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서현 교수의 글을 좋아한다. 특히 책에 관한 잡문은 더욱 그러하다. 《또 하나의 벽돌》은 건축가 서현 교수의 서평집, 부제로 말하면 '건축가 서현의 난독일기'이다. 이 책 뒷부분을 보면 서평 한 책의 목록이 있다. 목록을 보고 다른 책을 연결해주는 다리 역할을 할 수 있기에 반갑다.
한데 이 목록의 특이한(?) 점은 책 제목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저자를 기준으로 정리해 놓았다. 예를 들면 《또 하나의 벽돌》을 찾기 알아보기 위해서는 저자 서현을 찾아야 한다. 물론 사전이 아니기에 찾기 기능에 중점을 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조금 생소하다. 한 저자의 책이 있다면 이런 방식도 같은 저자의 다른 책을 비교해 읽을 수 있으니 독자에게 도움이 된다. 대부분 한 저자의 책 한 권을 서평 하였기에 이러한 의도는 무의미하다. 아무런 의도 없이 편집자가 이렇게 하지 않았을 텐데 곰곰이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
다른 하나, 저자 순으로 정리한 것은 편집의도라 충분히 이해한다 해도 알파벳 권 저자를 순서대로, 이름이 먼저이고 성이 나중인데 이름순으로 정리한 것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앞서도 말했듯이 인덱스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기에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일반적인 통념이 있다. 베토벤을 찾을 때 'ㅂ'에서 찾지 루트비히 베토벤이라고 'ㄹ'에서 찾지 않는다. 신동엽을 동엽신이라 여겨 'ㅂ'에서 찾으면 어떻겠는가.
지금은 고인이 된 최성일의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에서도 같은 사례를 볼 수 있다. 고인이 된 후 출판사에서 그동안 나왔던 1권부터 5권까지 묶은 합본이다. 이 책은 앞에 목차에 이름순으로 정리해 놓았다. 인덱스 역할을 하는 목차이기에 혼란스럽다.
이 두 책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다른 업종은 모두 소비자 위주로 상품도 만들고 서비스한다. 하지만 출판은 선민의식(?) 때문인지 무지몽매無知蒙昧한 우둔한 대중을 이끌고 가야 한다는 생각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많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더라도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편집은 적정하다고 할 수 없다. 책은 저자의 것도, 만든이의 것도 아니라 읽는 독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 지식인의 독서노트》에는 돈 주고 책을 산 사람, 책을 쓴 사람 그리고 책을 읽은 사람 중에서 책의 진짜 주인이 누구일까?라는 질문이 나온다. 책을 만든 이는 항목에도 들어가지 않음을 보면 씁쓸한 마음이 든다.
보도 듣고 느낀 한마디
_2012.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