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은 '팡세'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짧았더라도 세상사가 달라졌을 것'이라 했다. 파스칼이 역사에서 '우연성'을 중시했다면, '역사의 동인'을 다른 데서 찾는 사람도 많다. 역사 해석은 결국 어떤 키워드를 '동인'으로 삼는가에 따라 각양각색이 된다.
저자는 이전까지 역사의 무대에서 조연, 혹은 엑스트라에 불과했던 이들을 클로즈업한다. 그것도 방탕한 술꾼과 게으른 노예, 이민자와 매춘부 등 하나같이 '불량' 시민이다. 주류 규범에서 벗어나 있었던 이들이 세상에 새로운 쾌락을 도입하고 자유를 확대했으며 사회를 좀 더 살 만한 곳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 미국판 '하류인생' 공로사다.
청교도의 나라 미국도 처음엔 '타락과 방종, 패악'이 넘쳤다. 독립전쟁이 한창이던 1777년 4월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인 존 애덤스(1735~1826)는 이렇게 토로한다. "실은 기근과 전염병, 그리고 검보다 더 무서운 적이 하나 있네. 너무나 많은 미국인의 마음에 만연한 타락, 즉 성적 방종을 말하는 것인데…."
독립의 거점인 필라델피아에만 인구 100명당 술집이 1개꼴이었다. 신문은 "노동자는 매일 낮에 맥주를 마시고 밤이면 월급의 반을 럼주를 마시는 데 허비한다"고 썼다.
하지만 이런 술집과 유흥가야말로 '시민 해방'과 인종 평등의 산실이었다. 미국에서는 처음으로 이곳에서흑백과 이민자가 한데 어울렸다. 성(性)혁명도 여기서 비롯했다. 미국사에서 독립전쟁 전후만큼 인구당 사생아 수가 많았던 적이 없었다. 당국은 술꾼들을 '절주 감옥(Sober House)'에 가뒀지만 음주와 매춘은 도시 · 시장의 확대와 더불어 늘어만 갔다. 이 모든 것은 갈수록 경직성을 더해갔을 미국의 청교도 문화에 자유와 해방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심었다.
건국의 주역은 노동과 근면을 독려하기 바빴다. 하지만 정작 많은 백인이 '일보다 삶의 즐거움'을 앞세우는 흑인의 삶을 곁눈질했다. 청교도 윤리에 묶인 백인 농장주에 비해 노예의 놀이는 과격하면서 관능적이고 자유로웠다. 백인이 얼굴을 검게 칠하고 흑인 춤과 노래를 따라 하는 '민스트럴 쇼(minstrel show)'가 도시마다 인기였다.
'휴가' 개념도 노예가 선구자였다. 이들은 일하기 싫으면 숲으로 도망가서 한두 주 후에 돌아오곤 했다. 통계에 따르면 북부의 농부는 노예보다 연평균 400시간 더 일했다.
백인 청년은 거리낌없는 흑인 문화에 홀렸다. 앨런 긴즈버그 같은 비트족(Beats) 작가군은 백인 중산층 청년이 흑인 문화를 통해 비로소 소외감을 이겨내는 작품을 썼다. 노예 해방 후 흑인은 도시로 가 재즈와 블루스를 연주했다. 주류 문화에 길들지 않았던 흑인 음악이 결국엔 백인문화와 세계를 평정했다.
다양한 이민자도 태만과 반항의 문화를 신대륙에 이식했다. 1876년 뉴욕타임스 사설은 "이탈리아인은 미국인보다 더 게으르고, 더 많은 험담을 늘어놓고, 속임수에 능하다"고 우려했지만 '억압적인' 금주령을 무너뜨린 주역이 이탈리아계 갱스터이다. 이들의 주류 밀매업 덕에 시민은 삶의 애환을 달랬다.
재즈가 처음 연주된 곳도 시칠리아 이민자 폭력조직의 클럽이었다. 알 카포네는 가난한 연주자를 도왔고, 여기서 루이 암스트롱 같은 귀재가 나왔다. 현대 대중예술의 본산인 브로드웨이, 라스베이거스도 모두 조직범죄 큰손의 초기 투자에서 싹텄다. 당시 값싸고 선정적이며 폭력적인 '불법' 영화를 제작 · 배포했던 회사가 오늘날 세계 엔터테인먼트계의 '메이저'인 MGM, 유니버설, 파라마운트, 20세기폭스, 워너브러더스로 컸다.
미국 최초의 '신여성'도 매춘부라면 믿어질까. 이들은 재력가와의 결혼이 유일한 성공의 길이었던 시대에, '불량한 샛길'을 통해 자력으로 삶을 개척했다. 남성 노동자로 붐비는 개척 도시에서 억척같이 부를 쌓았다. 성적 터부는 물론 사회적 금기가 이들 손에 무너졌다. 오늘날 화장 · 패션산업의 길을 닦은 것도 이들이었다. 훗날 대통령 부인도 따라 한 단발 웨이브 헤어스타일도 실은 사창가에서 시작됐다. 직장의료보험이 도입되기 몇십 년 전, 마담들은 자기 수하 여성들에게 무상의료를 제공했다. 공공의료 개념이다. 이 중 '큰손'은 신도시의 관개 · 도로건설 계획에 자금을 대거나 공교육제도 도입에도 일조했다.
이쯤 되면 미국사는 온통 'B급 인생의 행진'인가도 싶다. 저자는 서둘러 선을 긋는다. "이 책의 영웅이 사회를 장악했다면 그 사회는 지옥으로 갔을 것"이라고. 그 반대편 '사회질서 수호자' 역시 나름의 핵심적인 사회 기능인 안전 · 안보 · 공공위생 제공 같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추가한다. 다만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폭이 이 '두 세력 간 투쟁'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결론짓는다.
위대한 영웅전, 심각한 계급투쟁류의 역사책에 식상한 독자에게 새로운 시야를 열어 보이는 책. 루스벨트의 뉴딜 시대를 나치의 국가사회주의와 비교하는 등 제도권 사가의 시비를 부를 대목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일반독자들에게는 '불량식품' 같은 맛과 즐거움을 선사한다.
불한당들의 미국사 |
술꾼·매춘부·갱스터… 미국을 바꾼 건 '하류 인생'
미국의 변화에 일조한 '밑바닥 인생들의 몸부림'
자유의 가치를 만든건 19세기 미국의 술꾼과 창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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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은 두 개의 어려움에 봉착해 있는데, 그것은 기아와 중국의 반동주의자들 때문이다.'
베트남 통일 직후인 1975년 5월, 사이공 공항에 내린 베트남노동당 레 주언 서기장은 중국의 위협을 겨냥한 경고부터 쏟아냈다. 라오스·캄보디아와 군사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고도 했다. 중국의 세력 확대에 공동 대응하겠다는 의미였다. 베트남과 중국의 갈등은 1979년 중국의 베트남 침공으로 폭발한다. 베트남이 1978년 12월 친(親)중국의 폴 포트 정권을 내쫓기 위해 캄보디아를 침공한 것이 발단. 베트남과 중국의 전쟁은 사회주의 국가 간의 전쟁이란 점에서 세계를 놀라게 했다. 하지만 2000여년에 걸친 중국과 베트남의 관계를 짚어보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국내 베트남사 권위자인 유인선 전 서울대 교수가 쓴 이 책을 살펴보면 베트남 역사는 중국의 침략과 지배에 맞서 싸워온 세월이다. 베트남은 기원전 2세기 말 한나라에 의해 남월(南越)이 멸망한 후 1000년간 중국 지배를 받다가 기원후 10세기 딘보린이 독립왕조를 세웠다. 이후 19세기 말 프랑스 식민지로 전락할 때까지 베트남은 중국에 조공하면서도 인도차이나반도의 맹주로 행세하며 황제를 칭했다.
역대 중국 왕조들은 베트남의 통일을 바람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명과 청은 레(黎) 왕조를 찬탈한 막(莫)씨 후손이 하노이에서 쫓겨난 뒤에도 계속 후원했다. 중국 남쪽에 강력한 통일왕조가 있는 것보다 분열 상태인 것이 중국의 국가 이익에 부합했기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의 마오쩌둥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은 당초 하노이 정부를 지원했으면서도 전쟁 막바지, 남베트남공화임시혁명정부를 지지했다. 이런 중국의 베트남 남북 분리 방침은 하노이 정부의 감정을 건드렸다.
현재 두 나라는 우호관계지만 스프래틀리 군도(남사군도) 영유권 분쟁을 비롯, 중국의 공격적 진출에 대한 베트남의 두려움은 여전하다. 작년 중국의 항공모함 건조를 계기로 베트남 정부가 미국은 물론 인도, 일본과 군사 협력을 꾀하는 점이 그렇다. 베트남에 대한 역사적 이해뿐 아니라 오늘날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를 읽어내는 데 새로운 안목을 제공하는 책이다.
베트남과 그 이웃 중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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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언어가 훨씬 풍부하고 정직하다."라고 이 책은 말한다. 명탐정 셜록 홈스는 손톱, 외투 소매, 구두, 바지 무릎, 굳은살, 몸놀림을 보고 그 사람의 정체를 파악했다. 해독하는 솜씨라면 점쟁이도 빠지지 않는다. 생년월일만 툭 던져주면 고객의 눈빛 · 표정 · 말투 · 차림 · 몸짓을 보며 실체에 다가가기 때문이다.
인간 진화의 긴 역사로 보면 언어가 의사소통 수단이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보디랭귀지 연구의 선구자 앨버트 메라비언은 의사소통에서 혀의 언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7%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음조 · 음색 · 억양 등 목소리를 통해 내는 소리가 38%, 비언어적 신호가 55%에 달한다는 것이다. 보디랭귀지를 읽을 줄 안다면 사실과 허구, 의식과 무의식을 구분할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이 정직하고 진실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을 때 손바닥을 내보인다. 어린아이는 거짓말을 하거나 뭔가 숨길 때 손을 등 뒤로 감추곤 한다. 밤새 딴짓 하다 들어온 남편은 아내에게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주머니에 손을 넣거나 팔짱을 껴 손바닥을 숨긴다. 반면 여자는 거짓말을 할 때 손이 바빠진다. 엉뚱한 이야기를 하면서 부산하게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것이다. 손을 감추는 것은 입을 다무는 것과 같다.
손바닥이 위로 향하느냐 아래로 향하느냐는 하늘과 땅 차이다. 위로 향한 자세가 순종적이고 비위협적인 몸짓이라면 아래로 향한 자세는 권위를 상징한다. 이것은 악수에도 적용된다. 악수할 때 손바닥을 아래로 향하게 내미는 사람은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뜻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말할 때 손가락을 쓰는 사람은 상대에게 불쾌감을 준다. 하지만 검지에 엄지를 붙이기만 해도, 청중을 위협하지 않으면서 권위를 세울 수 있다.
침묵으로 이야기하는 마임, 몸의 언어로 집을 짓는 춤은 종종 음성 언어보다 강력하다. 프랑스 마임이스트 마르셀 마르소는 희극 가면과 비극 가면을 번갈아 쓰고 벗는 장면을 표정만으로 연기해 전설이 되었다. 반면 찰리 채플린, 로버트 드니로 같은 대배우는 표정이 거의 없다. 그들은 몸짓이나 눈빛, 대사의 톤으로 단단하게 감정을 뭉쳐 던졌다.
진실한 미소를 지을 때 눈가의 주름은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근육 때문에 생긴다. 또 거짓 웃음과 달리 진짜 웃음은 눈두덩이 아래로 내려가고 눈썹 끝이 살짝 처진다. 입술을 꽉 다문 미소는 비밀을 숨기고 있다는 뜻이다. 다이애나 왕세자빈은 고개를 숙이고 살짝 옆을 보면서 짓는 미소로 남성의 보호 본능을 자극했다.
다리는 몸에서 가장 믿음직한 거짓말탐지기다. 거짓말을 할 때는 하체의 움직임이 증가한다. 다리와 발의 자세를 보면 대화를 이어가고 싶어하는지 아닌지 가늠할 수 있다. 발끝은 마음이 향하는 방향을 가리킨다. 다리를 꼬고 앉았을 때 교차한 다리의 윗부분이 상대를 향해 있으면 좋은 관계, 벽을 쌓은 모양새라면 불편한 관계다. 꼰 다리를 손으로 잡고 있는 사람은 고집을 버릴 생각이 없다.
저자는 몸짓 언어만 30년간 파고들었다. 미국에서 500만부 팔린 베스트셀러 '보디랭귀지'로 이름난 그들은 팔짱, 깍지, 턱 쓰다듬기, 곁눈질, 고개 끄덕이기, 여자의 핸드백, 회의실에서 자리 잡기 등에서 사람의 심리를 잡아낸다. 자크 시라크, 찰스 황세자, 빌 클린턴, 아돌프 히틀러, 조지 W 부시, 맥 라이언, 메릴린 먼로, 휴 그랜트 등을 배우로 쓰면서 비언어적 신호를 설명한다. 읽다가 킬킬 웃게 되고, 흘리고 다닌 몸짓을 후회하고, 무릎을 탁 치는 순간도 온다. 연애, 비즈니스, 직장 생활에 요긴하다.
당신은 이미 읽혔다 |
내 몸이 뭐라고 말하는지 맞혀 보실래요?
여자의 발끝은 ‘마음에 드는 남자’를 향한다
살짝 올려다보는 미소는 어린아이 미소라서 보호본능을 자극한다… ‘당신은 이미 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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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은 보따리다. 이 보따리는 너무나 커서 온갖 이질적인 주장과 이론을 하나로 묶어낸다. 보따리 속의 주장은 서로 자신이 진화론의 계승자임을 주장하며 학계 내에서 적자생존의 경쟁을 벌이고 있다. 정작 <종의 기원>(1859)에서 ‘진화’라는 단어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찰스 다윈이 이 상황을 봤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진화론은 원래 생물학자이 활개 치는 영역이었는데, 나중엔 온갖 배경의 사람이 진화라는 화두를 공유하려 했다. 사회현상에 진화 개념을 적용하려는 시도는 격렬한 찬성과 반대 의견을 동반했다. 일본 애니메이션 <포켓몬스터>의 창작자는 자신의 귀여운 괴물이 ‘진화’하게 만들었는데, 그 결과 전 세계 아이는 포켓몬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진화’하는지 줄줄 외우기 시작했다.
마틴 노왁은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다. 빈 대학에 입학한 그는 “수학에 우주를 관장하는 법칙을 정식화하는 열쇠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수학적 진실이 실재적이고 절대적이어서, 지구인뿐 아니라 태양계 너머 머나먼 행성의 촉수 달린 외계인에게도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고 믿는다. “우주 자체가 수학”이다. 그러므로 생물의 진화에 대해 수학적 해석을 덧붙이지 못할 이유가 없다. 옥스퍼드대, 프린스턴대를 거쳐 현재 하버드대 생물학과 · 수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그의 연구실은 ‘노왁 랜드’라고 불린다. 전 세계에서 모인 생물학, 수학의 천재가 노왁 랜드에서 수학을 도구로 생명의 기원, 진화를 연구하고 있다.
진화론에 대한 노왁의 의문은 이렇다. 자연이 선택한 적자(The Fittest)가 생존해 그 유전자를 후대에 퍼뜨리는 것이 진화론의 골자라면, 생명의 세계는 오직 살아남기 위해 피를 튀겨야 하는 전장인가. 시인 앨프리드 테니슨의 표현대로 자연은 “피 칠갑을 한 이빨과 발톱”을 가지고 있는가. 세상은 온통 갈등의 장인가.
유명한 ‘죄수의 딜레마’를 먼저 떠올려보자. 두 공범이 잡혀 따로 취조받는다. 네 가지 경우의 수가 있다. 둘 다 묵비권을 행사할 경우, 둘 다 죄를 시인할 경우, 한쪽만 묵비권을 행사할 경우 등이다. 둘 다 묵비권을 행사하면 검사가 둘에게 중죄를 물을 근거가 없어 2년형을 받는다. 이것은 둘이 서로 협력하는 경우다. 둘 다 서로를 범인으로 지목하면 둘은 중죄로 기소되지만 자발적으로 정보를 제공했기 때문에 3년형을 받는다. 이것은 둘이 서로 배신하는 경우다. 한쪽이 배신하고 다른 쪽이 협력하면 배신한 쪽은 1년형을, 협력한 쪽은 4년형을 받는다. 두 범인은 사전에 협력을 모의할 수 없다. 보수 행렬(payoff matrix)이라고 불리는 선택의 표를 그려볼 때,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라면 ‘배신’을 택해야 한다. 즉 둘 다 3년형이다. 상대방의 ‘선의’를 믿고 침묵을 지켰다가는 4년간 감옥에 갇힐 수 있기 때문이다. 진화론의 자연 선택 역시 배신을 지지한다. 진화론의 언어를 쓰자면 “협력자는 항상 배신자에 비해 낮은 적합도(번식률)를 지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범인이 협력해 2년형을 받고 풀려나는 수는 없는 걸까. 사실 생명은 최선의 방향으로 진화해왔다. 생물이 갈등을 접고 때론 협력한다는 것은 다윈의 딜레마였다. 숭고함을 느끼게 하는 인간의 이타적 행위는 말할 것도 없고, 침팬지·사자·개미·벌의 세계에서도 종종 이타적인 행위와 협력이 관찰된다. 다윈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리처드 도킨스는 ‘유전자’를 통해 풀어보려 했다. 그는 <이기적 유전자>(1976)에서 진화의 주체는 종이 아니라 유전자이기 때문에, 종 전체의 보호를 위해선 개체의 이타적 행위가 나타날 수 있다고 봤다. 그로부터 35년이 지난 뒤 노왁은 변이, 선택이라는 진화의 두 가지 규칙에 협력이라는 세 번째 규칙을 덧붙여야 한다고 제안한다.
먼저 ‘죄수의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다섯 가지 원칙이 있다. 우선 ‘직접 상호성’이다. “내 등을 긁어다오. 그렇다면 나도 네 등을 긁어주겠다”로 요약될 수 있는 이 방법은 생물계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코스타리카의 흡혈박쥐를 조사해 보니, 밤 사이 충분한 피를 마신 박쥐는 사냥에 실패한 동료에게 자신이 빨아낸 피를 토해서 먹였다. 덕분에 매일 밤 몇 퍼센트의 성인 박쥐와 3분의 1가량의 어린 박쥐들은 피 한방울 사냥하지 못하지만, 굶어죽는 개체는 거의 없었다. 흥미로운 건 박쥐가 과거에 자신에게 피를 나눠줬던 박쥐에게 피를 더 잘 준다는 사실이다.
‘간접 상호성’은 “내 등을 긁어다오. 그러면 너의 선행을 본 누군가가 네 등을 긁어줄 것이다”로 표현할 수 있다. 직접 상호성이 개인의 경험에 기반한다면, 간접 상호성은 다른 사람의 경험까지 고려한다. 집단 내 ‘평판의 힘’에 의지해 이기심을 제어하는 것이다. 간접 상호성은 영토와 인간 관계가 확장된 대규모 사회가 출현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공간 게임’은 우리의 협력이 특정 공간을 전제할 때 더 잘 일어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조미료나 공구는 낯선 사람이 아니라 평소 안면을 익힌 이웃에게 더 쉽게 빌릴 수 있다. 이는 생명의 기원을 상상할 때도 적용된다. 비유기체 화학물이 유기체 화학물로 전환된 것은 매우 우발적이고 특정한 장소에서만 가능했다.
‘집단 선택’은 협력이 개체가 아니라 그보다 상위인 집단의 이익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사실 진화생물학자들은 집단 선택 개념을 이단시했으나, 최근 와서는 조금씩 받아들이는 추세다. 배신자들은 개체 수준에서는 승리하겠지만, 배신자들만 모인 집단은 협력자들로 이뤄진 집단을 이길 수 없다. ‘혈연 선택’은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옛말로 요약된다. 혈연 관계가 강한 이들과는 협력하기가 쉽다.
사실 협력 없이 생명은 존재할 수 없었다. 단세포 생명체들이 가깝게 어울려 하나처럼 작용하다가 고등세포가 됐다는 이론이 있다. 반면 암세포는 협력이 아닌 배신을 택한 대표 사례다. 엄청난 수준의 협력을 통해 형성된 복잡한 신체에서 암세포는 증식이라는 자신의 목적만 위하다가 신체 전체를 위험에 빠트린다.
그러나 세포나 동물의 협력을 통해 인간 사회를 설명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비유일 뿐이다. 그것은 인간의 공격성, 이타성 등을 진화론으로 설명하는 사회생물학이 현실의 부조리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돼서는 안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인간의 문명은 단세포 생명체 수준의 협력을 뛰어넘는 그 어떤 수단을 통해 이룩됐다.
노왁은 인간이 가진 그 수단을 설명한다. 가장 강력한 것은 언어다. 그는 “언어의 탄생은 지난 6억년 동안 발생한 가장 중요하고 놀라운 사건”이라며 “이는 최초의 생명체가 등장하면서 시작된 진화의 전개 그 자체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언급한다. 인간 이전 생명체는 DNA나 RNA 등 화학적 유전물질로 정보를 교환했고, 원숭이 · 새 · 벌 역시 ‘언어’를 사용한다지만 그것은 인간의 언어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단순하다. 반면 노왁은 “우리가 언어를 창출했다고 믿고 싶겠지만, 이는 앞뒤가 바뀐 주장이다. 언어가 우리를 창출했다”고까지 말한다. 언어를 사용하기 위해서 인간의 뇌 역시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다. 영어 사용자를 조사해보면 여섯 살짜리 아이가 1만3000개 어휘를 쓴다. 1세부터 7세까지 익히는 인간의 단어 학습 속도를 계산하면 깨어있는 90분마다 한 단어를 배우는 셈이다. 큰 뇌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출산에도 위험하지만, 큰 뇌가 언어 사용을 도운 덕분에 인간의 삶은 더욱 정교해졌다. 무작정 공격이 아니라 말을 통한 협력이 가능해진 것이다.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 역시 협력을 증진시키는 한 방안이다. ‘공유지의 비극’ 게임은 죄수의 딜레마를 변형한 것이다. 농장주 사이에 공유 목초지가 있을 때 농장주는 자신의 가축을 굳이 이곳에 풀어놓아 목초지를 과잉 이용한다. 그렇게 하면 목초지가 황폐해져서 누구에게도 이득이 돌아가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말이다. 노왁은 오늘날의 기후 변화도 이 같은 이유로 일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인류가 지금과 같은 삶의 방식을 유지한다면 지구가 큰 위험에 처할 테지만, 그럼에도 연비가 낮은 차를 타거나 물을 펑펑 흘려보내는 이들이 많다. 지구의 위기에 대한 정보를 지속적으로 전하고, ‘간접 상호성’에서 언급된 ‘평판의 힘’을 이용해 이런 행동을 자제시켜야 한다. 도요타의 인기 많은 하이브리드 자동차 프리우스는 쉽게 눈에 띄는 디자인으로도 유명한데, 이는 “난 지구온난화를 걱정하는 시민이야”라는 점을 홍보해 평판을 유지시키는 역할도 했다는 것이다.
시대와 지역을 아우르는 전 세계 현인의 말을 살피면 ‘도덕체계의 황금률’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네가 네 이웃에게 바라는 존재, 너도 그런 존재가 될지어다”(그리스 철학), “네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라”(기독교), “자신에게 해가 된다고 여기는 그런 것들을 남에게 결코 해서는 안된다”(힌두교), “누구도 너를 해하지 못하게 하려거든 누구도 해하지 말라”(이슬람교), “네가 원치 않는 것은 남에게도 행하지 말라”(유교) 등의 격언은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수학자가 최신의 게임이론을 동원해 현대의 진화생물학을 파고들어 얻어낸 아이디어가 옛 현인의 가르침과 비슷하다는 것은 지적인 짜릿함을 전한다.
노왁은 게임이론과 진화생물학의 결합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중 독자를 의식한 듯, 자신의 학문 여정, 현대 과학의 발전을 위해 애쓴 동료들의 에피소드, 학문 세계의 별스러운 전통도 흥미롭게 전한다. 미국의 학자 조지 프라이스는 한계에 갇혀 있던 게임이론을 자연 선택에 적용하는 업적을 보인 인물이지만, 예수의 말을 직접 들었다고 주장한 순간부터 학문 대신 사회사업에 몰두했다. 알코올 중독자를 돕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그는 결국 가산을 탕진한 뒤 자살했다. 인간의 이타성, 선함이 과연 존재하는지 결국 알아내지 못한 채로 말이다. ‘공유지의 비극’ 게임을 처음으로 설계한 가렛 하딘은 애덤 스미스식으로 자유롭게 행동하는 개인은 결국 공동선을 파괴할 것이라고 봤고, 생태계가 “태어나는 모든 생명을 감당할 만한 여유는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안락사를 지지했던 하딘과 그의 아내는 62번째 결혼기념식을 마친 직후 자살했다.
책의 제목은 <초협력자>(Supercooperators)지만, 정작 ‘초협력자’에 대한 설명은 별로 없다. 단지 인간은 ‘직접 상호성’ ‘간접 상호성’ 등 협력을 위한 다섯 가지 원칙을 모두 사용하는 유일한 종이기에, ‘초협력자’라고 불릴 수 있다고 말하는 정도다. 그렇다면 책의 제목은 지금까지의 분석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앞으로의 염원에 대한 것이라고 보는 편이 좋겠다.
초협력자 |
진화론의 숨겨진 규칙, 협력
협력이 `죄수의 딜레마`를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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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발 금융 위기 이후 미국의 일부 대형 은행이 국민의 혈세를 끌어다가 보너스를 지급한 사실이 밝혀져 큰 논쟁을 촉발했다. 세계적인 파장을 일으킨 장본인이 또다시 반성 없이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곧 금융부문의 지불 능력을 회복하는 데 필요하다는 논리로 황당한 보너스 지급은 정당화되어 버렸다.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공공정책과 노동시장의 변화를 연구해 온 영국 사회학자 콜린 크라우치는 <왜 신자유주의는 죽지 않는가>(원제 the Strange Non-Death of Neoliberalism)에서 금융위기 이후 대기업, 특히 거대 금융기업이 어떻게 제동 없이 '대마불사'의 논리를 펼칠 수 있었는지 자유주의, 케인스주의, 사회민주주의, 신자유주의로 이어지는 정치 경제의 역사를 보여주며 더욱 강력한 권력을 쥐게 된 그들의 실체를 예리하게 파헤친다.
대형 은행 등 파산 선고 이후 더 강력해진 기업을 제3세력으로 명명하며 이들을 권력자로 옹립한 신자유주의를 고발한다. 그러면서 각국 정부가 민간 기업에 하도급을 주며 기업이 공공정책을 수립하는 데 관여하는 경향이 커지는 작금의 상황에 강한 우려를 보낸다. 책은 우선 신자유주의의 역사를 살피며 '국가와 시장의 대립' 구도로 발현하는 신자유주의 논쟁이 한참 잘못된 것임을 지적한다. 애초부터 순수시장은 작동할 수 없으며, 진입장벽을 높여 놓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완전경쟁이 왜곡되고 무력해지는 데 일조한 이들 세력 뒤에는 사적 권력을 용인한 공모자 국가가 존재한다며 공기업 민영화의 불편한 진실 등을 밝힌다. 저자는 신자유주의야 말로 사유화된 케인스주의라며 비판의 날을 세운다.
민주주의를 텅 빈 껍데기로 몰아가는 제3세력의 위험에 경고를 표하며 찾은 돌파구는 공적 가치를 추구하는 시민사회, 즉 제4세력이다. 책은 시민의 각성을 요구하며 "어떻게 해서 신자유주의가 금융부문 붕괴 이후 더 정치적으로 강력하게 등장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것으로 임무를 대신한다.
크라우치는 “신자유주의가 이제 수명이 다해가고 있다”고 진단하면서 ‘우파의 왼쪽’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진단한다. 크라우치의 대안은 비판의 강도만큼 세지 않다. “진정한 다원주의를 창출할 수 있는 역량이 있기 때문”에 시민사회의 활력을 기대해보자는 정도다. 그는 “좋은 사회를 만드는 데 필요한 네 가지 힘 즉 국가, 시장, 기업, 시민사회 사이의 계속적인 긴장이 존재하는 경제를 지지한다”며 “이런 긴장이 창조적으로 유지된다면, 기업가의 혁신과 권력 불평등에 대한 억제를 모두 가져올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말을 덧붙였다. “물론 계속해서 기업의 부가 지배하는 그늘 아래서 유지될 공산이 크긴 하지만 말이다.”
신자유주의와 더불어 요즘 대선 정국의 가장 뜨거운 유행어가 된 경제민주화에 관한 불편한 진실을 밝힌 <한국 경제론의 충돌>도 함께 읽어볼 만하다. 저자는 오랫동안 재벌 타파를 외쳐 온 이병천 강원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벌 옹호론자로 찍힌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를 조목조목 반박한다. 유력 경제학자인 그의 발언의 위험성을 지적하며 박정희 체제의 유산에 대한 평가에 있어 긍정적인 장 교수 그룹이 자본과 노동의 계급관계에 대한 문제의식이 희박한 탓에 중요 경제 이슈에 혼선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장 교수와 뜻을 같이 하는 그룹이 노동 세력의 주적을 금융자본으로 겨냥하면서 신자유주의 지배 세력에서 재벌을 제외시켰다는 점을 근본문제로 지적한다.
왜 신자유주의는 죽지 않는가 |
한국 경제론의 충돌 |
위기 맞고도 건재한 신자유주의, 가면을 벗기다
죽었다 살아나 더 강해진 금융권력
기업 지배에 종속된 국가·정치…그래서 신자유주의는 죽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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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경제학 수치로만 따져 오늘날 지구촌은 엄청난 경제성장으로 중세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이 부유해졌어요. 그런데 지금은 집 한 채 사는 것이 매우 어렵게 되었고, 부부가 1년 내내 맞벌이해야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어요. 그것마저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요. 이런 경제학은 버려야 합니다. 이제 경제학은 윤리학 생물학 심리학 지구과학까지 포괄하는 거대 담론이어야 합니다.”
한국은행에서 화폐 발행 실무를 총괄하는 조군현씨가 경제학의 새 이정표를 제시하는 책을 번역해냈다. 세계적인 진보 경제학자 2인이 쓴 ‘이기적 경제학 이타적 경제학’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실체를 고발하고 새로운 경제 시스템 창안을 역설한다.
“전통 경제학자 계산에 따르면, 근대기 이전 중세 때 보통 농부 한 사람이 연평균 15주 정도 일하면 1년 동안 생활하는 데 필요한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런데 지난 200년 동안 유례없는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중세의 소작농들보다도 더 죽어라고 일해야 살 수 있다. 참으로 불가사의하다.”
그는 특히 척박한 경제 현실이 안타깝다면서, “전 세계 인구 중 30억명이 하루에 2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살고, 가장 잘산다는 미국조차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절대빈곤자가 4000만명”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세계 상위 1%의 부자들은 57%의 가난한 사람들의 소득을 합한 것보다 많이 벌고 있으며, 이런 부의 불평등이 계속 심화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조씨는 “애초(애덤 스미스 등의) 경제학은 소수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해 존재했다”면서 “이런 불합리한 현대 경제학은 새로운 경제학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GDP(국내총생산)로 대변되는 ‘경제성장’이라는 말 자체가 잘못됐다”면서 “현대인들이 무의미한 ‘경제성장’으로 ‘삶의 질’을 맞바꾸는 것은 비효율적이며 지구 자원만 낭비한다”고 역설한다.
따라서 진정한 경제학이란 “우리가 갖고 있는 자원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삶의 질을 높이는 방법이어야 한다”면서, “이 책은 GDP를 공해, 질병, 천연자원 고갈 등의 사회·환경적 비용을 뺀 ‘참경제발전지수(GPI)’로 대체하자”고 제시한다.
이기적 경제학 이타적 경제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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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이 다가오면서 지도자의 자질 문제가 세간의 화두로 떠올랐다. 위기의 시대 지금 우리에겐 어떤 스타일의 지도자가 적합한가. 상식적인 대답은 대개 이런 종류다. ‘시대를 읽어내는 현실주의적 감각,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는 공감 능력, 새로운 생각을 만들어내는 창의력, 그리고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놀라운 회복력을 갖춘 지도자라고….’ 이런 자질은 흔히 말하듯이 ‘정신적으로 건강한’ 지도자만이 가능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 반대의 경우라면 수긍할 수 있을까.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지도자가 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사례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미국의 정신의학자 나시르 가에미는 신작 ‘광기의 리더십’(원제 ‘A First-Rate Madness’)에서 정신적으로 고통을 겪었던 지도자들의 특질을 도출, 종래의 통념을 뒤집는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지도자가 반드시 위기 때에도 성공적이고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위기의 시대에는 정상인 지도자보다 정신 질환이 있는 지도자가 더 강력한 능력을 발휘했다는 것. 결론적으로 정신적 또는 육체적 고통을 경험한 인물들은 위기의 시대에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이 보지 못하는 혜안과 강인한 정신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위기의 시대에 빛을 발한 지도자들을 조사해 4가지 공통적 특성을 찾아냈다. 현실주의, 공감 능력, 회복력, 창의성이 그것이다.
실례로 위기에 처했을 때 현실과 현상의 부정적인 측면을 간파한 인물은 처칠과 링컨이었다.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며 진정으로 공감한 위인은 간디와 마틴 루서 킹이었다. 또 시련과 역경에 부딪혀 쓰러졌다가도 다시 일어서는 빠른 회복력을 보인 인물은 루스벨트와 케네디였다.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만들어낸 대표적 인물은 셔먼과 테드 터너였다. 천성적으로 교만하고 자신밖에 몰랐던 루스벨트는 소아마비와 정신적 합병증을 앓고 난 이후, 뛰어난 리더십과 인간성을 보였다.
반면 조지 매클렐런, 체임벌린, 리처드 닉슨, 조지 W 부시, 토니 블레어 등은 위기의 시대에 실패한 지도자로 묘사됐다. 저자는 이들을 ‘일반적 통념에 따르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호모클라이트로 이름 붙였다. 호모클라이트형 지도자는 평상시 훌륭한 양치기 역할을 수행했지만 위기 때는 거의 우왕좌왕했다. 이들은 난제를 앞에 놓고 낙관주의적 착각에 빠졌고, 위기 발생 시의 끔찍한 난국을 정신력으로 극복하기 어려워했다는 것. 특히 주변의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고집했다고 한다. 이는 현실주의적인 시각의 부족으로, 공감 능력이 떨어지며 실패를 통해 교훈을 얻지 못하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아돌프 히틀러와 존 F 케네디의 비교 조사도 흥미롭다. 조울증이라는 양극성 장애를 앓았던 히틀러는 적절한 치료 없이 약물을 남용하다 세상을 파괴하는 악마가 되었다. 이와 달리 조울증에 성욕 과잉이었던 케네디는 측근들이 과다한 약물 사용을 막음으로써 목숨을 구하고 리더십을 극대화했다. 이 둘의 차이는 어디서 유래하는가.
저자는 나치 지도자들의 사례를 통해 입증해 보인다. 나치 지도자 경력자 24명을 상대로 2년여 면담 결과 이들 대부분은 미쳤거나 광신자였다는 통념과는 달랐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이었고, 평균 이상의 지능과 도덕관념을 지녔으며 근검 절약 독일형 엘리트였다. 하지만 그들은 호모클라이트 지도자들처럼 자기 과신에 빠져 있었고, 공감 능력이 부족하며, 무엇보다 실패를 통해 배우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독일 국민 대부분이 나치 지도자들처럼 정신적으로 건강했으며, 다른 나라 국민이나 지도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 이는 소름끼치는 사실이었다.
인터뷰에 응한 나치 지도자 24명은 ‘냉소적이고 운명론에 푹 빠져 있지만 정상적인 성격’ 등의 진단을 받았다. 저자는 이들이 자기 과신에 빠진 호모클라이트 지도자의 전형이었다고 진단한다. 다만 좀처럼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선동가 히틀러에게 조종당하는 약점을 보였다고 분석했다.
비단 이런 사례는 우리 역사에서도 적지 않게 존재한다. 고구려를 북방의 강자로 만든 광개토대왕이나 세종대왕, 정약용은 지독한 불면증 내지 편집증 환자였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저명한 정신의학자답게 다양한 사례를 솜씨 있게 버무린다. 지도자들이 갖고 있는 인간 경험의 아주 중요한 부분이지만, 지나쳐버린 사례들을 정성스레 찾아내 풀이했다.
광기의 리더십 |
‘정신장애’ 지도자들, 위기의 시대 더 빛을 발했다
우울증 가진 지도자가 위기에 빛났다
정신질환이 있는 지도자를 선택하라고?
위기시대, 보통의 리더보다 정신질환 있는 리더가 더 큰 리더십 발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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