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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間/새로 나온 책

2013년 1월 4주 새로 나온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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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2년 8월 스페인 세비야. 콜럼버스 선단의 신대륙 항해 준비가 한창이었다. 옆 항구에선 한 무리의 사람이 배에 오르고 있었다. 유대인이었다. 이슬람 세력을 쫓아내고 스페인을 통일한 이사벨 여왕은 '가톨릭 개종'과 '국외 추방' 중 양자택일하라고 유대인을 윽박질렀다. 명분은 종교문제였지만 속셈은 유대인 재산 몰수였다. 유대인 17만명이 스페인을 떠났다. 이후 스페인은 신대륙에서 들여온 막대한 자원으로 외형을 넓혀갔지만 속으론 골병들었다. 유대인이 쥐고 있던 금융 · 유통망이 붕괴됐기 때문이다. 스페인은 결국 유대인이 떠난 지 반세기 만인 1557년 첫 파산 선언(디폴트)을 하는 등 국운이 급격히 기울었다.

'유대인 이야기'는 구약성서 시대부터 현대까지 유대인에 초점을 맞춰 세계경제사의 흐름을 분석한다. 2010년 KOTRA 밀라노 무역관장을 끝으로 정년퇴직하기까지 30여년간 세계경제 현장에서 유대인의 활약을 목격한 저자는 10년이 걸려 책을 완성하면서 "친유대적도 반유대적도 아닌 있는 그대로 그들의 장단점을 보고자 애썼다"고 밝혔다.

책의 주장은 서구 역사에서 부와 패권의 흐름은 유대인의 이동사와 일치한다는 것. 로마제국에 대항했다가 고향에서 쫓겨난 유대인은 유럽 국가에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존재였다. 13세기 영국, 14세기 프랑스, 15세기 스페인, 16세기 이탈리아에서 차례로 추방당한 유대인은 그때그때 자신을 받아주는 곳으로 이주했고, 그 지역 경제를 부흥시켰다. 반대로 그들이 떠난 곳엔 경제 침체의 그늘이 짙어졌다.

현지인과 동화되지 않고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을 내세운 유대인은 박해받았지만 문맹(文盲)이 절대다수이던 유럽에서 유일하게 대부분이 글을 읽고 셈을 할 줄 아는 민족이기도 했다. 멀쩡한 직업을 가질 수 없었기에 환전업 · 대부업 · 전당업 등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은 이를 기회로 활용했다. 추방당할 것에 대비해 늘 재산을 현찰과 보석, 부동산 등으로 분산해 놓는 포트폴리오, 세계 곳곳의 유대인 네트워크를 통한 정보 유통, '돈은 버는 것이 아니라 불리는 것'이라는 경제관념은 언제 어느 곳에서든 생존과 경제적 번영을 가능케 했다.

스페인에서 쫓겨난 유대인이 정착한 곳은 벨기에의 앤트워프. 화폐와 금은(金銀)은 소지하지 못하고 황급히 보석만 챙겨온 유대인은 이곳에서 보석유통업을 일으켰다. 이어 암스테르담으로 옮긴 유대인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세워 향료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고, 인도 · 동남아 · 중국 · 일본 · 서인도제도의 무역, 아프리카 노예무역도 주도했다. 청교도혁명을 일으킨 크롬웰은 아예 런던의 일정 면적을 유대인을 위한 자유경제지구로 지정해줬다. '더 시티'의 원조다. 유대인들에게 미국은 더할 나위 없는 기회의 땅이었다.

바빌론 유수 시절 고대 중국과 비단 교역에 나섰고 소금 정제업, 다이아몬드 가공과 유통 독점, 석유산업에 이어 현대 금융업을 장악하고, 중세시대 '궁정 유대인'처럼 미국의 재무장관과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의장을 줄줄이 배출하는 유대인 파워는 현대로 올수록 더욱 압도적이다. 꼼꼼한 자료 정리를 통해 유대인의 역사를 상세히 설명하는 것이 가장 큰 장점. 막연한 두려움이나 선망이 아닌 차가운 머리로 읽어볼 만한 책이다.

유대인 이야기
홍익희 지음/행성B잎새

유대인이 떠났다… 1557년 스페인은 파산했다
세계경제 주무르는 유대인의 비밀
세계경제 주름잡은 유대인의 힘은
부의 역사 이룬 유대인 저력
유대인의 역사가 곧 금융 자본주의의 역사다
고난의 역사, 유대인의 부를 키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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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산 수치가 조국 버마(미얀마)에 준 가장 큰 선물은 외부세계에 버마의 현실을 알렸다는 점이다. 그와 동시에 버마를 향한 세계의 창문을 열기도 했다.… 수치는 공포를 떨치고 일어나면 존엄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했고, 군대에 뿌리깊게 체화된 비도덕적인 힘을 비폭력 저항으로 물리칠 수 있다는 믿음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수천만 버마 국민이 수치의 정당에 투표하게 만들면서 나라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또한 세계를 변화시켰다.”

영국 신문 <인디펜던트>의 해외 주재기자이자 평론가인 피터 폽햄이 자신이 쓴 <아웅산 수치 평전>(The Lady and the Peacock, 2012)에서 내린 종합평가다.

이 책의 원제에도 들어간 <더 레이디>는 지난해 9월 우리나라에서도 개봉됐으나 메이저 상영관의 장삿속 때문에 냉대받은 뤼크 베송 감독의 영화 제목이기도 하다. 군부독재 아래에서 버마인은 수치의 이름조차 바로 부르지 못했다. 양자경이 ‘더 레이디’(수치) 역을 맡은 이 영화는 상영기간은 짧았으나 관객한테서 절찬을 받았다. 그런 평가는 영화 시나리오를 읽던 뤼크 베송을 계속 울린 끝에 마침내 3년 동안 제작에 몰두하게 만들었다는 수치의 삶 자체가 실로 극적이고 감동적이라는 사실 덕을 많이 보지 않았을까. 700쪽 넘는 평전은 수치와 버마의 기구한 운명에 대해 영화보다 훨씬 더 풍부한 진실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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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의 기자인 저자는 수차례 미얀마를 현지 취재하고 수치 여사를 두 차례 만난 경험을 바탕으로 평전을 썼다. 저자가 후기에서 밝혔듯이 수치 여사는 집필에 협조해 달라는 저자의 부탁을 거절했다. 월터 아이작슨의 전기 ‘스티브 잡스’와 달리 주인공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공식 인터뷰를 하지 못한 것은 이 책의 약점이다. 하지만 저자는 수치 여사의 가족과 지인을 만나 인터뷰하고 방대한 자료를 모아 그 약점을 보완했다.

이 가냘픈 여인은 애초부터 미얀마 민중을 이끌 운명을 안고 태어났다. 그는 버마의 독립 영웅인 아웅산 장군의 딸로 태어나 두 살 때 아버지를 암살로 잃었다. 영국인 학자와 결혼해 두 아들을 낳고 7년간 영국에서 평범한 주부로 살던 그는 운명처럼 인생의 대전환을 맞는다. 1988년 어머니의 병환 소식을 듣고 미얀마로 왔을 때 고국에선 오랜 군부독재에 맞서 민주화항쟁이 한창이었다. 수치 여사가 결성한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은 1990년 총선에서 압승을 거뒀지만 군부는 정권을 이양하지 않고 수치 여사를 가택연금했다. 그는 수차례에 걸쳐 총 15년간 가택연금을 당했고 2010년 가택연금이 풀린 뒤 국회의원에 당선돼 미얀마의 민주화를 이끌고 있다.

책에는 수치 여사의 인생에서 떼놓을 수 없는 배경인 미얀마 군부독재의 만행과 민주화운동 과정이 세세하게 묘사돼 있다. 이 낯선 나라의 현대사가 단숨에 읽히는 이유는 그 모습이 한국의 암울했던 독재시절, 그리고 시민의 힘으로 이뤄낸 민주화와 너무도 비슷하게 겹쳐지기 때문이다.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아내이자 어머니로서의 삶을 가슴에 묻은 사연도 절절하다. 영국에 머물던 남편과 자녀들은 미얀마 군부가 비자를 발급해주지 않아 수치 여사를 만나러 올 수 없었다. 암으로 죽은 남편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심정이 오죽했을까. 저자는 “수치 여사는 가택연금 상태에서도 얼마든지 조국을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것이 수치와 버마 국민의 깨질 수 없는 연대를 만들었다”고 썼다.

고립무원에 식료품을 살 돈마저 부족했던 이 외로운 여인은 집 안에서 어떻게 긴긴 날을 보냈을까. 책에는 그가 불교식 수행 습관에서 한발 나아가 명상을 시작한 이야기가 나와 있다.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명상을 하며 마음을 다스렸고 “명상에서 오는 기쁨을 알게 된다면 당신도 확실히 명상으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리라”라고 밝혔다. 그 밖에 더 자세한 개인사는 취재하지 못했으니, 훗날 수치 여사가 자서전을 통해 밝히길 기대할 수밖에 없다.

아웅산 수치 평전
피터 폽햄 지음, 심승우 옮김/왕의서재

버마 잠입취재 5년이 발굴한 ‘더 레이디’의 진면목
가택연금 총 15년… 미얀마 민주화 위해 헌신한 파란만장한 여정
민주투사 수치, 엄마 · 아내로서 절절한 가슴앓이
`철의 난초` 아웅산 수치
남자애들 셔츠 꿰매주다가 아들 그리워 눈물 흘린 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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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시공간을 유동하는 문화의 강물이다. 시간 따라 흘러가면서, 공간 따라 흩어지고 합쳐지기를 되풀이한다. 문헌의 역사에서 이런 속성은 더욱 극명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유클리드(에우클레이데스) 기하학 등을 다룬 그리스 고전 문헌들이 당대 이후 사라졌다가 재발견되어 아랍권에서 번역되고 유럽에서 재해석된 사실이 단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 고전 문헌은 기원전 4세기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으로 헬레니즘 시대가 열리자 중앙아시아를 넘어 중국까지 흘러갔다. 고전문헌 연구자 안재원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8세기 당나라에서 유행한 경교 일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애용한 무리였으며,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 저술 <알마게스트>(‘천문학 집대성’)도 중국 · 조선 역법에 영향을 끼친 흔적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기원 후 기독교 문명이 대두하자 그리스 문헌은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그리스를 터전 삼았으면서도 초기 비잔틴 제국은 동방기독교를 신봉한 탓에 그리스의 헬레니즘 전통을 멸시하며, 보존 · 계승을 외면했다.

중근동 등지로 흩어져 소수 지식인 · 상인 사이에서 유랑을 거듭했던 그리스 고전은 뜻밖에도 8~9세기 아랍 세계에서 번역본으로 부활한다. 그 주체는 이슬람 창시자 무함마드의 적통임을 자부하며 반정을 일으켰던 압바스(아바스) 왕조의 제왕 칼리프와 학자였다. 유목민 집단의 후예로 칼과 코란을 들고 정복전쟁을 벌였지만, 한편으로는 붓과 문헌을 들고 그리스 고전의 아라비아어 번역 운동을 지속해 나간 것이다. 덕분에 영영 묻힐 뻔했던 고대 그리스의 철학 · 의학 · 역학 · 우주론 관련 저술은 번역된 채 보존됐고, 12세기부터 유럽 지식인이 재번역해 르네상스기 고전 중흥을 이끈 디딤돌이 되었다. 그런데, 의문이 생긴다. 무슬림이 왜 숙적이던 유럽 문명의 뿌리인 그리스 인문 고전들을 집요하게 번역했을까. 적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아랍문명사 연구의 권위자인 디미트리 구타스 미국 예일대 교수가 쓴 <그리스 사상과 아랍문명>은 서구에서 홀대받아온 이슬람-그리스 번역 교류의 역사를 파헤친 노작이다. 아랍문명사 연구의 전범으로 꼽히는 이 책은 8~10세기, 압바스 왕조 통치기 새 수도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하여 펼쳐진 그리스어 고전의 아라비아어 번역 운동의 전말을 담고 있다.

책의 진가는 번역 운동이 아랍 제국을 지탱하기 위한 정치적 · 사회적 캠페인이었음을 철저한 문헌 연구로 논증했다는 데 있다. 그냥 짐작하듯 옛 지식 문화에 대한 호기심 차원이 아니라는 말이다. 왕실과 궁정학자, 지식인이 주도한 번역 운동은 8세기 중반부터 10세기 말까지 벌어진 일종의 문화 신드롬이었다. 비잔틴 제국과 근동을 통해 입수한 거의 모든 세속 그리스어 책이 아라비아어로 옮겨졌다. 칼리프와 제후, 관료, 상인과 과학자 등은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이 운동이 정치 · 사회적 관심사였음을 말해주는 근거다. 유클리드의 기하학 고전인 <원론>을 필두로 해 번역된 문헌은 온갖 분야를 망라했다. “점성학과 연금술을 비롯한 비학, 산수 · 기하 · 천문 · 음악 이론 등 4과, 형이상학 · 윤리학 · 물리학 · 동물학 · 식물학 · 논리학 등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망라했던 전 분야는 물론이고 의학 · 약리학 · 수리학 등 모든 건강과학, 또 군사과학에 대한 비잔틴 시대의 전술 안내서, 대중적 금언집, 심지어 매 훈련법”도 포함돼 있었다. 게다가 대부분 엄격한 원문 검토 아래 직역과 의역, 주해 등의 여러 번역 방식을 구사했다. 오늘날 전하는 그리스 문헌 연구가 아라비아어 사료 없이는 불가능한 것도 이런 역사를 거쳤기 때문이다.

왜 압바스 왕조의 통치 세력은 번역 운동을 체제 차원에서 중시했을까. 구타스는 만민평등의 세계제국을 지향했던 압바스 왕조의 지극히 유연한 정체성에서 이유를 찾는다. 7세기 초 무함마드가 이슬람을 창시한 뒤 성립한 우마이야 왕조는 정복전쟁으로 아프리카 · 유럽 · 페르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만들었다. 그러나 소수 아랍인의 세속적 지배체제인 탓에 비무슬림 세력의 반발과 내분이 끊이지 않았다. 페르시아(이란)의 동쪽 변경인 호라산에서 봉기해 750년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린 호족세력 압바스 가문의 역성 혁명도 조로아스터교를 신봉한 페르시아인의 도움 덕분에 성공한 것이었다. 게다가 이미 페르시아 · 이집트 · 근동 등이 한 제국의 경제 · 문화권에 들어온 상황이라 압바스 왕조는 페르시아 · 유럽 · 아랍인 모두가 알라 아래 평등하다는 또다른 범세계주의를 표방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왕조 입장에서는 이교도 이민족의 환심을 사는 게 중요했다. 그래서 페르시아인의 옛 제국이던 사산 왕조의 통치술이나 그들이 신봉하던 조로아스터교의 경전 <아베스타>의 가르침을 국가 이념에 대폭 수용했다. 그리스 고전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지식은 아베스타에서 나온 것이니 온전히 거두어 보존해야 한다는 지침과, 헬레니즘의 후예로서 점성술 · 천문학을 중시했던 사산 왕조의 유산 등을 적극 받아들였다. 바로 이런 체제적 특징이 그리스 고전 번역 운동의 교류사를 가능하게 했다는 해석이다. 실제로 새로 건설된 왕도 바그다드는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교류하는 ‘문명의 도가니’로 구상된 모자이크 도시였으며, 각 분야에서 다양한 언어로 연구하는 국제적인 학자들이 모여들어 번역 운동의 태반이 되었다. 심지어 3대 칼리프 알 마흐디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변증법적 논증술을 담은 저작 <토피카>에 심취해 직접 번역을 감독하기도 했다. 사실 여기에도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제국 안에서 무슬림은 모두 평등하다는 명분 아래 개종 정책을 강제해 반대 세력과 논쟁이 일었고, 칼리프가 이단에 대한 논증과 반박의 기술을 가르치는 교과서를 찾은 끝에 <토피카>를 주목했다는 것이다.

에필로그에서 지적하듯 압바스 왕조의 번역 운동은 체제 수호라는 절박한 배경이 있었지만, 또다른 창작인 번역의 문명사적 가치를 인류에게 각인시킨 사건이었다. “이슬람 학문의 지적 성취와 오늘날 아랍 세계의 공동 유산을 전달하는 데 적당한 높은 수준의 표준어를 만들어냈”고, 사상 최초로 과학적 · 철학적 사고가 만국 공통이라는 것을 보여준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안재원 박사가 동서문헌 교류사의 흥미진진한 비경에 대해 쓴 부록 해설과, 압바스 왕조의 왕립도서관 ‘지혜의 집’을 다룬 역사다큐 <지혜의 집, 이슬람은 어떻게 유럽문명을 바꾸었는가>(책과함께)를 함께 비교하며 읽기를 권한다.

그리스 사상과 아랍 문명
디미트리 구타스 지음, 정영목 옮김/글항아리

이슬람은 왜 그리스 고전 번역 매달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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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나 사상가들의 사진론이나 에세이에서는 이런 이야기들이 가득하지만, 그런 책들은 대개 탐독가를 위한 것들이다. 실제로 과제의 형식으로 삶을 담아내도록 훈련시키는 책, 롤랑 바르트나 수잔 손탁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사진과 인생 사이의 비밀스런 연결을 학습시킬 수 있는 책이 필요했다. 어지간한 예술 책들을 아우르는 직종 종사자로서, 내가 알기로 그런 책은 없었다.

<내 사진을 찍고 싶어요>(웬디 이월드·알렉산드라 라이트풋 지음, 정경열 옮김, 포토넷 펴냄)가 나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표현을 달리해 보겠다. 두어 달 전에 출간된 <내 사진을 찍고 싶어요>는 사진을 찍을 때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를 쉽고 정확하게 지시하는, 우리가 구해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한 권이다.

인터넷 서점 등에서 <내 사진을 찍고 싶어요>의 소개 글을 보면 고개를 갸웃할 수도 있다. "사진과 사진을 통한 글쓰기를 통해 (…)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된 아이들의 놀라운 경험 (…)새로운 교육법…." 게다가 실제로 책의 도입부 역시 미국 초등학교에서 실시된 자기표현 프로그램에 대해 소개한다. 그렇다. <내 사진을 찍고 싶어요>는 사진을 통해 아이들에게 보다 폭넓은 표현력과 관찰력을 길러주는 교육 프로그램 안내서다.

이 프로그램의 이름은 LTP(Literacy through Photography)다. 사진을 통한 글쓰기다. 초등학생 정도의 아이들은 문자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능력이 아직 부족하기 때문에 시각 매체인 사진을 함께 이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심하시라. 이 프로그램은 어른들에게도 비슷한 메커니즘으로 작동할 수 있다. 사진은 타성에 젖어 점점 좁아지는 언어 표현의 세계 바깥에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대안이기 때문이다. LTP는 유소년 교육 프로그램 이름이기 이전에 사진이 언어와 상호작용하면서 선사하는 가능성을 축약한 말인 셈이다.

그 가능성은 크게 두 가지로 축약할 수 있다. 하나는 말하고 싶었던 것을 말 이외의 방법을 통해 더 잘 표현하는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더욱 중요하다. 사진을 찍고 그 결과물을 관찰하고 표현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를 발견함으로써 말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결코 사진을 마음대로 찍을 수 없다. 그리고 당연히 그 점을 속상해 한다. 물론 카메라 다루는 기술의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실망의 대부분은 기대와 결과물의 양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기대를 의심하지 않기 때문에 그와 다른 양상의 결과물을 실패로 간주한다. 앞서 소개한 위협적인 아름다움을 뽐내는 숲 사진은 촬영자의 입장에서는 실패작이었다. 그러나 기대가 틀렸을 가능성은 없을까? 기대의 방향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내 사진을 찍고 싶어요>는 '말하기' 위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를 발견'하기를 우선한다. 아래는 이 책이 그 발견을 위해 제안하는 여러 과제 중의 하나다.

-실제로 사진을 찍기 전에 무엇을 사진에 담을지 써본다. 찍을 대상에 대해 미리 글을 써보는 것은 찍게 될 사진에 대해 집중하게끔 도와준다.
-(디카 시대에는 참기 어려운 일이지만)일단 찍은 사진은 나중에 보고, 사진을 보기 전에 그 피사체의 실체를 보았을 때 어떤 느낌인지를 써본다.
-위 두 과정을 연결한다. 쓰기, 찍기, 쓰기의 순서로 이뤄지지만 순서는 바뀌어도 좋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지금 당장 해볼 수도 있다. 컴퓨터 메모장을 열고 자신에 대해 다섯줄만 써 보기 바란다. 외모 묘사건 인생 이력이건 상관없다. 그러고 나서 곁에 있는 핸드폰을 꺼내 셀카를 찍는다. 딱 한 장만이다. 그 사진을 다시 보기 전에 "나는 사진에서 무엇을 보고 싶었는가?"를 한 줄 쓴다. 그 내용을 자신에 대해 쓴 다섯 줄 뒤에 붙인다. 그런 다음에 사진을 재생해 본다.

메모장 위의 나와 사진 속의 나는 같은 사람으로 느껴지는가? 나는 보고 싶은 것을 보았는가? 만약 사진이 불만스럽다면 내가 무엇을 기대했기 때문인가? 만약 글이 허전하다고 느껴진다면 무엇을 놓쳤기 때문인가? 사진과 글이 모두 흡족하다면(이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떻게, 무엇 때문에 가능했는가? 여러분이 쓰고 찍을 다음 대상은 바로 그 '무엇'이다. 그간 미처 표현하지 못했거나 떠올리지조차 못했던 그 '무엇'은 채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내면을 향한 첫 발걸음이 된다.

이제 <내 사진을 찍고 싶어요>의 가장 큰 난점을 고백할 때가 왔다. 눈치 채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LTP는 혼자서 해낼 수 있는 과제가 아니다. 위에 제시한 과제만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글과 사진 사이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을 확률이 훨씬 높다. 특히 무의식적인 패턴은 본인이 발견하기가 무척 어렵다.

굳이 사회적 연대 같은 개념까지 끌어오고 싶지는 않다. LTP가 집단 작업인 이유는 효과적인 학습을 위해서다. 이게 최선이다. 그렇지만 커뮤니티를 만들거나 참여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이 작업을 홀로 수행할 수 있도록 기획된 버전은 없을까? 현재까지는 찾아볼 수 없다. 있다고 해도 난이도가 훨씬 높을 것이다. 한 명의 인간이 세계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주위에 쌓아올린 벽은 대개 생각보다 두꺼우니까 말이다.

따라서 LTP에서 '조직하기'는 사진 자체만큼이나 중요한 작업이다. 만나고 이야기하고 때로 고백하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이게 말처럼 쉬운 얘기가 아님을 나도 잘 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발견하기 위해서는 그에 앞서 말하고 보여주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내 사진을 찍고 싶어요>는 다른 어떤 사진 실습서도 말하지 못했던, 혹은 알아채지도 못했던 '보여준다는 용기'에 대해 말한다. 다른 모든 스킬에 선행하는 하나의 태도. 바로 이 점이 내가 이 책을 최고의 실습서라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다.

내 사진을 찍고 싶어요
웬디 이월드.알렉산드라 라이트풋 지음, 정경열 옮김/포토넷

얼짱 셀카' 말고, 이런 셀카 시작해 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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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전성시대다.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태블릿PC 아이패드를 선보이는 자리에서 애플이 인문학과 기술의 교차로에 있다고 공언했다. “제가 인문학은 좀 아는데 정치는 모릅니다”고 말한 안철수 전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에게 보낸 시민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인문학’이란 이름을 붙인 책들도 봇물을 이루고 있다. 책 제목대로라면 20~30대에는 인문학으로 스펙을 다져야 하고 마흔 살에도 인문학을 만나야 한다. 광고도 인문학으로 해야 하고 주식 투자에도 인문학이 필요한 지경이다.

《싸우는 인문학》은 이 같은 인문학 전성시대에 대한 비판을 도발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인문학은 이윤 창출을 위한 방법론도, 자기가 원하는 사회적 위치를 점유하는 데 써먹을 수 있는 개인기나 스펙도 아니라는 것이 문제의식의 출발이다.

‘한국 인문학의 최전선’이라는 책의 부제처럼 인문학자 22명이 스티브 잡스, 안철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 인문학과는 쉽사리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회현상과 인물부터 동양 고전, 대하소설, 역사학, 심리학 등 다양한 주제들에 질문을 던진다. 책은 ‘팔리는 인문학’ ‘잊혀진 인문학’ ‘싸우는 인문학’ ‘가능성의 인문학’ 등 4개의 장으로 이뤄졌다.

‘팔리는 인문학’에서는 어떻게 인문학이 우리 시대의 ‘만능열쇠’가 됐는지 추적한다. ‘스티브 잡스는 인문학적 최고경영자(CEO)인가’란 글에서는 “자본가는 이제 창의적인 예술가란 가면을 쓴 모험적인 사업가로 변신했다”며 “아이패드라는 혁신적인 제품에 투입된 노동을 은폐하는 ‘우아한 가림막’이 바로 인문학”이라고 직격탄을 날린다.

책은 또 “인문학에 관한 책에서 인문 텍스트들은 자기계발 주제의 상품 가치를 높이기 위한 전략·전술의 수단이며 인문이라는 말도 상표로 나부낄 뿐”이라고 꼬집는다. 그런 책과 저자들이 각광받는 현실에 대한 성찰이 시의적절한 인문학적 성찰의 주제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비꼬기도 한다.

‘잊혀진 인문학’에선 사회과학, 독문학, 대하 역사소설 담론, 비평 등 인문학 열풍 속에서도 다뤄지지 않는 주제들에 주목했다. ‘대하 역사소설은 여전히 가능한가’란 글에서는 “‘역사를 소재로 하는 거대한 규모의 서사’라는 이기적 유전자는 자신을 복제하고 재생산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기계로 대하소설이 아닌 다른 무엇을 선택했다”고 분석한다. 대하 드라마 ‘본방’을 사수하기도 바쁜 시대에 대하소설이 설 자리가 있냐는 것이다.

‘싸우는 인문학’은 현재의 질서와 가치의 허약한 모습을 드러내고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싸우는 인문학에 대한 이야기다. ‘인문학이 노동자가 될 수 있는가’란 문제 제기가 뜨끔하다. 책은 “인문 교양의 많고 적음이 사람을 바꿀 수 없다는 불편한 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인문학이 사람을 바꾸는 데 무력하다면 과연 노동자에게 인문학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라며 “대안 인문학, 새로운 인문학을 고민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마지막으로 ‘가능성의 인문학’에서는 민중사학, 동양 현대철학, 정신분석 등 지금까지 인문학과 연결짓기 어려웠던 분야로 시야를 넓힌다. 인문학 붐 속에서 인문학과는 거리가 먼 처세나 실용 또는 사교 모임의 동지가 된 것 같은 인문학이 기업가에게 유혹받고 잡스처럼 아예 엉뚱한 탈을 쓰고 나타나기도 하므로 비판정신이 필요하다는 것. 세상과 자신을 동시에 비판하고 보정하는 ‘싸우는 인문학’의 정신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싸우는 인문학
서동욱 기획/반비

인문학, 삶의 문제 해결해 줄 `만능열쇠`일까?
상품화되고 비판 무디어져도, 시대와 싸우며 새 가능성 찾는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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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탁 커넥터를 다룰 줄 아는 전기기술자 구함'.

미국 일간지에 구인 광고가 실렸다. 뉴욕주와 뉴저지주 항만 당국 인사과에서 낸 광고로 급료도 괜찮고 성과급도 준다고 했다. 지원서는 170건이나 접수됐고, 지원자들은 한결같이 그 기기를 잘 다룬다고 주장했다. 손탁 커넥터 전문 기술자로 인증받은 지원자가 55명이었다.

하지만 이 광고는 '가짜'. 손탁 커넥터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기기였다. 당국 인사과에서 이력 위조 실태를 조사한 실험이었던 것. 경제사학자 마르크 벡슬러의 연구에 따르면, 이력서 위조 사실이 들통 나 해고된 이들 대부분은 "이건 사기도 불법도 아니다" "안 하면 손해"라고 생각했다. 평범한 개인도 얼마든지 '이력 사기꾼'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식의 사기를 '과장'이라고 축소하며 '가짜로 연출된' 인생을 살아간다.

"사기꾼과 전문가는 한 끗 차이"라고 말하는 책. 사기꾼이 한순간에 전문가로 돌변하는 모순을 현대 사회 곳곳에서 찾아내고 "사기꾼은 타고난 게 아니라 사회 구조상 어쩔 수 없이 탄생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적 뻥이 우리 시대의 당연한 스킬처럼 번지는 건 현대사회가 지나치게 사교력, 커뮤니케이션 능력, 유연성, 학습능력 등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직 인터뷰나 직장 내에서 부서를 배치받을 때에도 자신의 능력을 홍보하는 '능력 표출 능력'이 필요하다. 연인 사이에서도 매력을 포장하기 위해 경력을 부풀리거나 거짓말을 보탠다. "자아 간의 경쟁 관계가 갈수록 심화되는 일상의 삶에서 날마다 애를 써서 자신을 만들어내고 자기 주장을 하는" 일이 중요해졌다는 것.

저자는 최고경영자(CEO)도 사기꾼 용의자로 지목한다. 특정 직원을 은근히 깎아내리는 수법으로 직원끼리 투쟁하도록 부추겨 자신의 우두머리 지위를 보전한다는 것. 아돌프 히틀러,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 등 정치인의 '의도된 카리스마'도 사기, 매력 만점 '가짜 제임스 본드'의 연애 비결 역시 사기라고 봤다.

독일의 금융투자 사기꾼 위르겐 하르크센은 사교력과 신분 상승을 이용해 사기 행각을 벌였다. 투자자와의 대화 도중 무심하게 세금 고지서를 보여줌으로써 의심을 피해가는 방법. '연간 소득세 4억5000만유로, 내야 할 세액 2만유로'라 적힌 세금 고지서를 보고, 투자자들은 속으로 '이 친구, 지난해 엄청나게 벌었군! 믿어도 되겠어' 하며 걸려들었다.

사기꾼과 예술가는 '환영(幻影)의 극장' 안에서 연기한다는 점에서 서로 닮았다. "먼저 전체적인 틀, 즉 이야기를 하나 고안해낸 다음 한 단계씩 세부적인 것을 그려나간다. 그리고 자신이 꾸며낸 이야기의 기본 정보를 스스로 확고하게 믿을 때까지 되풀이하여 읊어댄다."

저자의 결론은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사회적 '뻥'도 진화한다." 진단은 좋으나 맺음말이 힘 빠진다. "뻥에 예리해진 눈길로 거울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누구를 보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과연 진실하며 진짜일까?"(289쪽)

이웃집 사기꾼
스텐 티 키틀 & 크리스티안 제렌트 지음, 류동수 옮김/애플북스

스펙에 목매는 당신… 그러다 사기꾼 된다
사기꾼들이 어떻게 정체를 숨기고 ‘성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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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머리(두뇌)로 음식을 먹는다"는 게 이 책의 요지다. 씹고, 소화시키는 과정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복잡하게 '의사결정' '선택'의 과정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혀 표면에는 1만 개의 미뢰가 있다. 미뢰 하나는 50~150개의 미각 세포가 모인 조직이다. 인간의 혀는 단맛·신맛·짠맛·쓴맛·감칠맛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이 맛을 인식하는 기관은 혀가 아니라 두뇌다. 뇌는 전달된 미각 정보를 종합해 어떤 맛이 상대적으로 더 강한지 저울질해 통합된 맛을 판단한다.

맛에 순응하거나 둔감해지는 것은 복잡한 현상이다. 사람들은 커피를 처음 마실 때 쓴맛에 움찔한다. 쓴맛은 음식이 해롭다는 신호를 뇌에 보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미각 신호에 익숙해지면 아침마다 으레 커피를 마신다. 쓴맛 아래 숨겨진 커피의 다른 맛을 알게 되고, 커피를 마실 때 우리 몸이 느끼는 효과를 즐기게 되는 것이다.

신경문화인류학자인 저자는 "두뇌는 문화를 진화시킨 원천이지만 문화도 두뇌의 기능과 구조에 영향을 미쳤다"면서 "인간의 식단은 생물 현상이자 문화 현상"이라고 썼다. 인간이라는 종(種)이 어떻게 뇌를 사용해 음식을 '생각'하는지 이해하는 게 이 책의 목적이다.

바삭한 음식에 대한 선호 현상은 여러 문화권에 나타난다. 일본의 튀김 요리 덴푸라는 15~16세기 일본에 출입한 스페인과 포르투갈 선교사들 때문에 탄생했다. 돈가스도 유럽의 전통 요리 슈니츨을 일본식으로 변형한 것이다.

가장 바삭한 '자연식품'은 곤충이다. 메뚜기를 구워먹던 시절을 떠올려 보라. 5000만 년 전에 출현한 최초의 영장류는 곤충을 즐겨 먹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아삭아삭한 채소에 이르기까지 바삭한 음식에 대한 열광이 진화의 유산이라는 것이다.

불을 이용하면서 훨씬 다양한 종류의 바삭한 음식이 등장했다. 불로 익히면 부드러워질 뿐 아니라 향기와 맛이 깊고 풍성해진다. 또 겉이 갈색으로 변하면서 바삭해지는 '캐러멜화(caramelization)' 반응이 일어난다. 바삭한 음식은 특히 청각과 얽혀 있는데 영어권 사람들은 '크리스피(crispy)' '크런치(crunchy)' 같은 의성어만으로도 대뇌의 특정 부위가 활성화돼 식욕을 느낀다. "인류가 고기를 불로 익혀 먹기 시작하면서 뇌가 2배 이상 커지고 진정한 잡식동물로 바뀌었다."

최초의 영장류는 오늘날 우리가 각종 튀김에 끌리는 것처럼 메뚜기 같은 곤충의 바삭한 맛을 즐겼을 수 있다.

'잡식동물의 딜레마'에서 요리 저널리스트 마이클 폴란은 "인간을 포함한 잡식동물은 무엇이든 먹을 수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위험에 노출돼 있으며, '저것을 먹어도 될 것인가 아닌가' 하는 딜레마에 빠진다"고 말했다.

미국의 음식 문화는 사실 '음식이란 영양소 분석을 통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로 요약된다. 이런 영양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전통 방식으로 만든 요리와 가공식품 사이에 아무 차이가 없다. 미국인에게 '캔 식품'이 익숙하고 친근한 이유다.

그런데 프랑스인은 왜 음식을 탐미할까. 그것은 프랑스 혁명기 전후 발달한 레스토랑에서 개인 취향에 맞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식사 경험을 제공하면서부터다. 저자는 "미국과 프랑스는 현대적 국가로 탄생할 때 평등을 주요 건국이념으로 삼았지만 음식 문화에서는 초점이 달랐다"고 지적한다. 미국에서 음식 문화의 평등이 다 배불리 먹고 사회적 격차를 줄이는 것이었다면, 프랑스에서는 맛을 평가하고 남과 소통하는 능력이 사회계층 이동의 수단이었다. 프랑스에서 음식의 지위가 격상되면서 음식 문화는 복잡해지고 규범화될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허기를 채우는 게 아니라 시각적 즐거움과 맛을 평가하는 미식주의의 발달이다.

두뇌에서 맛을 인지하는 부분과 쾌락을 느끼는 부분은 다르다. 배고프지 않아도 음식을 평가할 수 있지만 배고플 때 먹는 음식이 더 맛있다.

사람의 뇌를 MRI로 촬영한 결과 MSG와 이노신산(감칠맛을 내는 조미료)을 함께 섭취한 사람은 각각의 조미료를 따로 먹은 사람보다 큰 쾌락을 느낀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구운 고기엔 레드 와인'처럼 두 맛이 섞일 때 쾌락을 평가하는 두뇌 부위가 훨씬 더 활성화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시판조미료에는 MSG와 이노신산을 함께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맛의 시너지는 인간이 초잡식동물이 된 원인을 설명해준다"고 저자는 썼다.

사람은 여행에 대한 욕망처럼 음식에서도 변화와 다양성을 추구한다. 16세기에 유럽에 소개된 고추(매운맛)도 이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다. 어떤 맛이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 부정이 긍정으로 바뀔 수 있다. 매운 음식을 먹으면 '내인성 아편'이 분비돼 신체가 가벼운 '러너스 하이(달릴 때 느끼는 쾌감)'를 경험한다는 가설도 나온다.

우리가 음식을 먹는 방식과 음식을 생각하는 방식은 인류의 독특한 진화사를 반영한다. 인간 식단의 변천사, 음식과 성(性), 체중·음식·행복의 관계, 음식과 기억 등을 흥미롭게 풀어낸 책이다. 미각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내 머릿속을 탐사하는 기분이랄까. 읽을수록 바삭바삭 입맛이 당긴다. 전문 용어를 참아낼 한 줌의 인내심은 필요하다. 원제는 'The Omnivorous Mind'.

미각의 지배
존 앨런 지음, 윤태경 옮김/미디어윌

우리가 튀김에 끌리는 건 '곤충 시식'의 추억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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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뒤, 우리는 어떤 미래와 직면하게 될까? 과학자·경제인 등 서구의 각 분야 전문가·저명인사 100명으로 구성된 비영리 연구기관 ‘로마클럽’이 1972년에 낸 첫 보고서 <성장의 한계>는 인류 생존 방식에 대한 기존 관념들을 뒤흔들어 놓았다. 컴퓨터 모델링 기법을 활용한 그 보고서는 인구 증가와 자원 소모, 환경 파괴가 이대로 계속되면 인류는 21세기에 파국을 맞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성장의 한계>가 발간된 지 40년 만인 2012년, 그 첫 보고서를 작성한 주역 중 한 사람인 요르겐 랜더스가 앞으로 40년의 세계를 전망하는 <더 나은 미래는 쉽게 오지 않는다>를 출간했다. 첫 보고서 발간 40돌을 기념하는 공식보고인 이 책의 원제는 <2052>, 바로 40년 뒤를 가리킨다. 지난 40년간의 관찰과 연구를 더 축적한 이 책에서, 앞으로 40년 뒤의 전망은 더 구체적이고 정교해졌다. 결론은, 여전히 비관적이지만 파국을 선언할 단계는 아니다, 아직 희망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세계인구는 81억명을 정점으로 감소할 것이다. 40년 뒤 세계경제 규모는 지금의 2.2배 정도가 될 것이며, 그만큼 자원 소모와 이산화탄소 배출은 더 늘고, 섭씨 2도 이하의 평균기온 상승 억제 목표 달성은 실패한다. 자본주의는 수익만 쫓는 기존 방식을 상당부분 버리고 정부의 강력한 개입 아래 비수익·공공 부문을 중시하는 수정자본주의로 나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우울한 미래를 대비하는 방법을 조언하는 랜더스의 어투는 냉소적이다. 소득보다 만족도에 초점을 맞춰라. 넓은 들판 등 사라질 것들에 대한 관심을 접는 게 마음 편할 것이다. 전자 엔터테인먼트를 즐기고 거기에 투자하라. 풍부한 생물다양성, 멋진 세계 관광지를 즐기려면 다 사라지기 전인 지금 서두르는 게 좋다. 기후 변화가 심하지 않을 곳을 찾아가 살아라. 재생에너지 분야에서 일거리를 찾아라. 자녀들에겐 중국어를 배우도록 권장해라. 선거에서 이기려면 장기보다는 단기혜택 공약에 집중해라….

요약하면, 그래도 희망을 갖되 임박한 재난과 함께 살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재난을 줄이고 희망을 키우려면 지금 당장 필요한 행동을 취하라는 이야기다. ‘더 나은 미래는 쉽게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국어를 배우라는 건, 중국의 세계 지배를 염두에 둔 실리적 사고 쪽보다는 무능하고 이기적인 서방의 리더십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냉소 쪽에 더 무게가 실려 있다. 랜더스는 필요할 경우 공공의 이익을 위해 정부가 과감하게 개입하는 중국 리더십 체제가, 지구가 ‘초과 상태’의 위기에 직면한 지금 상황에서는 차라리 더 나은 해법이 될 수 있다고 보는 듯하다.

더 나은 미래는 쉽게 오지 않는다
요르겐 랜더스 지음, 김태훈 옮김/생각연구소

40년 후 마주할 미래 제발 이 책이 틀리길
40년 뒤 우울한 미래사회 ‘20가지 대처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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