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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間/새로 나온 책

2012년 12월 2주 새로 나온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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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 이상(1910-1937)은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인가. 허깨비인가. 이 물음들은 지금도 유효하다. 후대 사람들은 글보다 이미지의 기억으로 그를 호출해낸다. 그 이미지들은 대개 흐릿하고 파리하다. 조선총독부 건축기사 시절 찍은 코트 입은 그의 사진과 친구 구본웅이 그린 파이프를 문 괴팍한 기인의 풍모 등이 떠오른다. 소설 <날개>에서 미쓰코시 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본점) 옥상에서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를 되뇌는 주인공의 모습이나, 시 ‘오감도’나 ‘건축무한육면각체’ 같은 난수표 같은 시형식들을 연상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식의 심도는 대개 거기까지다. 이상 일대기의 세부는 물론이고, 난해한 작품 속에 묻힌 숱한 ‘암호’들은 논란 속에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수년 동안 시각예술의 맥락에서 이상 작품을 연구해온 김민수 서울대 디자인학부 교수는 <이상 평전>에서 세간에 주목받지 못했던 한 장의 자화상을 꺼내놓았다. 이상이 경성고등공업학교(경성고공)에 다닐 때인 1928년 그린 이 자화상은 섬뜩하다. 왼쪽면만 빛을 잔뜩 받는 비대칭적 얼굴, 정수리는 함몰됐고, 오른쪽 눈엔 눈알이 없다. 푹 파인 눈 밑에 눈물이 흐른 흔적이 있고, 목은 잘렸으며, 그 아래엔 십자가가 그려졌다. 그는 이 자화상을 이상이 품었던 독특한 내면적 세계관을 거울 이미지로 투영한 것이며, 그의 큰 예술적 실험과 계획을 위한 일종의 첫 번째 페르소나, ‘연출된 가면’일 가능성이 크다고 풀이한다. 지은이가 이상의 내면을 추적하는 시발점으로, 이 자화상을 주목한 이유는 이상이 불과 열아홉 나이에, 자기 내면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에른스트 키르히너 같은 당대 독일 다리파 작가 스타일의 표현주의 화풍을 이미 섭렵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기노우치 요시 등 당시 일본 화가들이 그린 자화상들과 기묘할 정도로 화풍이 일치한다는 점에서도 세계 예술사조와 이상이 직접 접속했음을 보여주는 단서라는 것이다.

<이상 평전>에서는 이 자화상처럼 기존 문단의 이상 연구서와는 크게 다른 독해 방식을 꾀한다. 시, 산문, 소설, 지인들의 글 같은 텍스트보다, 그가 나고 자랐던 여러 장소 공간, 그가 접한 시각 예술 사료들에 대한 탐색이 방향타로 작동한다. 책 전반부에서 이상이 유년기 자랐던 서울 서촌 일대의 역사 지리 공간들을 꼼꼼하게 뒤쫓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그 결과물 가운데 하나가 이상이 1932년 <조선과 건축>에 일어로 발표한 난해시인 ‘차8씨의 출발(且8氏의 出發)’에 대한 독특한 풀이다. 시는 “균열이들어간장가이녕의땅에한자루의곤봉을꽂는다”라는 구절로 시작된다. 김 교수는 기존 문학 연구자들이 이 구절을 빌미삼아 가학적인 성교 장면을 투사하는 등 자의적 해석으로 시를 오독했다고 말한다. 그는 유년시절 이상의 통인동 집 근처인 경복궁 앞 조선총독부 공사장의 ‘소음’에서 그 배경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을 꺼낸다. 보성고보를 나와 경성고공에 입학할 때까지 총독부 공사장을 지나다녔을 이상은 ‘식민지 근대 건축’의 상징 기반을 닦기 위해 1만개에 가까운 말뚝을 땅 속 깊숙이 박아넣는 항타 작업을 목격했을 것이며, 거기서 시각적·청각적으로 강렬한 인상을 받았을 것이라는 단언이다. “기초공사의 항타 작업처럼 … 폐허 속 진창 구덩이의 갈라진 틈바구니에 삶의 근간이 될 작은 곤봉 한 자루를 간신히 박았다는 매우 실존적인 진술”로 봐야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 제목은 ‘또팔씨’가 되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또 차(且)자는 시 후반에 나오는 “또 쏜살같이 달려 또 쏜살같이 달리는 사람”이라는 구절에 등장하는 또 ‘우’(又) 자와 같은 뜻이며, 제목도 “또-팔-사람의 출발”, 곧 ‘현실의 땅에서 분투적으로 땅을 계속 또 파려는 한 인간의 새 출발’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견해다.

연작시 <오감도>가운데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오(길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오)’라는 첫 구절로 유명한 시 제1호에 대한 시각도 파격적이다. 서촌 골목길을 누볐을 아이들이 친일파 윤덕영의 호화로운 별장과 이완용의 집이 있었던 인왕산 기슭 서촌의 막다른 골목에 맞닥뜨리며 느꼈던 공포의 기억이 시의 잠재적 동기가 됐다는 말이다. 실제로 당시를 살았던 노인들 증언과 관련 신문기사 등을 통해 설득력 있는 근거도 제시한다. 이상의 제적등본 출생지인 ‘순화방 반정동’의 실제 지명은 없다는 것을 밝혀낸 것 또한 성과다.

책에서는 뒤이어 미술·건축·디자인 등 당대 시각예술에 대한 총체적인 접근을 통해 이상의 작품 세계 배후를 파고들어간다. 특히 이상이 경성고공 재학시절부터 탐독했던 건축잡지 <조선과 건축>의 텍스트들을 처음으로 샅샅이 탐색한 것이 주목된다. 경성고공 스승 후지시마 가이지로가 잡지에 소개한 한스 펠치히, 발터 그로피우스, 르 코르뷔지에 등 당대 서구 건축가들의 모더니즘 이론들을 이상이 보았을 것이며, 특히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이 크게 영향을 끼친 흔적이 작품 곳곳에서 엿보인다는 게 김 교수의 주장이다. 예를 들어, 시 ‘또8씨의 출발’에서 “곤봉은 사람에게 땅을 떠나는 곡예를 가르치지만”이라는 구절은 지표면 위로 기둥을 세우고 1층을 비우는 르 코르뷔지에 특유의 ‘필로티’ 건축양식을 뜻하는 것으로, ‘진창 같은 현실에서 지면 위로 솟아올라 치고 올라가는 존재의 해방’을 암시한다는 풀이다. 또 ‘이상한 가역 반응’이나 ‘삼차각 설계도’ 연작시의 수열 행렬 같은 수식들은 오늘날의 디지털 신호체계와 상통할 뿐 아니라, ‘거울’ 이나 <오감도> 연작시 등은 오늘날의 가상현실 아바타에 대한 상상력까지 이미 내보였다는 점에서, 이상은 21세기 미래와 소통한 작가였다는 게 그의 평가다.

그렇다면, 책에서 밝혀낸 이상 작품 세계의 고갱이는 무엇일까. 시각 예술의 총체적 시야에서 이상이 살던 당대의 예술 지형도를 재구성해본 지은이는 일제가 이식한 ‘모조 근대’를 살해하려는 욕망을 지목한다. 폐결핵을 앓던 이상이 말년 식민 본국의 수도 도쿄로 향했던 건 조선에 ‘모조 근대’만을 이식해온 일본이 정말 제대로 된 ‘근대’를 지니고 있는지 확인하려는 고행길이었다. 하지만 덩치말고는 경성역과 외양이 비슷한 도쿄역이나, 서구 마천루의 옹색한 판박이인 마루노우치 빌딩에서 그는 짝퉁 근대의 이미지밖에 볼 수 없었다. 친구인 문인 김기림에게 “실로 동경이라는 데는 치사스런 데로구려!”라고 보낸 편지는 환멸의 절규였다. 방황하던 그는 불령선인으로 구금되고, 객사하는 운명을 맞는다. 지은이가 보기에, 이상은 “식민지 수도 경성의 ‘모조 근대’를 성찰하고 초극하여 당대 예술이 나아갈 세계사적 본류를 향해 죽음의 질주”를 감행했다. 이상의 삶과 작품은 단순한 시대적 불안이나 자의식의 산물이 아니라, “그 자체가 식민지 도시근대화의 허구와 모순을 드러낸 엄청난 사건이자 증거”였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책 도처에서 문단 중심의 이상 연구에 강한 불신을 표출한다. 텍스트에 함몰되어 그를 삶과 얽힌 작품의 필연적 맥락은 제대로 캐지도 못했다는 날선 비판에 문학 연구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진다.

이상평전
김민수 지음/그린비

암호같은 시, 이상의 그림 · 건축에서 힌트를 얻다
천재적 문예에 가려진 미적 재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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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은 예고 없이 닥친다. 보험은 어쩌면 그 공포를 밑천 삼아 벌이는 장사다. 그런데 보험 상품을 산다고 해서 삶이 안온해질까. 그렇지 않다. 사납고 모진 불행의 본질은 그대로다. 일을 당하고 나서 수습하는 방식이 조금 달라질 뿐이다.

"우울증은 존재하지 않는 허구(가짜)"라고 이 책은 역설한다. 불안하고 불편한 감정 상태를 '우울증'이라고 일컫는 건 이윤이 많이 남는 이름 짓기 게임일 뿐이라는 것이다. 도발적이면서 그럴싸하다. 낚이는 것 아닌가 의심하며 책날개의 저자 약력을 훑는다. 에릭 메이젤은 심리치료사이자 칼럼니스트로 '의미 심리학'이라는 학문의 창시자다. "정신건강 산업의 사기극에 속고 있다"는 그의 폭로를 따라가 본다.

수천년 동안 인간은 실직이나 가난에서 비롯된 슬픔과 '아무 이유 없는 슬픔(울병)'을 합리적으로 구별해왔다. 어떤 이들은 가끔 슬픔을 느꼈고 어떤 이들은 만성적으로 침울해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모든 종류의 불행이 정신건강 산업의 먹잇감이 돼버렸다. 장애로 둔갑한 것이다. '우울증'이라는 낱말은 사실상 '불행'의 동의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일하는 게 못 견디게 싫거나 배우자에게 불만이 쌓여 속이 곪아가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안다. 그런데 세상은 그 감정 상태에 '우울증'이라는 딱지를 붙이면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부추긴다. 정신과 의사로부터 알약을 처방받고 심리치료사와 상담하는 의료 모델에 우리가 길들거나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항우울제의 불편한 역사'를 쓴 에드워드 쇼퍼는 "의학은 진보해야 마땅하지만 적어도 우울증과 불안의 진단 및 치료에는 지식이 축소되거나 퇴행했다"고 썼다. 장삿속 때문이다.

이를테면 '권태'라는 감정이 어떻게 질병으로 둔갑하는지 보자. 정신건강 산업은 먼저 '관심 결핍 장애'라거나 '동기 결핍 장애'라고 이름을 붙인다. 아예 '동기'라는 뜻의 라틴어 '모베레(movere)'를 이용해 '디스모베리아(dysmoveria)'라고 이름 붙이면 더 광이 난다. 새로운 정신장애로 통하는 문을 열기만 하면 수백만명이 앞뒤 안 가리고 몰려들 것이다. 디스모베리아의 몇몇 증상을 열거하고 자문단을 구성하고 신약을 개발하는 일은 간단하고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치료해야 할 질병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항우울제 효능도 논란이 된다. 독일 연구팀은 "항우울제는 효과가 없으며 심지어 해로울 수도 있다"는 보고서를 냈다. 항우울제 복용을 중단한 뒤 재발률이 무척 높다는 사실은 약의 효과가 증상을 일시적으로 완화하거나 가리는 정도라는 것을 방증한다. 항우울제 약효는 대부분 '플라시보 효과'라는 연구도 많다.

저자는 "심리치료 또한 부풀려져 있다"고 말한다. 상담과 대화가 약간의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이상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정신과 의사들은 사실 심리치료를 거의 하지 않는데, 경제적으로 손해라서다. 약물치료에 집중하면 시간당 서너 명의 환자를 볼 수 있지만 심리치료를 하면 한 명밖에 볼 수 없다.

우리는 사실 몽롱하게 살아간다. 자기 삶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싶어하지 않으며, "그럭저럭 잘 지낸다"는 말로 자기가 처한 현실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려 한다. 몽롱한 상태로 직장 일을 해나가고 몽롱한 상태로 집안의 혼란도 견뎌낸다. 또 광고와 이미지 같은 문화적 최면도 우리를 홀리며 뭔가 사게 만든다.

이 책은 찬물을 들이부어 우리를 깨운다. 인간은 불행과 동거할 수밖에 없다는 냉정한 긍정이다. 저자는 "소망은 환상 속에서는 아름답지만 현실에서 충족될 수 없다"는 프로이트의 염세주의와 "죽음이 찾아와 궁지를 벗어나게 될 날을 기다린다"는 쇼펜하우어의 관점을 두루 살피고 나서 "불행의 실체를 인정해야 그 어둠을 조금씩 걷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우울증 때문에 자살하는 게 아니라 불행을 인정하지도 직시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라는 주장에 수긍하게 된다.

읽고 나면 차고 넘치는 '힐링'도 "엄마 손은 약손"이라며 배를 문질러주지만 약효는 없는 상술일 뿐이라는 확신이 더 단단해진다. '중요한 존재가 되기로 결심하라' '삶의 목적이 담긴 문장을 만들어라' '기분을 점검하는 습관을 버리고 의미에 집중하라' 등 이 책이 해답으로 내놓는 실천법은 원론적이거나 추상에 머무는 게 흠이다.

가짜 우울
에릭 메이젤 지음, 강순이 옮김/마음산책

우울증 치료? 사기 한번 제대로 당하셨군요
우울증은 없다, 단지 슬플 뿐…우울증이란 말이 더 불행을 초래
불행 느끼는건 자연스러운 일…우울증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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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수녀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이기적인 사람이야."

본문 속의 노인은 대개 이런 식의 질문으로 도발한다. "다른 사람을 돕고 나면 얼마나 뿌듯한지 생각해 봐. 그뿐 아냐. 그녀의 이름은 죽지 않고 영원히 기억될 거야. 우리 모두가 마음 깊은 곳에서 바라는 세속적 불멸성을 얻은 거지. 그녀는 영원불멸의 천국에 갔을 텐데, 몇십 년간의 노력은 영원한 축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니? 어떤 사람이 이보다 더 이기적일 수 있을까?"

듣고 있던 소년의 어깨가 처진다. "우울한 얘기네요." 노인은 논리의 극한까지 밀어붙인다. "인간은 이기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이상의 어떤 것도 기대해선 안 돼.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도 우리는 어느 것이 나의 자아에 도움이 되는지를 따져 보니 말이야."

깨보면 꿈이다. 호기심 절정의 나이, 열네 살의 주인공은 밤마다 이런 꿈의 여행을 떠난다. 정체불명 노인을 따라 시공을 초월해 세상 안팎을 드나들며 이런 궁극의 문답을 주고받는다. 그때마다 궁금증은 복어 모양으로 팽창과 수축을 반복한다. 꿈에서 깬 후엔 엄마·아빠와 대화를 이어간다. 밤새 이월됐던 고민이 뒤늦게 풀리기도 하고 간신히 실마리를 찾았던 문제가 다시 미궁에 빠지기도 한다. 지식의 확실성부터 신과 선악의 문제, 자유의지와 이기심, 정치와 돈, 윤리적 딜레마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난제들이다.

'정말 모든 행동이 이기적일까?' 고민에 빠진 아들에게 아빠가 다가간다. "네 생각은 우울한 생각일 뿐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부정확해. '모든 것이 이기적'인 경우란 있을 수 없어. 단어를 그렇게 포괄적으로 사용하면 그 말은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하게 돼."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아빠는 프로이트 이론을 예로 든다. "이건 어떻게 해도 틀릴 수가 없는 이론이야. 가령 아빠가 물에 빠진 것을 본 소년이 있다고 치자. 소년이 아빠를 구하지 않으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때문이라며 프로이트 이론이 맞는다고 하겠지. 하지만 소년이 아빠를 구한다 해도 이 역시 '이드'를 누르고 '초자아'가 이겼다며 프로이트 이론이 옳았다고 할 수 있어. 이 경우엔 반증할 수 있는 방법도 없고 기준도 없어.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이론은 뭔가를 예측할 수도 없겠지."

그제야 아이는 철학적 딜레마의 상당 부분이 말의 모호함에서 나온다는 깨달음에 이른다. "논리가 타당하지 않은 것은 우리의 언어 때문이라고. 모호한 것은 세계가 아니라 세계에 대해 말하는 우리의 방식이란 말이지."

정의의 문제도 이 논리와 저 논리가 부딪힌다. 정부가 세금으로 예술가를 돕는 것은 옳은가. 아들은 엄마와 논쟁한다. "예술은 인간과 사회를 풍요롭게 하고 모든 사람에게 이익을 줘요. 그러니 정부가 예술가를 후원하는 건 좋은 일이에요."

엄마가 묻는다. "하지만 이미 많은 사람(소비자)이 예술에 돈을 내고 있는데 정부가 왜 후원해야 하지? 가령 인기 있는 밴드는 정부 도움이 필요 없을 만큼 수익을 올릴 수 있어. 반대로 정부가 세금으로 사람들이 그리 좋아하지 않는 음악을 지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 아닐까?"

아들은 그래도 '가난한 예술인'을 걱정한다. "아무도 사려 하지 않는 음악이 실제로는 더 좋은 것이라면 어떡해요? 아무 지원도 받지 못하면 새로운 걸 시도해 보려는 의욕이 사라질 거예요."

엄마는 좀 더 불편한 질문으로 내몬다. "그러면 후원해야 할 예술과 예술가는 누가 어떻게 선택해야 할까? 어떤 예술이 다른 예술보다 더 좋다는 것을 너라면 어떻게 설명하겠니?"

13개 장이 다 이런 식이다. 확정적인 답은 없다.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것들을 들추고 함께 고민하게 만든다. 그러면서도 격려의 말을 잊지 않는다. "난 네 질문에 답을 줄 수는 없을 것 같아. 하지만 네가 조만간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을 거라는 건 말해 줄 수 있을 것 같아."

10대 소년의 환상적인 지적 모험이란 점에서는 '해리 포터'를, 현실과 꿈, 가상세계가 오버랩되는 구조라는 점에서는 영화 '매트릭스'를 연상시키는 철학 입문서. 주인공이 열네 살이라고 해서 청소년용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 이상 연령대도 머리를 쥐어뜯게 만드는 대목들이 적지 않다. 철학은 그 어떤 물음에 대한 답을 뜻하는 명사가 아니라 끝없이 의심하고 되묻는 진행형의 동사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철학의 13가지 질문
잭 보웬 지음, 하정임 옮김, 박이문 감수/다른

테레사 수녀가 이기적이라는 말은 참일까
꿈으로 풀어본 자아·이성·자유의지… 철학, 어렵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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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농민들은 지대와 세금, 이자를 지불하기 위해 하루 16시간씩 일해야 하는데도, 자기들이 독립적이고 주체적이며 굉장한 정치적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얘기한다. … 농민들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가정과 학교에서 그렇게 배우기도 했고, 신문과 라디오, 의회, 법정, 선거연설에서 그런 얘기를 귀가 아프도록 들었기 때문이다. … 그들은 자신들이 모든 사회적 가치와 명예를 옹호한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실제 투표장에서는 게으름, 낭비, 사치, 비굴함, 가난, 노동착취 등 이기적인 자본이 만들어낸 모든 악덕에 표를 보낸다.”

버트런드 러셀 등과 함께 온건사회주의단체 페이비언협회를 이끌었던, 촌철살인의 재치와 유머, 반전의 천재적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 그가 1944년, 88살 때 쓴 <쇼에게 세상을 묻다>에서 한 이 말에서 ‘농민’을 ‘노동자’나 99%의 일반인들로 바꿔 읽으면 20세기 중반의 영국이 아니라 지금의 영국, 그리고 21세기의 한국이 떠오를 것이다.

“부자들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결코 가난한 이들 등에서 내려오지는 않을 것이다.” 이 말을 한 사람은 톨스토이다. 쇼는 이 말을 인용하면서 묻는다. “노예가 된 대중은 그 악랄한 바보들에게 복종하는 비겁한 머저리들인가?”

쇼는 토지의 독점적 사유와 거기서 파생한 자본, 그리고 자본(금융)이 지배하는 금권정치가 판을 치는 사회에서는 모든 여가와 재화가 소수의 특권층에게 집중되는 반면, 나머지 사람들은 전보다 더 뼈빠지게 일하면서도 차지하는 몫은 점점 더 적어질 뿐이라고 얘기한다. “사람들이 금융과 지대와 보험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면, 그 세 가지를 국유화하라고 할 것이다.”

그는 주장한다. “여가가 없는 시민들에게 자유와 민주주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90%의 사람들은 항상 일만 하고 여가를 갖지 못하는 반면 10%의 사람들은 늘 여가를 즐기고 전혀 또는 거의 일을 하지 않는다면, 자유란 허깨비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런 결론을 내린다. “소득평등화야말로 문명사회의 안정을 위한 기본조건이다.”

쇼는 대중은 결코 머저리들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다만, 그런데도 대중이 노예신세를 면치 못하는 것은 세상 돌아가는 정보와 이치, 곧 정치과학을 모르기 때문이란다. ‘모두를 위한 정치사전’쯤으로 옮길 수 있을 원제 (‘Everybody’s Political What’s What?’)가 시사하듯 이 책은 바로 그 정치과학을 대중에게 설파하기 위해 쓴 것이다. 쇼는 이 책에서 원숙한 체험을 토대로 하여 정치·경제·교육·종교·민주주의·과학 등 다방면에 걸쳐 기존 악습들을 비판하며 ‘새로운 세계’를 추구한다. “선한 사람이 선한 의도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현실에 대해 바로 알고 현실을 바탕에 두고 추론해야 한다. 우리가 현실문제를 다루는 정치과학을 통해 인간에 대한 진실과 교훈을 배운다면 얼마든지 새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쇼는 자신이 이론적으론 공산주의자이고 실제 신분은 부재지주라며 “그렇다면 국가는 나와 같은 지주들을 어떻게 없앨 것인가?” 하고 묻는다. 제시하는 답은 몰수와 국유화 같은 혁명적 방법이 아니라 세금과 거래를 통한 점진적인 방식이다. 바로 페이비언적 방식이다.

쇼에게 세상을 묻다
조지 버나드 쇼 지음, 김일기 외 옮김/TENDEDERO(뗀데데로)

대중은 왜 노예신세 못면하나…아직도 유효한 반세기전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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