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화폐 전쟁에서는 금(金)이 은(銀)을 눌렀다. 은은 금보다 매장량이 적어 희소성이 높지만 수요량은 금이 많다. 금값이 더 나간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 은값 상승률은 600%를 넘었고 조짐이 수상하다. 은은 금에 비해 산업 분야에서도 활용도가 높다. '뛰는 금 위에 나는 은' '금도끼 팔고 은도끼 사라'는 말까지 나온다. 은에 대한 재평가다.
이 책(원제 'Secret of Silver')은 그 은을 렌즈 삼아 역사를 들여다본다. 제목 그대로 비사(秘史)에 가깝다. 중국 경제경영 전문가인 저자는 흥미로운 질문으로 이야기 궤짝을 연다. 은의 제국이었던 중국은 왜 산업혁명의 특급열차에 올라타지 못했을까? 세계 최초로 지폐를 사용할 만큼 선진적이었던 중국 금융제도는 왜 쇠퇴했을까? 이른바 '은의 저주'는 실제 존재했을까?
명나라는 1375년 대명통행보초(大明通行寶鈔)라는 지폐를 발행하고 금과 은을 화폐로 쓰지 말도록 하는 금은령(禁銀令)을 내렸다. 지폐 발행은 고도로 발달한 상품 경제와 부족한 귀금속 자원, 두 뿌리에서 나왔다. 화폐 공급량이 왕성한 경제를 따라잡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백성은 상태에 따라 가치가 출렁거리는 지폐를 인정하지 않았고 은을 계속 거래했다.
지구 반대편에서는 이탈리아 반도에 모인 금과 은이 배를 타고 동양으로 가 향료, 비단과 교환됐다. "금과 은에 대한 유럽의 갈망이 대항해 시대와 신대륙 발견을 낳았다"고 저자는 말한다. 하지만 명나라는 은 기근을 해소하려는 국제무역이 잇달아 실패하고 자금성이 불타자 서양 원정을 중단하고 문을 걸어 잠그는 쇄국을 선택했다.
유럽은 신대륙을 정복하면서 금과 은을 약탈했다. 특히 스페인은 라틴아메리카에서 '달의 눈물'이라 불렀던 은을 300년간 1억㎏이나 캐 실어날랐다. 이로써 유럽의 은 기근은 사라지고 글로벌 무역 시대가 열렸다. 중국은 찻잎, 비단, 도자기를 수출하며 은만 요구했기 때문에 라틴아메리카 은의 종착지는 사실상 중국이었다.
그런데 중국에 들어온 은은 나갈 줄을 몰랐다. 비상시를 대비해 은을 땅속에 묻어두는 풍속 때문이었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한다'는 그레셤의 법칙대로 순도가 떨어지는 은화나 동전만 유통됐다. 한편 스페인 경제는 식민지에서 약탈한 은 때문에 물가가 폭등하며 벼랑 끝으로 몰렸다. 스페인과 중국은 막대한 은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고 산업혁명이라는 절호의 기회를 날려버린 것이다. '은의 저주'다.
은을 쌓아놓기만 한 청나라의 행동은 아편전쟁의 빌미가 됐다. 식민 패권주의를 지키려 했던 영국을 필두로 서방에는 금본위제가 시행된다. 19세기 들어 골드러시가 일어나고 낮은 등급의 금광석에서 금을 추출하는 방법이 발명되자 은은 화폐 역사에서 퇴장할 운명을 맞는다.
이 책에는 명나라부터 2차 세계대전까지 은의 역사가 정리되어 있다. 1900년 프랭크 바움이 발표한 동화 '오즈의 마법사'를 두고 "은의 화폐 기능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당시 미국 서민들의 소망을 담았다"고 해석한 대목이 흥미롭다. 도로시는 은 구두를 선물로 받았고 노란 벽돌 길은 금본위제를 암시하며 오즈(Oz)는 금은의 중량 단위인 온스의 약칭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양적 완화로 달러 가치가 떨어지면서 은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수요가 늘면 값이 오르고 값이 오르면 싸우게 된다'는 게 동서고금의 진리. 세계를 한 핏줄로 이어줬던 은은 다시 화폐의 역할을 맡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 흐름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편집이 아쉽지만 쉽고 명쾌한 책이다. 역사라는 무대에서 이야기의 방향을 결정했던 은의 드라마틱한 고백으로도 읽힌다.
백은비사 |
순백한 銀? 세계사의 흥망성쇠를 좌우한 백색재앙
銀 전쟁의 씨앗
명·청시대부터 2차 세계대전까지… 은이 지배한 화폐전쟁의 역사
금보다 값진 은? 역사 속에선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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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수영(1921~1968)에 대한 값진 각주를 얻었다. <김수영의 연인>은 시인과 양계장을 하고, 두 아이를 낳고, 20년 동안 ‘방안에서 익어가는 설움’을 함께 키우던 김수영의 부인 김현경(86)씨가 낸 에세이집이다.
김수영은 시를 쓸 때 빈봉투 뒷면에 깨알처럼 적어내려가곤 했단다. 부인 김현경씨는 그의 초고를 원고지에 정서하며, 때론 “무엇이죠? 왜요?”라고 따져 묻던 편집자이면서 독자이면서 비평가였다. 그렇다고 그가 첫 독자의 말을 순하게 들었을 리 만무하다.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시 <김일성 만세>는 부인 걱정에도 아랑곳없이 여러 곳에 기고했지만 결국 40년이 지나서야 세상에 나왔다.
이런 시는 어떤가. 김수영은 시 <죄와 벌>에서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라고 고백했다. 철학자 강신주가 <김수영을 위하여>에서 들추기도 했던 그들 부부의 사정이 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돌아온 김수영이 일자리를 찾아 다시 대구로 떠난 뒤, 김현경은 김수영의 선린상고 2년 선배인 이종구와 잠시 살았던 일이 있다. 강신주는 김현경이 남편이 우산대로 때리는 것까지 감당했던 이유는 남편을 배신했다는 죄책감 때문이라고 짐작했지만 김현경 자신은 담담할 뿐이다. “그 일이 있고 한참 후에야 그날 수영의 심리를 조금이나마 헤아려볼 수 있었다. 일단 장남의 과외 교사가 신통치 않아 수영의 마음이 불편했던 것. 아니 그보다는 영화 속 주인공들의 기형적인 사랑과 욕망. 그리고 수영과 나.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수영은 나를 때리고 <죄와 벌>을 썼는지 모른다.”
자신의 폭력과 외도를 고백하고 심지어 뒤치다꺼리도 부탁하는 남편을 둔 아내의 시선은 속죄자보다는 어머니에, 아니 그의 시에 접붙어 다른 시를 꽃피우길 원했던 시인에 가깝다. “술에 취하면 애교가 대단해질 때도 있지만 울분과 불만의 분화구로 변할 때도 있다. … 그것이 산고였을까. 그 뒤에는 어김없이 새로운 시들이 태어났다.”
책은 김수영이 죽기 전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짤막하게 적은 1부와 김수영의 시와 그들의 이야기를 엮은 2부, 그리고 산문, 기고글로 되어 있다.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가족의 회한 대신 “진짜 속물이 되는 일은 속물이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일만큼 어렵다고 했다. 그만큼 고독하다고도 했다”며 생활인 김수영의 몸부림이나 “내가 나쁘냐? 우리나라가 나쁘냐?”는 집요한 질문의 세월을 전한다. 시인 김수영이 죽은 다음 부인은 그가 쓰던 거울을 닦으며 영원히 48살로 붙박인 남편의 얼굴을 들여다보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가 말하지 못한 비밀을 탐색한 세월이 45년이다.
김수영의 연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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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관문인 파리의 공항에서부터 누구나 이 이름을 마주한다. 의심할 여지없이 프랑스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ㆍ1890∼1970). 그는 `프랑스를 두 번 구한 사람`으로 불린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자유 프랑스`라는 기치 아래 레지스탕스를 이끌었고, 1944년 파리가 해방되자마자 입성해 프랑스 임시 정부의 수반이 됐다.
하지만 홀연히 은퇴한다. 알제리 독립 문제로 나라가 붕괴 위기에 처하자 제5공화국 초대 대통령으로 다시 1959년부터 1969년까지 프랑스를 통치한다. 이 시기는 프랑스가 가장 심각한 위기 상황에서 서유럽 강대국으로 일어서는 시기와 일치한다.
이 책은 드골이 1969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콜롱베 사택에 은거하며 쓴 대통령 시절에 관한 회고록이다. 평생 13권의 책을 남긴 그의 `전쟁 회고록` 3부작과 함께 이 책은 가장 대표적인 저서로 꼽힌다. 1970년 갑작스럽게 그가 죽지 않았다면 3권으로 완간되었을 책은 1권만 남긴 채 미완으로 닫혔다.
제5공화국 초대 대통령 임명 당시를 기록한 1부의 제목은 `재기(再起)`다. 1945년 해방 후 프랑스가 처한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직업 정치인들은 몇 개의 파벌, 그것도 서로 뜻이 다른 무리들이 마치 국가를 대표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행동했고, 분열을 일삼았다. 동맹파업은 연일 일어났고, 대외적자의 누적으로 화폐와 재정 파산, 경제적 붕괴 위험도 날로 증가했다.
가장 큰 문제는 알제리였다. 132년이란 긴 통치 기간은 복잡한 문제를 낳았다. 1952년부터 1958년 사이 전쟁회고록을 쓰며 칩거했던 그는 폭발한 알제리 정변(1958년)으로 이 문제에 대해 각성했다. 국경을 지키기 위한 50만 대군 주둔과 전쟁의 고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인도차이나에서의 실패를 답습할 것으로 보였다.
무너진 펠릭스 가야르 정권과 알제리에서의 뜨거워져가는 열기를 보며 67세인 드골은 결심한다. 정변을 막는 길은 현재의 정치체제와 관계없이 월등한 위치에 서서 지금 정권을 무너뜨리려는 세력까지 포함할 수 있는 국권이 탄생해 국가를 재건하는 길뿐이라고. 사람들은 드골을 연호했고, 드골은 국민의 부름을 받아 엘리제궁에 입성했다.
"18년 전 프랑스를 파탄에서 구출하던 때와 마찬가지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프랑스가 제시하는 계약을 이행하려는 것이다. 나는 프랑스 국민이 나에게 주는 이례적인 신임을 저버릴 수 없다. 이렇게 해서 나는 다시 드골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번째 통치를 결심하기까지 그의 고민과 복잡한 생각들이 여과없이 묘사되는 1부는 이 책의 백미다. 고뇌에 찬 슈퍼 히어로의 가면을 벗은 맨얼굴을 보는 것 같다. 하지만 결심한 뒤엔 물러섬이 없었다. 전쟁 영웅의 목소리는 완고하다. 조국의 유구한 역사와 근본을 긍정하는 견고한 확신의 목소리다.
"프랑스는 심연에서 벗어나 자주국이자 승전국으로 재기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국토와 해외 영토를 회복했고 소련, 미국, 영국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 독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우리 국민은 독일 점령 아래에서 온갖 모욕과 핍박을 받았으며 그로부터 해방된 다음에는 정치, 사회 그리고 속령 문제로 인해 혼란을 겪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필경 공산 독재체제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국지적인 소란과 사건들을 제외하고 현실은 그 반대를 증명했다."
그는 의회에 불만을 품었지만 의회를 해산시키지 않았고 우파의 지지를 받았지만 좌파를 멸시하지 않았다. 늘 국민과 국가를 위한 길만 생각했으며 그 길이 옳다고 생각하면 절대로 의지를 꺾지 않았다. 그는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사실을 굳게 믿었다.
회고록의 목소리는 필연적으로 외눈박이의 시각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둘러싼 오해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반박한다. 실업과 높은 등록금 문제로 추동된 68혁명으로 퇴진한 드골은 경제적으로 무능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드골은 이에 대해 당시로는 과감했던 `뤼에프 계획`을 통해 국가 부채를 획기적으로 줄였다고 회고한다.
드골의 가장 큰 업적은 프랑스의 외교적인 입지를 구축한 데 있다. 전쟁 영웅인 드골이 집권하면 알제리 폭도를 제압해 줄 것이라 여긴 우파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7년의 전쟁을 끝내고 알제리를 해방시킨다. 또한 서유럽 6개국 유럽경제공동체(ECC)의 영국 가입을 반대하는 등 강한 목소리를 내 자국의 외교적 입지를 강화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거인의 삶은 소박했다. 그는 유언으로 장례식은 콜롱베에서 치를 것이며 무덤은 딸이 묻힌 곳, 묘비명은 `샤를 드골 1890-0000`으로만 쓰라고 남겼다. 국장으로 치르지 말고 조용하고 간소하게 식이 진행되기를 원했다.
책에서는 전쟁 영웅이기에 앞서 유능한 연설가이자 문필가로서도 이름이 높았던 드골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 문장의 맛과 무게가 탁월하다. 무엇보다 이 혼탁한 정치의 시대에 역사에 뚜렷한 궤적을 남긴 지도자의 초상을 보는 것은 남다른 즐거움이다.
드골, 희망의 기억 |
대통령이 됐다… 나는 이제 노예다
`좌파` 를 멸시하지 않은 `우파` 드골
은 둘러싼 동서양 화폐전쟁 통해 미래 엿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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