 정치’다. 송호근 교수는 이 지점이야말로 좌우를 막론하고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이념의 공유지’라 말한다. 분노와 불만의 일시적표출을 넘어서 한국 사회의 진화를 도모할 공론의 장이 펼쳐질 지점이라는 뜻이다. 이 책은 좌우 진영 논리를 넘어 우리가 만나야 할 대한민국의 미래가 어떤그림인지 그리고 그 속에서 각자의 역할은 무엇인지 고민해볼 새로운 질문을 가득 품고 있다. 100여 일 남은 대선까지 각자의 해답을 찾아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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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 진영논리를 넘어 우리가 만나야 할 대한민국의 미래를 설계한다. 그 첫 번째 단계는 대한민국을 바로 보는 일. 저자는 “또다시 ‘어느 쪽을 선택할래?’라는 윽박과 강요 속에서 많은 국민이 피로하다 못해 지쳐 쓰러져 버렸다”며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같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책이 100만권 이상 팔리는 현상이 이를 방증한다”고 전한다.
송호근 교수는 진영 논리와 이념적 갈등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너무 크다고 진단한다. 한경DB
“노무현 정권 시절엔 ‘과잉 정치’가 문제였다면 이명박 정권은 ‘과소 정치’가 문제다.”
저자는 이 대통령에게 필요한 건 ‘정치’라고 일갈한다. 사업 수주, 프로젝트 수행은 최고경영자(CEO)의 몫이고, 대통령의 본령은 대국민 정치와 여의도 정치를 용의주도하게 해나가는 것인데 이 대통령은 바로 이 본령이 약했다는 분석을 내놨다. 저자는 “이명박 대통령에겐 정치라는 단어가 아예 없는 듯했다”며 “국내 정치가 없었던 까닭에 그런 대로 성과를 냈던 경제와 외교도 한데 묶어 낙제점을 주고 싶은 것이 국민의 심정”이라고 꼬집는다.
국민들 사이에선 다시 ‘분배 대통령’을 불러와야 한다는 정서의 반전이 일어나는 중이다. ‘노무현 때문’이라던 5년 전 사회정의는 ‘경제’였다. 그래서 경제 대통령이 등극했다. 그런데 5년 뒤엔 ‘이명박 때문’으로 바뀌자 사회정의가 다시 ‘분배’로 복귀했다는 것이다. 5년 전 ‘경제와 양극화’가 다시 ‘분배와 양극화’로 반전된 배경이다. 저자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당선된 것도 그의 정책에 분배의 메시지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저자는 “친노 진영의 대선 후보들은 이런 반전의 불씨를 살려 전국의 들불로 번지게 하고 싶고, 친박 진영의 정치인들은 무상복지의 비현실성을 부각해 ‘맞춤형 복지’로 맞불을 놓고 싶어 한다”며 “안철수 교수는 루저들의 기대와 환호를 증폭해 ‘분배’와 ‘성공한 기업인’을 결합하고 싶어 한다”고 말한다. 이 시대의 키워드, ‘분배와 양극화’를 둘러싼 드라마틱한 일전이 2012년 대선정국에서 펼쳐지고 있는 셈이다.
저자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열 열쇠로 복지정책을 꼽는다. “세계화와 시장개방이 사회적 양극화를 만들었다”며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정치와 사회적 소통의 힘, 정치력과 소통의 힘이 필요하다”고 내다봤다. 국민들이 곧 다가올 대선을 통해 그들의 의견을 하달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분법 사회를 넘어서 |
뭐든 주겠다? 강한 주장일수록 의심하라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이분법 대한민국`
송호근 서울대 교수 "기업 경쟁력이 곧 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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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하치가 서른 명의 군사와 함께 만주에서 군사를 일으킨 것이 1583년. 이후 180년간 누르하치와 그의 계승자들은 명나라는 물론 몽골·티베트·신장까지 복속시키며 고속 성장을 거듭했다. 그 결과 청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다스린 제국이 됐다. 18세기 말 청 제국의 판도는 약 1315만㎢. 명나라의 두 배가 넘고,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 영토(965만㎢)보다도 훨씬 더 넓었다. 역사상, 중국 전체를 지배한 나라로 200년을 넘긴 경우는 당(唐)과 청(淸), 둘밖에 없다. 한은 사실상 성격이 다른 전한과 후한 두 왕조의 수명을 합한 것이다. 몽골족의 원나라는 남송을 정복, 중국 전체를 지배한 기간이 100년도 안 된다.
이 책은 청 제국의 형성 과정과 지배 구조의 특징을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쉽게 풀어낸다. 청 제국이 고속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 우선 누르하치와 홍타이지, 강희·옹정·건륭 등 유능한 '오너'들의 역할을 들 수 있다. 적장자(嫡長子) 계승 원칙을 따른 명나라와 달리 청나라는 제위(帝位) 계승 후보자 중 가장 유능한 인물을 골랐다. 중국의 제도와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한인을 차별하지 않는 등 한화정책을 폈다는 점도 단골로 꼽힌다.
저자는 그러나 청조가 내세운 '만한일가(滿漢一家)'는 18세기 말까지는 허구였다고 말한다. 팔기(八旗)는 만주인의 정체성을 유지하게 한 기반이었다. 누르하치는 만주족을 팔기라는 조직으로 묶었고, 홍타이지는 몽골과 한군(漢軍)까지 흡수해 팔기 몽고, 팔기 한군을 만들었다. 1800년까지 최고 지방 관직인 총독은 팔기 만주나 팔기 몽고 출신이 차지했고, 한족 관료들은 배제됐다. 러시아와의 외교 업무에 나섰던 고위직과 조선에 파견한 칙사들은 거의 모두 팔기 출신의 고급 관료들이었고, 한인 관료들은 배제됐다. 한인 관료들이 핵심 지배층으로 등장한 것은 19세기 중반 서양 침략과 태평천국에 대한 대응 과정에서 실력을 발휘하면서부터다.
청 제국의 형성 과정을 '키메라' 생명체가 잉태되어 자라나는 과정에 비유하는 시각이 독특하다. 서로 다른 유전적 형질을 지닌 세포가 한 생명체 안에 공존하는 키메라처럼, 청나라는 만주·몽골·한족 등 서로 다른 인자가 제국에 합류, 성장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19세기 후반 이후 지속된 '한화(漢化)' 추세가 '키메라'를 점령하면서 곧 키메라가 소멸할것 같다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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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전부터 중국 대륙에서는 ‘산채’(山寨)와 ‘홀유’(忽悠)란 말이 대유행하고 있다. 우리 속어로 치면 앞말은 ‘짝퉁, 모방’이고 뒷말은 ‘구라’ 정도로 표현할 수 있겠다. 한국보다도 쓰이는 의미가 워낙 기발하고 풍성해서 우리들 상상을 훌쩍 뛰어넘는다.
본디 ‘산장’ ‘빈민 마을’을 뜻했던 산채가 득세하게 된 건 짝퉁 휴대전화 덕분이다. 노키아·삼성 같은 유명 브랜드의 기능과 외관을 본떠 만든 ‘노키르’ ‘삼싱’ 같은 중국산 휴대전화를 일컫는 가짜 브랜드 통칭이 바로 산채였다. 그 뒤로 산채는 어떤 것이든 뒤틀어 모방하는 행태를 싸잡아 일컫는 ‘의미의 제국’이 됐다. 중국 사회 어디에나 존재하는 현상으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 디지털사진기·국수·우유·운동화 등의 생필품은 물론이고, 옛 영도자의 몸짓과 말투를 똑같이 따라하는 산채 마오쩌둥, 산채 유행가, 관영 티브이 뉴스를 패러디한 산채 뉴스가 등장했다. 졸부들은 산채 천안문, 산채 백악관을 만들어 중국 지도자와 미국 대통령의 권력 공간을 그대로 본뜬 주거 생활을 누리는 것이 유행이라고 한다.
사람을 속이고 농락한다는 뜻의 ‘홀유’ 또한 유력한 처세 방식으로 자리잡았다. 관리들과 민중은 ‘구라’와 ‘꼼수’로 서로를 등치며 속인다. 노점상의 인도 판매권과 거리와 공공시설 이름을 짓는 권한을 기업 등에 경매로 팔겠다는 지방관리들 작태에 더해 교사들은 교사자질 시험을 피하기 위해 면제 요건인 이혼 경력을 충족시키려고 위장 이혼을 밥 먹듯 남발한다. 그들의 아침인사는 ‘이혼하셨어요?’ ‘재결합하셨어요?’가 됐다. 언론들은 빌 게이츠가 베이징올림픽 참관을 위해 경기장 옆 고층빌딩 위에 떡 벌어지게 지은 전통주택 사합원을 1년간 거금을 주고 임대했다는 식의 작문 기사를 사실처럼 보도하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이처럼 희비극적인 현대 중국 세태를 짐짓 진중한 목소리에 익살로 눙쳐 풀어놓는 이는 <형제> <허삼관 매혈기>로 세계적 작가가 된 중국 소설가 위화다. 그의 에세이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에서 작가는 현대 중국을 상징하는 열가지 표제어를 골라 단어에 깃든 중국인들의 내면 풍경을 펼쳐놓는다. 그 열가지 말은 산채와 홀유 외에 ‘인민’ ‘영수’(領袖) ‘독서’(閱讀) ‘글쓰기’(寫作) ‘루쉰’(魯迅) ‘차이’(差距) ‘혁명’ ‘풀뿌리’(草根)다. “끊이지 않고 도도하게 흘러가는” 당대 중국의 삶 구석구석을 이 단어들에 얽힌 작가의 성장기와 이런저런 세태 이야기들로 두루 살펴본 것이다. 정신없이 고속성장 가도를 내달려온 중국 사회의 “뿌리와 근원을 찾아가는 여정”은 인민들의 불안과 허망을 낳은 과거를 좇는 탐색이다. 관에 대한 무정부주의적 저항 코드를 깔고 있는 ‘산채’와 ‘홀유’의 트렌드를, 위화는 원인과 맥락을 젖혀놓은 단편적 발전, 도덕성 상실과 가치관 혼돈이 유감없이 표현된 현상으로 바라본다. 그래서 그는 지난 30여년 동안 겪은 급속한 중국의 변화가 인과 관계가 전도된 발전 과정이었다고 말한다.
독자들은 그의 글들에서 오늘의 중국을 밀어올린 ‘풀뿌리들’의 괴력, 곧 하층민 출신 졸부들의 금전을 향한 욕망과 상상력이 얼마나 가공할 만한 경지인지, 마오의 문화대혁명과 6·4 천안문 학살이 작가와 중국인들에게 남긴 심리적 생채기들을 갖가지 일화들로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이 책을 마냥 현대 중국의 요지경만으로 읽을 수는 없다. 보통사람들의 뒤틀린 처세 배경이 된 역사적 고통에 대한 공감과 연민이 곳곳에 배어나오기 때문이다. 이를 뽑는 발치원이었던 청년 시절, 위화는 바늘이 휘어진 낡은 주사기로 살점을 도려내며 선혈 낭자한 예방 접종을 노동자와 아이들에게 강제해야 했다. 타인의 고통을 절실히 아로새겼던 그때의 기억이 이 글을 쓰게 만들었다고 작가는 털어놓는다. 위화의 글은 성석제 소설처럼 우습지만, 씁쓸하고 신랄하며 생생하다. 그리고 행간에는 따스하면서도 구슬픈 회한이 흐른다.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짝퉁·구라·루쉰…10가지 표제어로 본 중국
산채·인민·풀뿌리 등 10개 단어의 의미 변화로 중국을 독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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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을 경계하기 위한 학습은 글을 깨치기 전부터 이뤄진다. 네댓살이면 접하게 되는 이솝우화 <개미와 베짱이>가 대표적이다. 2500년 전 그리스에서 태어난 이 유명한 우화는 게으름에는 혹독한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경고한다. 추운 겨울, 눈보라를 맞으며 벌벌 떨어야 하는 베짱이의 가난이 바로 게으름의 대가다.
게으름에 관한 거의 모든 이야기들이 그렇듯이 ‘죄와 벌’의 구조를 갖는다. 우리나라의 전래동화인 <소가 된 게으름뱅이>도 예외가 아니다. ‘게으름은 일종의 죄다. 가난이라는 형벌이 따를 것이다’라는 경고를 담고 있다.
이 책은 동서양을 넘나들면서 게으름의 역사를 구어체의 문장으로 풀어놓고 있는 에세이다. 물론 이런 유의 책들이 항용 그렇듯, 이 책의 저자도 “게으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나쁜 건 아니다”라고 전제한다. 다시 말해 게으름에 대해 죄의식까지 가질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저자는 “(우화 속의) 개미는 누구인가?”라고 자문하면서, “역사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개미들은 귀족, 자본가, 제국주의, 양반 등 힘을 가진 존재들”이라는 계급적 관점까지 드러낸다.
이 지점에서 어떤 이들은, 20세기 전반의 영국 철학자인 버트란트 러셀의 <게으름에 관한 찬양>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느림의 철학자’로 알려진 피에르 상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연상하는 사람도 있겠다. 하지만 저자는 선을 긋는다. 자신에게는 게으름을 찬양할 의도가 없다는 것이다. 다만 그는 “게으름이 나쁘다고 부추기는 문화와 역사에 대해 생각해보자”고 말한다. “게으름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권력과 결합하는지”를 보여주면서 “게으름을 자책하는 사람들에게 약간의 해방감을 안겨주는 것”이 자신의 의도라고 밝힌다.
게으름에 대한 죄의식은 동양보다 서양의 문화에서 한층 강력하게 유포됐다. 그 뿌리는 물론 <성경>이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보낸 두번째 편지에서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적었다. 그것은 서양인들에게 하나의 인식적 좌표로 자리했다. “게으름은 신의 목적을 어기는 것, 신에게 헌신하지 않는 것, 신앙이 부족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 인식이 한층 굳건해진 것은 근대에 접어들면서였다. 칼뱅은 “신은 게으른 자가 빵을 먹는 걸 저주한다”고 설파했고, 그것은 곧바로 프로테스탄트의 ‘근면 윤리’로 이어졌다.
‘근면과 성실’이 근대 산업사회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증기기관이 나오기 이전의 영국에서는 적어도 근면이 지상제일의 덕목은 아니었다. 기계가 등장하면서 인간이 기계에 밀리자 근면은 더욱 강조됐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돈과 힘을 가진 부르주아들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이 게으름을 피운다고 불평했다. 막간의 휴식조차도 다음날 일을 더 잘하기 위한 준비로 여겨졌다.” 청교도 정신으로 무장하고 신대륙으로 건너간 유럽인들이 “절약과 근면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낭비와 게으름을 경멸”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불린 벤저민 프랭클린은 게으름을 증오하면서 스스로 근면의 상징이 됐다. 그는 ‘게으름은 자물쇠의 녹’이라거나 ‘시간은 금’이라는 유명한 격언을 남겼다.
그러나 저자는 항의한다. 그는 “게으름은 상대적”이라고 강조한다. 게으름에 대한 인식은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야말로 이 책이 보여주는 핵심적인 메시지다. 저자는 우리가 서구의 기독교 자본주의가 주입한 관점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게으름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를 발전시킨 서양에서는 부지런히 움직이고 일하는 것이 의무로 여겨졌지만, 이들의 지배를 받거나 다른 역사를 지닌 아프리카나 인도 등의 지역에서는 적절한 여유가 삶을 풍족하게 한다고 여겨졌다”는 것이 저자의 말이다.
저자는 책의 중반부를 넘어서면서부터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강조하는 한가로운 비서구 세계의 문화”를 은근히 치켜올린다. 한국은 물론이거니와 산업화하기 이전의 멕시코, 1960년대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의 부시맨을 관찰한 자료 등을 사례로 제시하면서 “근면의 기풍이 서구보다 약하다 해서 열등함을 의미하는 건 결코 아니다”라는 점을 강조한다. 저자에 따르자면 그것은 다만 “문화의 차이”이며, 좀더 본질적으로 들여다보자면 “시간의 개념의 차이”다. 예컨대 “인도는 윤회와 환생을 믿고, 중국은 광대무변한 시간 개념”을 가졌다. 반면에 서구인들에게 시간은 째깍거리며 초단위로 직진할뿐더러,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이 차이야말로 근본적인 문화의 ‘다름’이라는 것이 저자의 견해다.
그리하여 저자는 “남에게 휘둘리지 않고 운명을 스스로 이끌어나가는 길을 생각해보자”고 권한다. 다시 말해, 서구가 유포한 죄의식에서 벗어나자는 얘기다. “게으름을 폄훼하지 않고, 적절한 게으름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마치 천년을 살 것처럼 일만 하고 돈을 모으려는 각박한 사회”에서 “인간의 사회”로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선택이라는 주장이다.
저자 이옥순은 인도 델리대학 대학원에서 인도사 전공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고 지금은 연세대 연구교수로 일하면서 인도문화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230쪽의 얇은 분량이지만 담고 있는 가치는 묵직하다. 간혹 무리한 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부드러운 대화체 문장이 독자를 다감하게 설득한다.
게으름은 왜 죄가 되었나 |
근면·성실의 이데올로기 벗어나 ‘적절한 게으름’ 회복해야 인간사회 될 수 있다
게으름은 수치? 강태공도 그 생각에 동의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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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올재 셀렉션즈>로 첫 소개되는 이을호 역 《한글 논어》는 특히나 재발행 요청이 뜨거웠던 책. 교수신문이 선정한 최고의 논어 번역본으로 문장이 간결하고 명료한 데다 원문의 대칭적 구조까지 살려 ‘절묘한 번역’이라는 높은 평가를 받는다. 1970년대 후반 절판 이후 지난 1월 <올재 클래식스>로 출간됐다. 이번에 발행되는 《한글 논어》는 한자원문에 한글음을 달고, 주석과 평설을 본문과 가깝게 편집해 이전 책보다 가독성을 높인 것이 특징이다.
교수신문이 선정한 최고의 번역본으로 문장이 간결하고 명료한 데다 원문의 대칭적 구조까지 잘 살려 ‘절묘한 번역’이란 평가를 받는다.
예컨대 논어의 유명한 첫 구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는 흔히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고 고답적으로 풀이하지만, 이 책에선 “배우는 족족 내 것을 만들면 기쁘지 않을까!”라고 자연스럽고 생동감 있게 풀어낸다.
고전의 명구가 현대에 전해주는 울림은 크다. “참된 인물은 사람이 서근서근하고, 되잖은 것들은 언제나 찌뿌드드하다” 등 일상에서 위로와 도움이 될 경구가 일상언어로 풀이돼 있다.
편ㆍ장을 나눌 때의 관점은 주자의 ‘논어집주’가 아닌 정약용의 ‘논어고금주’를 따랐다.
한글 논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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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 찰스 디킨스의 장편소설. <위대한 유산>과 함께 디킨스 후기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이 책은, 디킨스의 작가적 연륜이 원숙한 경지에 이르렀던 무렵에 쓰인 작품이다. 프랑스 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삶과 귀족의 폭압 정치, 복수의 광기 등을 생생하게 묘사한 역사소설이자, 한 남자가 가슴속 깊이 간직한 사랑, 아름답지만 비극적인 희생과 염원을 담은 숭고한 사랑 이야기이다.
1859년 단행본으로 선보인 이래 2억 부 이상 판매되어 오늘날 영어권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 중 하나이다. 명성에 비해 국내에서는 그간 축약본이나 일부 누락된 번역본으로만 소개되어 아쉬움을 남겼던 이 작품의 국내 첫 완역 출간은, 기다려왔던 독자들에게 반가운 소식이 될 것이다.
작품의 배경인 '두 도시'는 런던과 파리이다. 런던은 구식 사업 관습이라든지 법치주의, 그런대로 자기를 통제하고 번영을 구가하는 노동자 계급 덕분에 전반적으로 안정되어 있는 대도시이다. 그와 대조적으로 파리는, 지배받는 동시에 통제되지 않는 대규모 관객을 상대로 역사적 갈등이 연출되는 거대한 공개 무대이다. 이러한 두 도시의 선명한 대비는 프랑스 혁명 후 공포정치의 무자비함을 더욱 부각시키며, 혁명이라는 극적인 배경으로 펼쳐지는 한 남자의 숭고한 사랑과 희생을 효과적으로 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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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펭귄 클래식 시리즈 사상 최고의 초반 판매량을 기록 중인 이 작품에 대해 말하려면 영화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함께 언급하는 게 좋겠다. <두 도시 이야기>를 원작 삼아 만들었다는 이 영화는 원작을 국내에 소개하는 데 있어 일등공신이긴 하지만, 영화 자체는 안타깝게도 원작의 주요 등장인물들을 옮겨오는 데서 멈춘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가 <두 도시 이야기>의 폭발적인 힘을 옮겨내지 못한 이유는 간단하다. 영화 속에서는 시민들이 소품 이상의 역할을 해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설의 배경 속에서 움직이는 민중들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하며, 주체적이면서도 광신적인 그들의 환호와 비명이 주요 등장인물들에게 마치 굴레와도 같은 권능을 부여한다.
이 위대하면서도 맹목적이고 파괴적인 혁명의 힘은 때로 주인공들마저 집어삼키며 작품 전체를 이끈다. 그 좋은 예가 드파르주(소설)와 베인(영화)이다. <두 도시 이야기>에서 일종의 악역이라 할 수 있는 자크 당의 최고 지도자 드파르주는 영화에서 그에 상응하는 캐릭터인 베인에 비해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발휘한다. 드파르주의 뒤에는 프랑스 파리의 뜨거운 분노가 망토처럼 펄럭이고 있기 때문이다. 혁명은 풀려났고, 그 뒤로는 아무도 그것을 길들이거나 막을 수 없었다. <두 도시 이야기>는 폭풍 그 자체다.
두 도시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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