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생활 하면 흔히 세련되고 우아한 문화생활을 먼저 떠올릴 테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빽빽하게 들어찬 회색 건물 숲과 교통 체증, 어딜 가나 줄서며 기다리는 것이 기본인, 바쁘고 삭막하고 짜증이 나는 일상의 연속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재 우리나라의 인구 가운데 10명 중 9명이 도시에서 생활한다고 한다. 국토 면적의 16%도 안 되는 곳에서 인구의 90%가 모여 살다 보니 시끌시끌하고 복잡한 문제들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도시를 떠나지 못하는 걸까? 도시 생활자의 수만큼이나 도시 생활을 하는 이유 또한 천차만별로, 대개는 직장 생활을 위해, 교육을 위해, 아니면 다양한 문화생활을 즐기기 위해 풍요롭고 화려한 도시 생활의 유혹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퇴근하고서도 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직장 생활부터 사생활을 보호받지 못하는 가정생활까지, 도시 생활은 일상적인 스트레스로 이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틈만 나면 여행이나 가까운 교외 등으로 외출하면서 잠시나마 벗어나고자 한다. 하지만 그렇게 잠시 기분 전환을 한다 해도 다시 돌아오면 여전히 스트레스는 반복된다.
도시 생활의 스트레스는 대개 마음의 문제에서 비롯된다. 최근 심리학과 관련된 연구 자료에 의하면 가벼운 스트레스는 운동과 명상으로 치료할 수 있다고 한다. 스트레스를 받는 원인을 밝히기 위해 자신의 내면과 외부 환경을 제대로 바라보고 인식하는 명상법과 적당한 신체 활동이 스트레스 치료에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근에 명상과 관련된 책들이 많이 쏟아지고 있는데, 대개의 책들이 명상하기 좋은 한적한 곳을 찾아가거나 하루에 얼마씩은 반드시 명상을 하라고 권유하는 책들이다. 바쁜 도시 생활자들이 따라 하기에는 쉽지 않은 방법들이다.
이 책의 저자인 조너선 S. 캐플런은 마음모음과 명상법을 심리치료에 적용하고 있는 임상 심리학자이다. 뉴욕에서 생활하는 도시 생활자이기도 한 저자는 바쁘게 살아가는 평범한 도시 생활자들이 일상생활에서 명상을 실천하는 ‘urbanmindfulness.org’라는 블로그를 만들어 독자들과 함께 여러 실천 방안들을 모색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과 임상 고객들 그리고 블로그 독자들과의 오랜 교류를 통해 만든 자료를 토대로 이 책을 만들었다.
환경을 바꿀 수 없을 때 오히려 자신의 마음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 보인다. 자신의 내면세계를 바로 보고 외부 환경에 주의를 기울이면 자신을 괴롭히는 스트레스의 원인을 알아챌 수 있다. 이 책에서 자주 말하는 ‘마음모음’은 오직 지금 이 순간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과거의 경험에서 비롯된 선입견과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에서 벗어나 오직 지금 이 순간에 경험하는 감각들에 주의를 기울이면 훨씬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는 집에서, 회사에서 그리고 도심 한가운데에서 길을 걷다가도 주의 깊게 마음을 모을 수 있는 방법들을 가르쳐 준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손쉽게 실천할 수 있는 마음모음 방법을 따라 하다 보면, 복잡한 도시 생활에 쫓기고 스트레스 받느라 지친 우리의 일상이 어느새 평범하지만 더 이상 평범하지 않은 특별한 즐거움이 될 것이다.
도시에서 명상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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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안녕한가? 당신의 안녕함이 누군가의 안녕하지 못함을 담보로 얻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안녕함이 아니다. 삶이 고갈될수록 인문학의 필요가 더 요청되는 까닭이다.”
매력적인 제목으로 사방에 널린 책들. 당신은 가벼운 주제의 책을 날마다 의무적으로 꾸역꾸역 읽고 지식을 얻었다 자위하고 있지는 않은가. 돈 버는 삶에 정신이 팔려 순수함을 잃어가는 시대를 살다보니 삶을 살찌우는 인문학에 위기가 왔다는 말이 빈말이 아닌지 모른다. 지성의 전당 대학마저도 교수는 업적지상주의에 빠지고, 학생들은 돈 되는 전공과목에 몰리면서 순수학문은 외면받고 있다. 또 폭력·살인·정치권의 부정부패, 청년실업, 이혼·자살 증가 등 사회 구조적 모순과 상대적 박탈감이 버무려져 삶 전체가 우울증을 앓는 듯 하다.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자성은 여기서 출발한다. 고달픈 삶의 돌파구를 찾으려는 시도는 우리의 삶을 인간답게 만들어 줄거라는 믿음이 밑바탕 돼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밥을 먹여주고 실용으로 써먹는데 소용이 닿지 않을지 모르지만, 우리 삶을 잘 누리는데 기여하는 학문임은 틀림없다. 이에 시인·소설가·문학비평가로 다양한 글쓰기를 해온 작가 장석주는 해마다 시와 소설, 에세이, 역사·예술·과학서 등 1000여 권의 책을 ‘밥을 먹듯, 또한 노동을 하듯’ 읽은 뒤 책에 관한 이야기를 한 권으로 압축해 묶었다.
저자는 단순히 책을 많이 읽어 지식을 습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책 너머의 사유로 이끈다. 망각, 사랑, 기다림, 죽음, 불륜, 여행 등 우리 삶에 밀접한 50여가지 주제가 300여권의 독서기록을 통해 펼쳐진다. “책을 읽는 일에서 밥을 구하고 지혜를 구한다”는 그의 말처럼 ‘일상의 인문학’은 저자가 “살기 위해, 또한 죽지 않기 위해” 읽어 온 책들에 관한 기록이며 사유의 길라잡이다.
저자는 일상의 소소한 주제에 대해 그동안 모아둔 방대한 독서기록으로 명쾌하게 정리한다. 또 주제마다 함께 읽으면 좋을 책을 소개했는데 적재적소에 인용한 구절을 접하면 독서의 폭과 사유의 깊이가 느껴지며 경외감마저 들게 한다.
일상의 인문학 |
살기 위해 읽은 행복한 ‘인문학 산책’
살기 위해 읽은 행복한 ‘인문학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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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적인 독자는 이야기를 다시 만든다. 이상적인 독자는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간다. 이상적인 독자는 작가의 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상적인 독자는 답이 아닌 의문을 찾아내기 위해 책을 읽는다. 여백에 쓰인 글은 이상적인 독자라는 증거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걸 업으로 삼는 처지긴 하지만, 대체 왜 책을 읽는가,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는 아직 명확한 답을 하지 못했다. 어린 시절에는 오히려 확실한 답이 있었다. 부모님과 선생님이 읽으라고 하니까!
알베르토 망구엘은 이 분야의 확실한 ‘어른’이다. 그래서 책읽기의 즐거움과 위안에 대한 39편의 에세이를 모은 <책읽는 사람들>(원제 A Reader on Reading)을 통해 그 답을 구해봐도 좋겠다. 1948년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그는 20살에 독재 정권 치하의 조국을 떠나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등지에서 살아왔다. 편집자이자 작가로 활동해온 망구엘이지만, 그를 부르는 가장 좋은 호칭은 ‘독서가’가 될 것이다. 물론 ‘독서가’라는 직업은 없지만, 망구엘이 가장 잘하고 좋아하는 것이 책 읽는 일이니 달리 부를 말도 없다. 2~3세에 침대 위 벽에 걸린 선반에 책이 가득 꽂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망구엘은 60년간 3만권의 책을 모으고 읽었다. 스페인어·프랑스어·영어·아랍어 등 다양한 언어로 쓰인 성경 연구, 파우스트 전설에 대한 해석, 르네상스 문학 등 여러 주제들의 책이 망구스의 개인 도서관에 꽂혀 있다.
그는 ‘나쁜 책’의 사례에 대해 언급할 때를 대비해 수십권의 나쁜 책을 버리지 않고 보관 중인데, 지금까지 단 한 권의 책만 도서관에서 추방했다고 한다. 그것은 훗날 영화로도 제작된 브렛 이스턴 엘리스의 소설 <아메리칸 사이코>다. 망구엘은 “가학적인 고통에 대한 외설적인 묘사가 책꽂이 전부에 전염될 것 같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무튼 편집자, 작가, 독서가인 망구엘의 경력에 가장 그럴싸한 에피소드는 10대 시절에 겪었다.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그는 우연히 소설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를 만났고, 당시 실명했던 보르헤스를 위해 책 읽어주는 아르바이트를 4년간 했다. 보르헤스가 20세기 후반의 문학에 미친 영향이야 말할 나위도 없으니, 망구엘은 ‘은수저 물고 태어나’ 출판계와 문단에 들어섰다고 해도 좋겠다.
망구엘은 조금 근엄하게 시작한다. “독서는 창조적인 활동 중에서 가장 인간적 활동이다. 나는 우리가 근본적으로 뭔가를 읽는 동물이며, 독서를 넓은 의미로 받아들일 때 독서하는 능력이 우리 인간이란 종을 정의한다고 믿는다.” 메소포타미아의 문자는 물건을 사고팔 때 거래의 흔적을 남기겠다는 실용적 목적으로 발명됐으나, 사람이든 물건이든 애초 목적대로 사용되지 않을 때 흥미로워지는 법이다. 문자는 거래를 넘어 거래에 관련된 사람 이야기까지 담기 시작했고, 신의 무용담을 적었고, 심지어 세계를 창조하는 수단이 됐다. <성서> ‘창세기’ 속의 신은 “빛이 있으라!”라는 말로 천지를 창조했는데, 유대교 신비주의자들은 ‘빛’이란 단어 자체에 창조력이 있다고까지 주장했다. 이들은 올바른 단어와 정확한 발음을 알면 창조주 같은 능력을 지닐 수 있다고 믿는 지경에까지 나아갔다.
특히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살아남은 책은 절망에 빠진 인간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주었다. “세상의 광기가 우리 안방까지 침입해서 식당과 거실, 온 집안을 점령하더라도 우리를 완전히 지배할 수는 없을 거라는 위안은 독자의 입장에서 무척 중요하다.” 시인 네이날도 아레나스는 <아이네이스>에서, 소설가 오스카 와일드는 <성서>에서 수감 생활을 견딜 힘을 얻었다.
망구엘은 “독서를 통해 배운 바에 따르면, 우리의 역사는 불의가 지배한 긴 밤의 역사”라고 말한다. 이 우울한 역사 속에서 작가는 ‘신의 스파이’였다. 정의를 관장하는 신이 작가를 세상에 밀파한 것이다. 위대한 책들 덕분에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었다. 구원의 시와 소설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쓰여지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위대한 책을 위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책을 사랑하되 배신할 수 있어야 한다. 줄거리를 좇지 않고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 “내가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세상이 더 불행해졌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자기중심적이고 오만한 독자가 돼야 한다. 망구엘은 감각을 짜릿하게 만드는 비유를 쓴다. “이상적인 독자는 텍스트를 절개해서 껍질을 들어내고 골수까지 파들어가, 동맥과 정맥을 일일이 추적해서 완전히 다른 생명체를 만들 수 있는 번역가다.” ‘정전’은 없다. <논어>나 <신곡>이라도 와닿지 않으면 ‘종이 더미’에 불과하다.
‘책 읽기=글 읽기’는 아니다. 지하철의 광고문구, 정치인의 선전선동, 자극적인 언론기사를 수억 건 읽어도 인간은 나아지지 않는다. 글 읽기에는 양질전환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망구엘은 이 주장을 위해 <피노키오의 모험>을 들려준다. 제페토가 만든 나무인형 피노키오는 말썽꾸러기였다.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화를 내고, 불 옆에서 잠들어 발을 태운 뒤에도 제페토가 새로 만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회에 먹을 것과 건강한 삶을 요구하기 위해선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안 피노키오는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학교에 다니기로 한다. 근대 사회의 시민을 양성하는 학교에서 피노키오가 처음 배운 것은 ‘읽기’였다.
그러나 피노키오의 학교는 글 읽기는 가르치되 책 읽기는 가르치지 않는 곳이었다. 독서는 문자 체계를 기계적으로 익히는 걸 넘어서, 그런 체계들이 ‘나’와 ‘세계’를 표현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일이다. 노예들은 글을 배울 수 없었다. 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글을 읽는다면 자신들이 얼마나 부당한 처지에 놓여 있는지, 그런 처지를 만든 것이 누구인지 자연스럽게 깨닫기 때문이다. 진시황, 히틀러가 책을 불태운 것은 그들 입장에선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교육제도의 패러독스는 여기에 있다. 교육은 시민들이 사회 제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지식을 가르쳐야 하지만, 또 그 지식은 교과서를 넘어서야 한다. 그래서 “교육은 느리고 어려운 과정이다”. 느리고 어렵다는 것은 요즘 세상에는 비판받는 품성이지만, 그렇게 읽어나가야 멀리 깊게 갈 수 있다. “생각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 우리는 다른 식으로 책 읽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피노키오는 결국 원하는 인간의 몸을 얻었지만, 사회와 교육제도가 강요한 세계관을 벗어나지 못한 그의 사고는 여전히 꼭두각시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컴퓨터와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시대, 독서는 어떻게 변할 것인가. 사실 책의 모양이나 읽는 방식은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돌판이나 점토판에 새긴 글은 두루마리에 옮겨졌고, 동양에서는 목판이나 천 위에서 글을 읽을 수 있었다. 서양의 중세인들은 텍스트를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 소리 내어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페이지에 쓰인 글, 즉 스크립타가 생명력을 갖기 위해선 입말, 즉 베르바가 돼야 한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영상, 음성 등 멀티미디어가 첨부된 컴퓨터 속의 텍스트를 읽는 현대의 독서법은 중세의 그것으로 돌아간 것일까. 컴퓨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독자의 것이 아니기에, 컴퓨터를 통한 독서는 ‘베르바에 날개를 단 것이 아니라 죽은 스크립타가 걷는’ 모양새라 할 수 있다. 그래도 컴퓨터의 방대한 기억 용량은 도움이 될 만하지 않은가. 특정 부분을 찾기 위해 과거에는 수십권의 책을 일일이 뒤져야 했지만, 요즘엔 검색어를 쳐 넣으면 된다. 하지만 망구엘은 컴퓨터의 기억이 ‘탐욕’스러울지언정 ‘능동적’이진 않다고 말한다. 책 읽기로 단련된 학습 능력과 직관을 통해 선별·조합·해석·연상하는 인간 두뇌의 작용을 컴퓨터는 흉내도 낼 수 없다.
전자 텍스트는 접근성이 좋다. 학습의 어려움 없이도 쉽게 얻을 수 있다. 당장 인터넷 검색창에 루이스 캐럴을 치면 그의 생애, 사진, 저작 등은 물론 그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의견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다시 ‘교육은 느리고 어려운 과정’이라는 말을 떠올려 보자. 이것은 정말 독서인가. 그저 정보의 수집은 아닌가. 종이 위의 ‘미로 찾기’ 게임을 할 때, 누군가 이미 풀어놓은 길을 다시 훑는 느낌은 아닌가.
컴퓨터를 몰아내는 ‘러다이트’ 운동을 벌이자는 사람은 없다. 단지 전자책이 인쇄매체를 몰아내야 한다는 ‘십자군’적인 생각은 접어두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인쇄물은 인쇄물대로, 전자책은 전자책대로 장점이 있다. 각자의 테크놀로지를 최대한 이용하는 것이 현명하다. 내 머릿속에 세운 방대한 도서관의 관장은 나, 사서도 나다. 나는 내가 읽은 책의 최고 권력자다. 그 막강한 권력을 포기할 이유는 없다.
모두들 어딘가에 책이 있을 것이다. 책을 들고 책을 읽자. 독자의 권리를 최대한 이용하자. 책을 갈기갈기 찢었다가 다시 이어붙이자. 그것도 온힘을 다해서. 두 가지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저자를 미워할 수도, 사랑할 수도 있다. 이 사랑은 쉬운 사랑이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끈끈하다. 저자의 지와 기를 짧은 시간에 흡수하기에, 독자는 인신 공양을 원하는 전설의 괴물 같기도 하다.
책 읽는 사람들 |
이상적인 독자는 여백에 의문을 끄적인다
이상적인 독자는 텍스트를 절개, 껍질 들어내고 골수까지 파들어가 완전히 다른 생명체를 만들 수 있는 번역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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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람들은 모난 것을 싫어하고 둥근 것을 좋아한다. 글자를 써서 글을 만드는 데도 무너지고, 기름지고, 미끈하나, 실은 다 아슬아슬해 계란을 포개놓은 것 같다. 매형은 글자를 쓸 때 삐쭉하건, 모나건, 비스듬하건, 바르건 못 쓰는 게 없다. 다만 둥근 것을 싫어한다.”(처남 이재성이 바라본 연암)
2003년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을 펴내며 국내에 고전 읽기 열풍을 일으킨 고전평론가 고미숙 씨는 연암 박지원(1737∼1805)에 대해 ‘근대화되기 전 조선사회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적 사유를 한 매력적인 지식인’이라고 평했다. 그가 남긴 글은 오늘날의 시각에서도 ‘파격적’인 내용이 적지 않다. 그렇기에 연암을 어떠한 사람이라고 한마디로 정의하기 또한 쉽지 않다.
국문학자로 연암에 대해 연구해온 저자는 연암과 동시대를 산 동료 학자 및 가족, 후손, 그리고 연암 자신 등 11명의 필자가 자신만의 시각으로 연암의 다양한 면모를 이야기하는 형태의 독특한 평전을 펴냈다. 조선 후기 대표적인 실학자, 또는 당대의 시대정신을 해학적으로 비판한 인물로만 바라볼 때 놓칠 수 있는 연암의 입체적인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
연암의 아내인 이씨 부인(1737∼1787)은 “그이는 나 이외의 여인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연암이 기생집 다니는 것보단 동료 지식인 한두 사람과 술상을 마주한 채 글을 읽고 감상하기를 좋아했다는 것. 아들 박종채(1780∼1835)는 “연암이 개와 기러기, 까마귀도 귀하게 대할 정도로 심성이 따뜻했다”고 털어놓는다.
연암은 스스로를 ‘조선의 삼류선비’라 칭했다. “술 권하는 과거(科擧)의 나라, 이 조선에서 태어난 나는 열일고여덟부터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렸다. … 서른넷에 과거를 포기하는 대신, 술과 벗, 글쓰기와 제자들을 얻었다. 내 병든 삶을 치유해준 소중한 만남들이다.”
당신, 연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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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의 제1부는 오늘날의 마르크스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살펴보며 시작한다. 마르크스를 레닌주의와 동일시하던 데에서 자유로워지면서, 1990년대에 등장한 세계화된 자본주의 세계가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예견했던 세계와 결정적으로 같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마르크스는 다시 한번 주목을 받게 되었다. 마르크스의 자본주의에 대한 견해와 자본주의의 생존방식에 대한 분석은 결코 현재적 관련성을 잃지 않은 것으로, 홉스봄은 “21세기의 마르크스는 20세기의 마르크스와는 아주 다를 것이 거의 확실하다”라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이어서 마르크스 이전의 사회주의에 대해서 살펴보고,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정치사상과 견해, 즉 국가와 제도에 대한 이론, 계급투쟁, 혁명, 사회주의 운동의 조직 형태, 전략 및 전술 등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에 관한 정치적 측면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다룬다. 이어서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 『공산당 선언』,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등 마르크스주의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저술들을 일별한 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출간되고 전 세계로 확산되었는지 알아본다.
제2부는 마르크스주의의 영향과 발전, 퇴조에 이르기까지를 살펴보고 마르크스의 현재적 의미를 다시 검토한다. 빅토리아 시대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들, 1880-1914년에 걸친 시기에 노동자 정당 및 사회주의 정당의 발전,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도약 등의 모습으로 나타난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살펴본다. 그리고 반파시즘 시대(1929-1945)의 지식인들의 정치적 급진화, 인텔리겐치아의 민주화,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반파시스트 정책 채택, 자유민주주의자에서부터 아나키스트에 이르는 좌파들을 통일시킨 에스파냐 내전 등을 통해서 당시 마르크스주의의 역할과 의미에 대해서 알아본다. 또한 홉스봄은 두 장(章)을 할애하여, 정치의 중요성을 가장 분명하게 평가한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였던 그람시의 정치이론에 대해서 살펴본 뒤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그람시가 어떻게 수용되었는지를 살펴본다.
이어지는 1945-1983년의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에 대한 장에서는, 그의 사상이 20세기 사회혁명의 본질적 국제적 원리가 되었으며, 1945년 이래로 1956년 이후 소련과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에서의 발전, 1950년대에 “제3세계”라고 불리게 된 나라들과 관련된 발전, 1960년대 말 산업자본주의 국가에서, 특히 학생들의 정치적 급진화의 분출과 관련되어 논의가 형성되었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점점 국제적 정통성의 결합력을 상실했으며, 소련과 소비에트 모델은 결국 몰락했고, 결국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가 사망한 지 100년이 되는 시점에서 정치적, 지적으로 빠르게 퇴조하게 된다.
그러나 홉스봄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그 본질인 마르크스주의는 여전히 우리에게 현재성과 중요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그는 계급투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2008년에 일어난 심각한 자본주의 위기 이후 우리는 자본주의가 답이 아니라 질문이라는 것을 재발견하게 되었다는 점을 일깨운다. “시장”이 주요한 문제들에 대해서 아무런 해답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명백하다는 것이다. 이런 위기를 맞은 현실에서 마르크스가 우리에게 가지는 의미를 또 한번 생각하며, 그는 “다시 한번 마르크스를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 때가 왔다”라는 말로 이 책을 마무리한다.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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