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림없이 정통성과 정당성이 결여된 권력의 출현은 사회 · 문화 · 경제 · 교육, 기타 여러 분야에 그릇된 영향을 주고 그 본질을 왜곡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틀림없는 것은 사회 여러 분야가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그런 부당하고 부정한 권력이 출현할 수도 있다.
현실성 없는 예가 될지 모르지만 이른바 신군부 세력이 워싱턴이나 파리나 런던에 출현했다고 가상해 보자. 한 정보사령관과 몇몇 장성이 몇천 명의 군대를 풀어 워싱턴 · 파리 · 런던을 장악하고 각료를 연금했다고 해서 미국이나 프랑스 · 영국에 우리 식의 5공이 생겨났을 것 같지는 않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서만 유독 5공이 가능했던 대는 우리 사회 전체가 책임져야 할 부분도 있는 셈이 된다.
그런데도 우리의 5공 문제 처리는 철두철미 연역적인 방식으로만 진행되었다. 문화도, 경제도, 교육도, 사회도 잘못된 것은 모두 5공 탓으로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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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먹어 입 다물고 있었던 이들은 또 그렇다고 치자. 위계질서에 눌려 말없이 순응해야만 했던 관료도 보아주자. 그렇지만 기다렸다는 듯 달려가 온갖 이데올로기와 정책을 생산하고, 혹은 그렇게라도 끼지 못해 안달을 부리던 지식층은 어찌 되었는가. 정부의 충실한 기관지가 되어 은근히 충성 경쟁까지 벌이던 언론은? 또 정해진 명단에 따라 줄 세우는 대로 야당도 되고 여당도 되었던 정치인들은? 무엇보다도 그 모든 것을 겁먹은 눈으로 묵인한 대다수 기성세대는? 한 줌의 예외를 제외하면 5공은 우리 모두의 공동 작품일 수도 있다.
하기야 당시의 상황으로 봐서는, 그리고 책임이 무겁고 가벼움에 따라서는 그 같은 형태의 청산이 먼저 진행되었어야 할지도 모른다. 문제는 1차적인 원인 제공자들이 충분하지 못한 대로 단죄되고 처벌된 뒤의 일이다. 그다음에 한 번쯤은 귀납적인 해석에 따른 우리 모두의 반성이 뒤따라야 했다. 그런데 그뿐이었다. 몇몇 사람이 감옥에 가거나 여론 재판에서 난도질 된 걸로 청산은 끝나고 우리 주위에는 죄 없는 잘난 사람들만 남게 되었다. 나는 아직 어떤 글, 누구의 말에서도 5공과 관련해 스스로를 반성하거나 참회하는 내용을 본 적이 없다.
전두환 일가의 재산 환수(먼저 이것부터 바꾸어야 한다. 재산몰수라 해야 한다.) 사태를 보면 5공에 대한 참회나 반성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전두환은 아직도 연희동 집에서 살고 있고, 국민 세금으로 경호를 받고 있다. 자식은 잘 먹고 잘살고 있다.
혹자는 5공의 공과를 말하려 한다. 잘못은 잘못이고 잘한 점도 있다고 말한다. 이는 출발이 잘못된 것이다. 잘못된 시작은 결코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없다. 전두환을 비롯한 그 일당의 단죄는 아직도 늦지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도 그 밑에서 뒤를 핥으며 지내온 수많은 '죄 없는 잘난 사람'의 자기반성이 없으면 앞으로 제2, 3의 5공이 나와도 어쩔 도리가 없다.
인용한 글의 글쓴이가 누구냐에 따라 글의 본질이 바뀌지는 않는다. 물론 어떠한 의도로 이러한 글을 썼는지 고민은 해야 한다. 왜 이 글을 썼으며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하며 읽어야 한다. 단지 선입견으로 글쓴이를 폄하하거나 욕하기 전에 우리가 '죄 없는 잘난 사람'이 아닐는지 돌아봐야 한다.
자기반성은 다시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엄하게 다스리는 것과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민주주의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용서해서는 안 된다. 친일파가 살아남았고 그 자손이 대대로 잘 먹고 잘사는 세상, 전두환 일가 그리고 그 밑에서 개처럼 던져주는 먹이를 핥아 먹고 살아온 일당과 그 자손이 잘 먹고 잘살고 앞으로도 잘 사는 세상이 민주주의라면 개밥보다 못하다.
노신은 개의 본성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고 했다. 개가 물에 빠졌다고 습성이 바뀌는 게 아니다. 구해주고 나면 순진한 사람만 고생한다. 악인은 구제되고 나서, 자신이 이익을 보았다고 생각할 뿐, 절대 회개하지는 않는다. 더욱이 교활한 그들은 얼마 안 가서 빛나는 명성을 되찾게 되며, 이전과 마찬가지로 못된 짓을 한다. 물에 빠진 상대가 사람이라면 건져야만 하고, 개라면 내버려두어야 하며, 나쁜 개라면 때려야 한다.
지금 해야 할 일은 때려 잡아야 하는 것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