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지 않으려는 것을 보도록 누군가는 철탑에 올랐고, 듣지 않으려는 것을 듣 도록 누군가는 목을 맸으며, 말하지 않는 것을 말하도록 누군가는 몸에 불을 붙였다. 배제당한 자들은 언어를 획득하기 위해 스스로 ‘사건’이 돼야 했다.
말
(言)이 운다. 격월간 <말과 활>은 울음으로 말하고 분신과 투신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이들의 ‘말을 통한 저항’이다.
권력자의 말을 주워담느라 주류 언론이 누락한 ‘말들의 거점’이다. 막혀버린 말의 길을 뚫으려는 ‘말의 몸부 림’다. 그렇게
읽힌다.
창간호의 뜻은 선명하다. ‘이 시대 유령들의 존재론’을 쓰겠다는 선언과도 같다. “그들의 흔적과 그들의
자리와 그들의 목소리를 추적하고 조명하는” (심보선, ‘자유로운 노동을 위한 유령들의 투쟁’) 글들이 잡지를 가득 채우 고 있다.
<말과 활>이 진단하는 오늘은 ‘존엄을 지키기 위해선 저항하지 않 을 수 없는 시대’다. 자본주의 자체가 혁명이
됐다. “테크놀로지에서 이데올 로기에 이르기까지 지난 수십 년간 우리의 모든 풍경을 바꾸어놓았”고, “새 로운 세계로 직행할
경로를 만들어내려는 모든 시도는 필연적으로 괴물과 대면”할 수밖에 없게 됐다.(슬라보이 지제크, ‘오늘 왜 공산주의인가’)
<
말과 활>은 2013년 한국 사회의 ‘아파르트헤이트’(차별과 분리)를 파고든 다. 고통스럽지만 쉽게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말함으로써 빼앗긴 말의 활 로를 찾는다. 정규직 노동자로부터 분할당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철탑에 오르거나,
노동자 내부마저 쪼개지는 현실의 민낯 을 드러낸다.(이혜정, ‘말해지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자본과 노동 양쪽에서 배제당하는
“노동자계급이면서도 노 동자계급이 아닌 계급” 혹은 “더 이 상 어떤 계급도 아닌 계급”을 이야기 한다.(이진경, ‘노동으로부터도
배제된 계급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언어의 주인에게서 언어를 빼앗는 일에 노동 운동과 진보정치가 일조하는 현실(박 점규,
‘정규직 노조 뒤에 숨은 노동운 동과 진보정치’)도 상기시킨다.
<말과 활>의 첫 상차림엔 인공감미료가
없다. 투박하고 질박하다. ‘자본에 맞서는 정치와 자본 너머 정치의 가능성’을 연속기획으로 탐구한다. “완전 히 파멸하지 않기
위해 항상 자기 자신의 일부를 제물로 바쳐야만 하는” (심보선) 사람들을 위한 정치를 묻는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지 고찰하고(김
상봉, ‘다시,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1987년 체제의 ‘타협의 민주화’가 박근 혜 정부의 탄생으로 이어진 현상을
분석한다(이택광, ‘박근혜는 무엇의 이 름인가’). 홍세화 발행인과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의 대담도 실렸다. 지
금껏 스스로의 투쟁을 기록하지 못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는 ‘말의 진 지’를 만나서야 펜을 들고 자신의 삶을 기록(이창근,
‘쌍용차 투쟁 르포’)할 수 있게 됐다. <말과 활>은 ‘기름진 말’에 맞서는 ‘가난한 말들’의 연대기와 도 같다.
*
“우리의 말은 다시 존재의 떨림과 긴장을 담아 체제의 모순을 겨냥하여 날아가는 활이 될 수 있을까. 이 저주받은 세계가 강요하는 배제의 폭력에 저항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의 가능성’으로 다시 사고할 수 있을까.”
홍
세화 ‘말과활’ 발행인이 격월간 ‘말과활’ 창간호(7~8월) 이중삼중으로 배재된 노동의 문제, 존재·존엄의 문제를 두고 쓴 이
의문형 문장에는 이 신생 매체가 지향하는 바가 또렷하게 나타나 있다. 홍 발행인은 ‘불온하고 아름다운 상상이 세상을 바꿀
때까지’란 제목을 붙인 창간호 머리글에 이렇게 말한다. “체제의 상식과 문법을 벗어난 새로운 말들은 비웃음을 사거나 즉각 거부당할
것이다. 지금부터 우리는 저들이 들어달라고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입을 열어 말하려는
것일 따름이다. 우리의 말이 세상을 바꾸는 시간이 더디고 더디(遲遲·지지)게 올지라도.”
협동조합 ‘사유와 실천의
공동체 가장자리’가 발행하는 창간호는 체제의 상식과 문법을 거부하며 “체제의 언어 안에 다른 언어를 기입”하려고 한다. “이 문제
많은 자본주의가 심각한 위기를 가져왔다고 투덜”대는 데 그치고 마는 좌파의 문제도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완전 고용과
유럽산 복지에 대한 약속은 공허한 말들로 여기며 ‘대의제’에 매달리는 현상을 비판한다.
홍 발행인의 말은 슬라보예
지젝이 창간호를 위해 기고한 ‘오늘 왜 공산주의인가’의 문제 의식과 이어진다. 지젝은 “아무도 배제되어서는 안 되는 보편적 인류의
공간으로서 공통적인 것의 문제의 해법”으로서 공산주의의 가능성을 논한다. 지젝은 “오늘날 진정한 유토피아, 즉 가장 비현실적인
생각은 기존의 시스템을 적당히 변형하여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라며 “유일하게 현실적인 선택지는 이 시스템
안에서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김종철과 홍세화는 창간 특집 대담 ‘맹목과 무기력의 시대를 넘어서’에서 기본소득제를 화두로, 좌파의 몰락 또는 소멸, 정치와 따로 존재하는 인문주의, 이야기(서사)가 사라진 사회, 녹색과 좌파의 연대 가능성을 논의한다.
창
간호 연속기획은 ‘자본에 맞서는 정치, 자본 너머의 정치’다. 한국의 여러 좌파 지식인·활동가, 작가들이 참여했다. 서동진이
‘인민이여 안녕, 민주주의여 안녕’을, 심보선 ‘자유로운 노동을 위한 유령들의 투쟁’, 이진경 ‘노동으로부터도 배제된 계급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창근이 ‘쌍용차 투쟁 1-저항을 넘어’를 썼다.
집중기획 ‘존엄을 위해 저항을 선택하다’에서
박점규는 ‘정규직 노조 뒤에 숨은 노동운동과 진보정치’, 이혜정은 ‘말하여지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정진우는 ‘손을 잡는
이유들-선택, 각본, 장벽, 연대 그리고 이유에 대하여’를 썼다.
이택광은 ‘비평’에 ‘박근혜는 무엇을 위한 이름인가’를 기고했다. 김상봉은 ‘쟁점’에 ‘다시,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노동자에게 사외이사 추천권을!’, 박노자는 ‘동향’에 “‘사민주의자의 꿈’의 파산”을 기고했다.
창
간호는 사진에세이를 2편 실었다. 노순택이 노동 현장을 담은 ‘머리 위의 섬’과 정택용의 ‘밀양, 포크레인 밑의 평화’다. 국내에
번역 출간되지 않은 가라타니 고진의 <철학의 기원1>도 창간호부터 4회에 걸쳐 연재한다.
이밖에
임지현(홀로코스트와 탈식민의 기억이 만날 때), 김현호(괴물이 된 사진이 역사로부터 귀환하다), 정희진(차별이 모든 이에게로),
박권일(자유의 모험, 안전의 성체) 미류(장소를 빼앗기는 사람), 회사를 해고하다(명인), 윤인로(권리장전의 약실, 치유의
조건), 김진호(격노사회와 사회적 영성), 조효원(바쁨과 물러남 그리고 어긋남에 대하여), 황진미(자본의 욕망에서 벗어나 본원적
행복을 누리길 촉구하다 드라마 <출생의 비밀>), 김종락(당연한 것 뒤집어보기, 근원으로 돌아가기), 장인용(서울은
깊고, 자본과 권력의 결탁의 상처도깊다), 문화(연대의 신체를 구성하라!)가 기고
말과활 - 창간호 |
불온하고 아름다운 상상이 세상을 바꿀 때까지-말과활 창간호
‘말의 진지’ 구축, 배제된 자들의 삶 속에서 ‘정치’ 발견하겠다
자본주의 변화 대응하려면 ‘주입식 진보’ 벗어나야
능력도 매력도 없는 좌파! 무식부터 탈출하자!
‘가장자리’ 진지 삼아 ‘말과 활’로 싸운다
격월간 시사학술지 ‘자본 너머’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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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주요 행사 날에 빠지지 않고 하는 것이 국민의례다. 하지만 이는 일본 제국주의시대 일본 기독교단이 정한 의례의식으로, 제국주의에 충성하고자 만든 것이며 구체적으로는 궁성요배, 기미가요 제창, 신사참배를 뜻하는 말이다.
국위선양이란 말은 ‘나라의 권력이나 위엄을 널리 떨치게 한다’는 뜻으로 많이 쓰이고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일본 제국주의 잔재다. 어원을 보면 ‘億兆安撫國威宣揚(억조안무국위선양)の御宸翰(어신한)とは’이다. 뜻을 보면 ‘신하들은 천황을 도와 국가를 지키고 황국신민을 있게 한 시조신을 위로하여 일본을 세계만방에 알려야 한다’는 것이 골자다.
책의 저자는 국경일 등 주요 행사 때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이나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제창 등을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고, 대한민국을 세계에 널리 떨치지 말자는 것도 아니다. 해방된 지 68년이 지났지만 일본말 찌꺼기가 걸러지지 못한 채 우리들이 일상에서 예사롭게 쓰고 있는 식민지 잔재를 당장 떨쳐내자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국어사전을 올바르게 재정비하자고 주장한다. ‘표준국어대사전을 불태워라’라는 파격적인 책 제목을 붙이려 했던 저자의 의지가 보인다.
책의 저자 이윤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은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어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문화교류와 소통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며 ‘진정 가까운 이웃나라 일본’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민간외교관이기도 하다. 일본 와세다대학교 객원연구원과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어연수평가원 교수로 일했던 그는 지금은 ‘우리말 속에 남아 있는 일본말 찌꺼기’를 걸러내는 작업을 통해 올바른 우리말글살이를 널리 알리고 있다. 더불어 국립국어원 순화위원, ‘친일인명사전’을 펴낸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친일파 청산 작업에도 힘을 보태고 있다.광복을 맞이하고 세대가 바뀌었지만 아직도 우리 삶 깊숙한 곳에는 그 뜻을 알면 도저히 쓸 수 없는 일본 말들이 넘쳐난다. 그런데도 국립국어원조차 이 문제를 안이하게 생각하거나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단어의 어원을 알 수 없다며 ‘모르쇠’로 일관하는 태도는 국가기관으로서 보여서는 안 되는 모습이지만, 그렇다고 국어의 모든 것을 국가기관에만 의지하는 것도 옳지 않다. 국민이 날카롭게 감시하지 않은 잘못도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러한 맥락에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 잘못된 일본말 사용 사례를 감시하는 감시자의 눈으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책은 ‘유도리’나 ‘단품’, ‘다구리’와 같이 일본말 찌꺼기인 줄 뻔히 짐작하면서도 쓰는 말뿐만 아니라 ‘잉꼬부부’, ‘다대기’, ‘기합’, ‘품절’처럼 우리말인 줄로만 알고 쓰던 일본말 찌꺼기의 역사와 유래, 쓰임새에 대해 낱낱이 밝히면서 국어사전을 만드는 기관에 대한 애정 어린 비판을 잊지 않는다.
또한 이 작업을 통해 일본에서 온 말이니 쓰지 말아야 한다고 무턱대고 주장하기보다 일본말 찌꺼기를 순화해야 하는 필연성을 제시해 읽는 이가 스스로 일본말 찌꺼기 사용에 대해 각성하도록 유도한다는 점에서 일본말 찌꺼기를 주제로 한 기존 책들과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저자는 오래전 일본에 한자 문명을 전파했던 우리가 지금은 오히려 일본식 한자를 쓰고 있다는 점을 밝히면서 문화·예술의 측면에서 앞서 갔던 민족의 자존심까지 구겨지는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특히 일본 센소지 소장 ‘수월관음도’ 등을 사례로 들며 고려 불화의 독보적인 가치와 표구 기술을 두고 예전부터 쓰던 ‘장황’이라는 말 대신 표구라는 말을 쓰는 것이나, 일본 요리에는 쓰이지 않는 갖은 양념이라는 개념을 일본말 다대기에 대한 설명으로 국어사전에 버젓이 올려놓고, ‘여뀌’ 꽃을 설명하면서 어려운 일본 말을 쓰거나 일본 국어대사전을 그대로 베끼기까지 하는 참담한 현실을 지적한다.
이 밖에 일본 말로 잘못 분류한 한국어, 국어사전에 실린 일본말과 실리지 않은 일본말들을 하나하나 지적하며, 순화하라고 표시해놓고 그 이유를 밝히지 않거나 예전에 쓰던 한자를 버리고 일본 한자로 바꿔 써 일본말로 정의 내리는 ‘표준국어대사전’의 무원칙도 고발한다.
오염된 국어사전 |
국어사전에도 일본말 찌꺼기가…
오염된 국어사전- 국어사전에도 일본말 찌꺼기가 있다?
기념식장 '국민의례'가 일제의 잔재?
국민의례, 잉꼬부부…알고보면 일본말 찌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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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수영은 1960년 4·19 혁명 즈음에 일종의 '혁명 시'로 부를 만한 시를 수 편 써 냈다.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이하 <그놈의 사진>)는 혁명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을 1960년 4월 26일에 지어진 작품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전국 방방곡곡 곳곳의 건물마다에 걸린 '그놈'의 사진, 곧 독재자 이승만의 사진을 떼어내는 것으로써 혁명의 과업에 동참하자는 열의를 격렬한 어조로 호소한다.
<육법전서와 혁명>은 <그놈의 사진>이 지어진 한 달 뒤인 5월 25일에 이 세상에 나왔다. 이 시기의 혁명의 불꽃은 어땠을까. 작품에 그려진 정황으로 보건대 그다지 뜨거워 보이지 않는다. "불쌍한 백성들아 / 불쌍한 것은 그대들뿐이다"(1연 6·7행)나 "그놈들은 털끝만치도 다치지 않고 있다"(2연 1행)와 같은 시구를 보라. 독재자 이승만과 자유당의 어두운 잔재들은 현실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며 여전히 민중들을 압살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김수영 시인이 이 시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사람들에게 '혁명'의 본질을 새삼 일깨워주고 싶었다. 혁명은 모든 것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는 것이다. 당연히 "기성육법전서를 기준으로 하고 / 혁명을 바라는 자는 바보"(1연 1·2행)이다. "혁명의 육법전서는 '혁명'밖에는 없"(3연 14행)는 것이다. 그런데 이 당연한 사실들이 현실에서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시인은 불안했다. 그는 아마도 속으로 이렇게 외치고 있지 않았을까. '이런 식으로 하면 혁명은 결국 실패할 거야.'
그 한 달 사이에 어떤 일들이 벌어졌던 것일까. 한 달이면 '승리의 화요일'으로 불린 4월 26일의 흥분이 여전히 뜨겁게 살아 있을 만한 시간이 아닌가. 그런데 도대체 시인은 당시에 어떤 분위기를 느꼈기에 혁명에 대해서 이토록 불안과 불만을 토로한 것일까.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문화사적인 고찰의 결과물인 <혁명의 배반 저항의 기억 - 프랑스 혁명의 문화사>를 통해 이 문제를 살펴보자.
프랑스 혁명에는 '여성'이 없었다?
저자의 개괄에 따르면, 프랑스 혁명에 대한 해석의 관점은 크게 두 가지가 맞서 있다. 정통주의(마르크스주의)와 수정주의가 그것이다. 이들을 거칠게 일반화하면, 전자는 프랑스 혁명이 가져온 변화를 긍정적인 차원에서, 후자는 부정적인 차원에서 조망한다. 특히 후자는 1980년대 중반까지 주류 해석의 자리를 지키고 있던 전자가 가부장적 사고방식의 산물이었음을 비판하면서, 페미니즘적이거나 문화사적인 시각으로 프랑스 혁명을 재성찰하는 관점을 취한다.
이런 점은 이 책의 체제에도 반영되어 있다. 제1부는 서양·백인·남성적 편견으로 서술된 기존 주류 해석을 페미니스트적 입장에서 재성찰하고, 서구 중심주의적 해석의 한계를 지적한다. 제2·3부에서는 혁명에 관한 영화와 혁명 가요·혁명 축제 등을 통해 프랑스 혁명을 일종의 문화사적인 '사건'으로 고찰한다.
이 책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대목은 "우리가 알고 있던 프랑스 혁명은 없다"라는 제목이 붙은 제1부다. 저자는 이 대목에서 '여성' '노동과 복지' '유색인' 등의 열쇳말을 중심으로 프랑스 혁명을 손꼽히는 '원조 혁명'으로 보는 기존의 일반적인 시각과는 달리, 그것이 '반쪽 혁명' 또는 '배반당한 혁명'으로 재해석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배반당한 혁명'은 과거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망각의 바다에서 잉태한다. 불편한 진실에 대한 과거 기억을 강제로 삭제하거나 권력의 희생자들을 사탕과 채찍으로 침묵시키면서, 이긴 자들의 역사교과서에서 혁명은 늘 지연되고 실패한다."(본문 12쪽)
가령 저자는 '이긴 자들'이 "사탕과 채찍으로 침묵시"킨 '권력의 희생자들'의 대표 보기로 여성을 든다. 그는 여성사적 시각을 바탕으로 프랑스 혁명을 본격 조명한 미슐레의 말을 빌려 "남자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탈취했다면 여성은 왕을 사로잡았"음을 강조한다. 실제 루이 16세의 저항으로 혁명의 수레바퀴가 정체를 보이던 1789년 10월 초순에 베르사유로 행진한 7000명의 파리 여성들은 왕을 향해 시민들의 빵 문제를 해결하라며 목소리를 높인다. 1791년 7월 14일의 '100인의 청원서'에도 41명의 여성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올린다. 그래서 저자는 여성들이 혁명을 수호하고 키웠던 용감한 행동대원이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저자는 혁명 정부가 여성들을 혁명과 공화주의의 훼방꾼으로 매도했다고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혁명적 여성을 지칭하는 대명사인 '여성 시민'이라는 말이 하인을 지칭하는 야유적 단어로 전락한 점, 대신 여성들이 '마담'이나 '마드무아젤'이라는 단어로 불리게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는 여성들이 1816년에 이혼법이 아예 폐지된 뒤 다시 합법화하는 1884년까지 "가정이라는 이름의 감옥에 갇힌 양심수"로 불행한 결혼 생활을 견뎌야 했다고 주장한다.
"자코뱅 혁명정부는 여성들의 집회와 단체결성을 금지함으로써 여성은 아내와 어머니로서 육아와 가사에 전념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미덕'이라는 점을 주지시켰다. '사적 영역의 주인공 = 여성, 공적 영역의 주인공 = 남성'이라는 등식으로 요약되는 '젠더에 바탕을 둔 예의범절 코드'가 혁명이 만들어낸 새로운 전통이 되었다. 남성 혁명주의자들이 주조한 이러한 '젠더 체면 의식'의 경계선을 넘으려는 여성들에게는 채찍과 감금이 주어졌다."(본문 48쪽)
이후 역사는 '혁명의 훼방꾼'으로 매도당한 프랑스 여성들을 유럽에서 가장 늦게 참정권이 부여된 주인공으로 기록한다. 그는 이 사실이야말로 프랑스 혁명이 낳은 최악의 역설이라고 비판한다. 프랑스 혁명기의 여성들을 새롭게 재음미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든 혁명이 '혁명'의 본질에 맞게 진행됐던 건 아냐
김수영 시인은 예의 <육법전서와 혁명>에서 "혁명의 육법전서는 '혁명'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를 따른다면 혁명에는 반드시 기존의 것과는 전혀 다른 새 헌법과 제도·조직 들이 뒤따라야 한다. 성이나 계층에 대한 관점이나 의식도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기의 여성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혁명이 '혁명'의 본질에 맞게 진행됐던 것은 아니다. '배반당한 혁명'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다.
계층에 대한 시각도 과거의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고착화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시민권을 예로 들어보자. 저자에 따르면, 1814년부터 1830년까지 프랑스인 3250만 명 중에서 투표권을 가진 사람은 전체 인구의 0.3퍼센트인 10만 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는 이 사실이 유산자들이 독점적으로 지배했던 왕정복고기의 성격을 웅변한다고 주장한다. 상당한 재산세를 납부한 40세 이상 남자에게만 부여된 피선거권을 가진 사람도 겨우 1만5000명 수준이었다.
"7월 왕정은 선거권 나이를 하향조정하는 '무늬만 개혁'을 단행했지만 그 기름진 민낯은 반동적인 복고왕정의 복사판이었다. 7월 왕정이 표방하는 '자유'는 권력과 재산을 가진 소수자들만의 자유였으며, '질서'는 엄격한 형벌제도와 과시적인 국가폭력으로 유지되는 '억압'의 다른 이름이었다."(본문 22쪽)
저자는 집권 세력은 권력구조의 근간에 위협이 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아래로부터의 불만과 항의를 수용하려는 전향적인 제스처로 대중의 욕구불만과 개혁의지를 순화시키는 전략과 프로그램을 소유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혁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도 이런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19세기 말 독일제국의 수상 비스마르크가 각종 사회 보장 복지제도를 선구적으로 도입해 대중의 인기를 빼앗은 예를 든다. 또한 그는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하는 다양한 미시 권력들(시험과 평가, 시시티브 등의 감시 시스템)이 혁명의 씨앗을 고사시키는 토대가 되고 있음도 놓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다.
"공장 바깥에 있는 노동자, 학교 바깥에 있는 학생, 감옥 바깥에서 생산되는 품행방정 남녀들, 국가 바깥에 있는 이주노동자와 다문화 가정, 이들 모두에게 혁명은 실패나 성공으로 마감되는 권력다툼이 아니라 계속되어야 할 열정 그 자체다. 혁명은 가고 오지 않을지라도, 거리에서 우리가 함께 부르던 노래와 연대감은 남는다. 안 되는 혁명에 쫓겨 다른 방에 갇혀도 또 다시 녹슨 펜에 침을 묻혀 자유와 평등의 이름을 벽에 아로새겨야 한다."(본문 236~237쪽)
민주당이 국정조사 파행에 항의하며 장외 투쟁을 선언하고 거리로 나왔다. 광장의 한 귀퉁이에 선 그들이 그동안 이름없는 시민들이 힘겹게 켜든 촛불에 힘을 보탤 수 있을까. '혹시나' 하는 생각이 없지 않다. 하지만 여전히 미덥지 않은 구석이 많다. 저자가 제목을 통해 말하고 있는 바, 더 많은 이들이 '배반당한 혁명'의 추억은 버리고 '저항의 기억'을 굳게 아로새겨야 하는 이유다.
혁명의 배반 저항의 기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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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은 그것을 읽은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기도 하며 한 사회의 진로와 역사의 발전방향에 지대한 영향을 주기도 한다. 이런 책의 위대함 때문인지 거의 모든 언론매체는 정기적으로 책 소개 및 서평에 상당한 지면을 할애해 독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한다. 그런데 책이 독자의 삶을 뒤흔들 정도의 위력이 있다면, 도대체 그 책을 쓴 사람의 인생에는 어떤 충격과 변화를 가져올 것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자신의 삶을 책으로 바꿔 낸 사람들을 만나, 책이 저자의 삶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들어보는 기회를 갖는다. 언젠가 책을 쓴 저자가 되겠다는 꿈을 가진 사람은 많다. 하지만 모두가 꿈을 이루지는 않는다. 이미 자신의 삶을 책으로 바꿔 꿈을 이룬 저자의 인터뷰가 미래의 저자를 꿈꾸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 기자 말
나는 우리나라가 큰 나라인 게 좋은가, 작은 나라인 게 좋은가? 우리나라의 역사가 오래된 나라인 게 좋은가, 오래되지 않은 나라인 게 좋은가? 나는 이 질문을 어렵게 생각한 적이 없다. 나는 고대의 우리나라가 컸어도 작았어도 상관없다. 역사가 오래 되었어도 오래 안 되었어도 상관없다. 나는 우리나라가 그냥 좋고 그 어느 쪽이든 앞으로도 그냥 좋아할 것이다. 나아가 이 지구상의 어떤 나라의 대중도 마찬가지라고 믿는다.
생각해보라.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는 도시국가였다. 그런데 그 손바닥만 한 국가로 고도의 문화를 꽃피우며 번영을 누렸다. 그런 아테네의 국민이 이웃 페르시아 대제국을 부러워하며 자기 나라가 작다고 싫어했을까? 그럴 리가 없다. 오늘날의 미국은 그 역사가 300년도 안 된다. 그 나라의 시작은 전 유럽의 가장 후진 지역이자 온갖 유랑민과 이민자와 도망자와 범죄자들의 혼합이었다고 한다. (줄임) 하지만 지금의 미국민 중 자기 나라의 역사가 짧고 그 시작이 초라했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없다. - 김상태 <엉터리 사학자 가짜 고대사> 중에서
그렇다. <엉터리 사학자 가짜 고대사>(책보세, 2012년)의 저자 김상태는 이런 사람이다. 1964년에 전라북도 정읍에서 태어나 재수를 해서 서울대 수학과에 입학했다. 5개의 공리만으로 모든 체계가 세워지는 유클리드 기하학의 아름다움에 빠진 그는 당연하게도 민족주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우리나라의 고대사에 관해 500쪽이 넘는 책을 쓴 계기는 집안의 작은 역사를 정리하던 과정에서 시작됐다. 집성촌을 이뤘던 집안의 내역을 몇 년 전부터 조사하던 중 한국사에 대한 책을 들추게 되었고, 우연히 베스트셀러 역사저술가 이덕일의 <교양 한국사>를 읽다가 자신이 기존에 학교에서 배웠던 고조선의 역사와는 다른 내용이 적혀있는 것에 주목하게 됐다. 당시 김상태씨는 이덕일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역사의 문외한이었다.
관심이 생긴 그는 <고조선, 사라진 역사>(성삼제 씀),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이덕일 씀), <고조선의 강역을 밝힌다>(윤내현 씀), 이렇게 세 권의 책을 읽었다. 모두 고조선이 서기전 2000년 이전에 건국되어 무척 큰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는 '대(大)고조선론'을 주장하는 책이다.
관련 분야의 문외한이었던 김상태는 균형을 맞추기 위해 정반대의 내용 즉 '소(小)고조선론'을 주장하는 책을 골라서 읽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단군, 만들어진 신화>(송호정 씀)였다. 머리말에 "단군과 고조선사에 대해 학계의 정리된 입장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안내서 역할을 하겠다"는 내용이 눈에 띄는 이 책은, 저자가 서울대 국사학과 출신에 박사논문으로 고조선사에 대한 내용을 쓴 사람이라는 점에서 신뢰를 줄 수 있는 책이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김상태는 혼란스러워졌다. 앞의 대고조선론을 주장하는 책들에 비해 내용이 모호하고 논지가 불명확하며 전문적인 용어가 혼란스럽게 나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고조선 탐구가 시작됐다. 유클리드 기하학을 좋아해 수학을 전공한 그는 고조선이라는 분야에서 수학적 합리성을 지닌 '진실'이 알고 싶어진 것이다. 고조선과 관련된 두꺼운 전공서적뿐만 아니라 최신 논문에 이르기까지 닥치는 대로 섭렵해나가기 시작했다.
고조선, 그곳은 김상태의 표현대로 '환빠'와 '식빠'의 칼부림이 난무하는 곳이다. 한쪽에는 종교 수준의 열광적이고 맹목적인 민족주의로 가득 찬 환단고기빠(환단고기 추종자, 환빠)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일본에게 나라를 잃은 시절, 매국적인 식민사학에 경도되어 민족을 배신한 식민사학빠(식민사학 추종자, 식빠)들이 여전히 학계에 똬리를 틀고 있다. 맹목적 민족주의와 식민사학이라는 이란성 쌍둥이들의 칼부림 속에서 김상태는 문외한으로서 검증에 나선 것이다.
"예전이라면 고조선 전문 학자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세상이 발전했죠. 생산력이 진보했습니다. 원하는 논문을 하루 24시간 언제든지 인터넷으로 볼 수가 있지요. 20년 전만 해도 제가 이렇게 연구를 하는 것은 어려웠을 겁니다. 대중이 전문가로부터 일방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전문가와 상호교류하고 검토 비판할 수 있는 물적 조건이 갖춰졌죠. 저는 이게 진짜 민주주의라고 생각합니다."
비전문가 김상태가 전문가들을 판단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한 전문가에게 비판의 칼을 들이댈 때는 다른 쪽 전문가를 고용하면 되는 것이다. 그때그때 고용한 전문가가 상대방 전문가와 어떻게 전투하는지 냉철하게 감시한다. 그리고 어느 쪽이 대중을 무시하지 않고 더 겸손하게 알기 쉽도록 설명하는지, 그리고 더 진실에 가까운지를 판가름하는 것이다. 전문가를 어떻게 고용하느냐고? 방법은 간단하다. 필요할 때 출간된 책을 구해 읽고 인터넷에 접속해 해당 논문이나 글을 찾는 것이다.
수학 전공 '역사 문외한'이 고조선 검증에 나서기까지
이 과정을 거쳐 김상태가 내린 판결이 <엉터리 사학자 가짜 고대사>라는 책으로 나온 것이다. 김상태씨는 환빠와 식빠의 망나니 같은 칼부림 속에서 500여 쪽의 탐구 끝에 단재 신채호, 북한 역사학자 리지린 그리고 윤내현으로 이어지는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대고조선론의 손을 들어준다.
이 과정에서 김상태씨가 보여준 불편부당함과 합리성 때문에, 대고조선론에 대해서 썩 반갑지 않은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던 필자도 완전히 설득되지 않을 수 없었다. 판결 과정에서 그는 주류 학계의 소고조선론자들이 얼마나 식민사학에 절어 있으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해 너절하고 파렴치한 짓들을 서슴지 않는지 생생하게 폭로한다.
"다른 건 몰라도 한국 고대사 문제는 학자의 인격이 중요합니다. 춘원 이광수, 친일파죠. 하지만 저는 친일파였다는 이유만으로 이광수의 문학을 과소평가하는 것에 절대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대사는 다릅니다. 고대사는 역사가가 중요합니다. 그 사람이 정치적으로 인격적으로 어떻게 살았는지를 봐야합니다. 친일파 사관의 본질은 결국 내선일체(內鮮一體) 하자는 것이거든요. 신채호 선생이 나를 감동시키고 울게 만드는 것은, 그 사람의 진실과 정의, 과학에 대한 신념이거든요."
역사란 본래 암흑 속에서 침묵하는 실체다. 이 역사가 빛과 음률로 드러나는 때는 언제인가? 그것은 역사가 자신을 서술하는 역사학자의 영혼을 만났을 때다. 어떤 역사도 자신을 서술하는 역사학자의 영혼을 먹고 제 모습을 세상에 드러낸다. 중국 고대사는 사마천의 영혼을 먹고 세상에 드러났으며 고대 지중해사는 헤로도토스의 영혼을 먹고 세상에 출현하였다. 인간의 기억에 흔적을 남긴 어떤 역사도 그러했다. 고조선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신채호와 리지린과 윤내현의 영혼을 먹고 탄생의 첫 울음을 열었다. 이처럼 역사는 역사학자의 영혼을 양식으로만 암흑과 침묵의 장막을 걷어낸다. 그러나 당신들에겐 이 영혼이란 것이 부재한다. 따라서 당신들은 역사학자들이 아니다. 당신들은 그냥 껍데기다. - 김상태 <엉터리 사학자 가짜 고대사> 중에서
김상태는 자신이 역사 전공자가 아니라 오히려 문외한인 대중이며, 자신이 책에서 품평한 기존의 전문가들과 그 어떤 이해관계나 친분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책을 쓸 수 있었다고 힘주어 말한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그는 거의 결벽증적인 모습까지 보여준다.
"윤내현 선생을 포함한 누구라도 학계 사람들을 제가 만나기는 어렵습니다. 출판사에서 <고조선, 사라진 역사>의 저자인 성삼제씨를 볼 생각이 있냐고 물어봤지만 제가 안 본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성삼제씨와는 대고조선론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의기투합을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상황을 보면 너무 패거리가 지어져 있습니다. 학문이 학문적으로 전개되지 않아요. 그 누구도 공정성을 담보하지 못하는 것이죠. 내가 '아무도 모른다'라고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말 중의 하나예요.
나는 비전문가로서, 대중으로서 가지는 어려움이 있어요. 대중은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항상 어렵습니다. 대신에 완전한 공평성의 자유와 권리를 얻죠. 이것을 절대 안 뺏기고 싶어요. 제가 고조선 연구하면서 윤내현 선생님을 무척 존경하게 됐어요. 제 친구 중에 단국대 사학과를 나온 친구가 있는데 예전에 윤내현 교수님께 세배 가고 했었다는 거예요. 그 친구가 제가 책 낸 것을 알고 같이 세배 가자고 하더라고요. 가고 싶죠. 하지만 못 갑니다. 그래서 안 갔어요. 슬픈 일이죠."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였던 이 땅의 아픈 경험이 고대사 학계에도 깊은 상처를 남기고 결국 환빠와 식빠라는 이란성 쌍둥이를 낳았다. 이 상처들은 너무나도 깊어 합리성과 과학의 눈으로 역사를 들여다보는 것을 천 길 낭떠러지처럼 가로막고 있다. 김상태씨는 그 비합리의 공간에서 자신의 합리성과 공평성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다.
"모욕은 대중의 일상... 자신감이란 '모욕할 테면 해라'라는 자세"
어쩌면 그 몸부림이 그의 글에 힘과 권위를 실어주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비전문가가 전문가의 영역에 뛰어들어 그들을 대중의 눈으로 평가하고 판결을 내리는 것은 이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당연히 책으로 나오는 과정도 쉽지 않았으리라. 인생에서 자신의 책을 쓰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대답하는 그의 말 속에는 그런 어려움의 흔적이 켜켜이 묻어 있었다.
"우선 완성해보는 게 중요합니다. 완성해보면 다릅니다. 달라요. 그리고 냉정하게 출판사에 열 군데 백 군데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출판사한테 모욕받는 겁니다. 기꺼이요. 그리고 또 쓰는 거죠. 하하하. 이게 자신감이죠. 솔직히 모욕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모욕받는 것은 대중들이 일상을 살아나가는 방법이에요.
바람이 불면 풀이 눕듯 대중은 눕는 거죠. 성숙한 대중은 모욕받는 것에 능란합니다. 회사 가면 모욕당하잖아요. 그러면서도 일 잘 하거든요. 스트레스는 좀 받겠지만요. 자신감이란 건 뭐냐면 '모욕할 테면 해라'라는 자세예요. 이런 태도가 생기는 것을 지배자들은 제일 무서워해요. 모욕하는데 기가 안 죽거든요.
황석영 같은 대가가 원고를 쓰면 다들 빌면서 원고를 달라고 하겠죠. 대중이 원고를 쓰면 누가 예뻐하겠어요? 목표를 정확하게 설정하고, 자신의 역량을 명확하게 판단하고, 완성시키고, 그 다음에 책으로 안 나오면 그냥 원고를 베개로 베고 자는 겁니다. 기꺼이 모욕당하고 모욕당하는 것을 즐겨야죠. 출판사에 보낼 때 이메일로 보내는 데 돈도 안 들잖아요? 막 보내요. 그래도 끝까지 연락이 안 오면, 뭐 딴 거 쓰는 거죠. 하하하. 이 자신감이 있어야 돼요. 깡다구 말이에요. 뭐 안 되면 그만이잖아요."
얘기를 듣다보니 언뜻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필자는 여러 권의 책을 쓴 저자이다 보니 간혹 '책을 내고 싶은데 돈이 얼마냐 드느냐'는 질문을 받는 경우가 있다. 자비출판을 말하는 것일 게다. 솔직히 출판사로부터 돈을 받으며 책을 낸 경험만 있어 이런 질문을 받으면 좀 당황스럽다. 그런데 의외로 진지하게 자비출판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중에게 자신의 책을 출판한다는 것은 그만큼 문턱이 높아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감과 '깡다구'가 없는 것일 테다. 김상태는 자비출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일침을 놓는다.
"책 내고 싶은데 어떻게 하지, 라는 질문 자체가 틀린 거예요.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에 이미 자본의 포로가 된 겁니다. 그 마음을 가지는 순간에 많은 출판사들이 '자비출판 한번 해보시죠?'라는 말을 건넵니다. 이렇게 되면 대중이 진짜 망하는 거예요.
책을 낸다는 것에 이상한 환상을 가지고 있어요. 출판은 간단한 거 아닌가요? 저자는 자아실현 또는 경제적 성공을 위해 글쓰기라는 노동을 하는 것이고, 출판사는 그 원고를 가공해서 생산 및 판매를 하는 것이죠. 저자와 출판사는 그 사이에서 타협을 하는 것이죠. 이거 이상 이하도 없는 겁니다. 그런데 뭔가 대단한 능력이 있어야 책을 낸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대단한 능력이 없는 사람은 돈을 내고 책을 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 순간 대중이 지고 들어가요.
최근 들어 잘 쓴 책과 잘 팔리는 책 사이에 괴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이쯤 됐으면 대중이 눈치를 채야 돼요. 자비출판을 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죠. 집안의 족보를 만든다거나 집안 어르신의 전기를 쓰고 싶은데 나 자신은 글 쓰는 능력이 없다, 이런 경우는 자비출판으로 내는 거죠. 이건 다른 영역이에요. 자기 할아버지 전기를 내려는 게 글이 쓰고 싶어서 내는 것은 아니니까요. 자비출판은 그런 사람들이 하는 겁니다. 내가 글을 쓰고, 책을 쓰고 싶다면 절대 자비출판 하면 안 됩니다. 그 순간 글이 썩어요."
"'책 내고 싶은데 어떡하지'란 질문 자체가 틀린 것"
수학을 좋아했던 김상태씨, 하지만 대학에서 온전히 수학만 하고 지낼 수는 없었다. 당시는 군사독재에 맞서 학생들이 민주화 투쟁에 나서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 역시 학생운동에 몸을 담았고 운동에 전념하기 위해 자퇴까지 결심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군대를 갔다. 복학해서 진로를 고민하며 어느 날 층계를 내려가다가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아! 사람이 뭘 하든 굶어죽지는 않는구나.'
그 순간 김상태씨 자신 스스로가 해방되면서 살아가는 것이 올바르고 타당한 삶이라는 깨달음이 왔고, 이후 자신이 생각하기에 의미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것을 생산하며 지금껏 살아왔다. 김상태가 지금 책을 쓰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제트기가 하늘을 지나가면 뒤에 연기가 남잖아요? 활동가는 지나가면 알 수 없는 흔적이 남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에리히 프롬이 그런 얘기를 했어요. 감정적 지식이 아닌 것은 지식이 아니라고요. 단순히 알기만 했다고 사람이 변하지는 않잖아요. 내적으로 감동이 와야 변하지요. 이게 뼈저린 데가 있는 얘기거든요. 1980년대에는 과학적인 이론을 가지고 논리적으로 설득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사람은 논리로 설득되지 않아요. 지나갔을 때 흔적인 남는 사람, 그런 사람이 변화를 일으키는 겁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데 자신감 있게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활동가라고 생각해요. 그런 사람들은 지나가면 흔적이 있어요. 영향을 주겠다, 어쩌겠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끊임없이 사는 거예요, 계속해서. 자기가 생각하기에 의미 있고 재미있는 것을 흥미롭게 열심히 생산하는 겁니다. 책을 쓰는 일 역시 흔적을 남기는 것이죠. 그리고 책이라는 흔적은 동시대에만 남는 것도 아닙니다."
2012년 6월에 출간된 김상태씨의 책 <엉터리 사학자 가짜 고대사>는 500쪽이 넘는 분량에 고조선이라는 전문적인 분야를 다루고 있음에도 벌써 3쇄를 찍을 정도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말하자면 수천 명이 김상태가 남긴 흔적을 만난 것이다. 물론 필자도 그 수천 명 중의 한 사람이고.
김상태가 한 말을 그 자신에게 적용한다면 그는 제대로 흔적을 남긴 활동가다.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니면서 자퇴까지 고민할 정도로 변혁운동에 나섰던 그는 나이 오십이 돼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통해 흔적을 남기는 진정한 활동가가 됐다. 그것도 수천 명에게.
엉터리 사학자 가짜 고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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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준=원주민의 정착 이후 한반도에 들어온 사람들을 이질적 집단으로 바라보는 역사 기술이 많습니다. 기자(기씨조선 시조)와 위만 공에 대한 주장들이 대표적이지요. … 종족이나 문화는 뒤섞이면서 진화하고 내 것, 남의 것을 가르는 일은 부질없다는 태도가 널리 퍼져야 합니다.
▷위만=혈통을 따져 과거 조선 땅에 들어와 살면서 한민족 성립에 유전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기여한 사람들을 이방인으로 여기는 태도는 이치에 어긋나고 해롭습니다. 불행하게도 지금 역사 교과서들은 그런 태도에 바탕을 두고 쓰였고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새 그런 태도를 받아들이거든요.
기원전 2세기 초 고조선의 마지막 임금 기준과 그를 내쫓고 위만조선을 창건한 위만이 현재로 소환돼 대담을 벌인다. 당시 역사적 배경과 사회 상황을 폭넓고 깊이 있게 설명한 뒤 기씨·위만조선을 이질적 집단으로 폄하하는 역사적 기술에 대해 섭섭함을 토로한다.
소설가이자 경제평론가인 복거일의 신작 《역사가 말하게 하라》는 고조선에서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의 세력을 대변하는 22쌍의 맞수들이 등장한다. 계백과 김유신, 정도전과 이방원, 인현왕후와 장희빈, 대원군과 명성황후 등 대표적 라이벌뿐 아니라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은 리훙장과 이토 히로부미, 6·25 전쟁 때 미국·중국 양 진영의 군 지휘관 매슈 리지웨이와 펑더화이 등 한국사에 영향을 미친 인물이 총출동한다. 저자는 ‘가상 대담’이라는 흥미로운 형식으로 세계사적인 흐름에서 한국사를 통찰하고, 이들의 입을 빌려 한국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이 책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관점은 역사 교과서에서 나타나는 민족주의적 역사관에 대한 비판이다. 저자는 민족주의적 역사학자들이 단일민족 신화를 강조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해왔다며 과거와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준과 위만’ 대담에서 단군왕검으로 시작되는 역사 연대기와 장소를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문제가 많음을 지적하고, ‘왕조와 왕준’ 대담에서는 300년 넘게 한반도의 중심 정권으로 융성했음에도 기존 교과서가 간과하거나 축소한 낙랑의 역사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또 통일신라부터 조선까지 한반도에서 유독 오래 존속했던 노예제도에 대해 최충헌의 노비로 ‘만적의 난’을 일으킨 만적을 통해 강하게 비판한다. 만적은 “천년 넘게 이어진 그 지독한 노예제도가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발전을 막았다는 것을 깨달은 지식인이 나오지 않았다”며 통탄한다.
저자는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 ‘시대 정신’이란 화두를 던진다. 그는 “과거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 미래를 위해 오늘을 성찰해야 한다”며 “세계화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건 혈연 위주의 민족주의적 역사관을 경계하고 다양한 문화와 인종을 받아들이는 열린 사회를 지향하며 발전하려는 포용적 태도”라고 강조한다.
역사가 말하게 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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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윤정미 씨의 작품은 온통 분홍색이거나 파랗다. 여자 어린이 사진에는 옷 인형 머리띠부터 유모차 우산 그릇 가방까지 모조리 분홍색이다. 남자 어린이 사진은 반대로 야구모자 방망이 미니카 침대보 등까지 파란색 일색이다. ‘여아는 분홍, 남아는 파랑’이라는 이야기다. 인종 국가와 무관하게 일상 깊숙이 뿌리 내린 이 같은 성별 색 선호도를 사진으로 형상화하며, 이 같은 색에 대한 성별 고정관념에 의문을 던진다. 과연 남녀별로 확연히 구별되는 색 선호도가 타고나는 것인지 사회적으로 훈련되는 것인지.
이 책도 여아용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분홍색뿐인 장난감가게, 일상생활에서 아름답고 섹시한 공주 신화가 양산되고 있는 현실에서 출발한다.
미국인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스스로가 딸의 엄마로서 과도하게 ‘여성스러운 여자아이(girlie girl)’로 길러지는 사회에 이의를 제기한다. 태어나면서부터 분홍색과 공주인형에 둘러싸여 딸들이 지속적으로 성적 대상화와 성의 상품화에 노출되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다.
저자는 장난감가게와 완구박람회부터 여성아이돌스타와 어린이미인대회 등 분홍색과 공주스타일을 권하는 환경을 탐사하고 ‘여성스러운 소녀문화’를 조명한다. 딸이 건강하고 행복하고 자신감 넘치는 사람으로 자랐으면 하고 바라지만 현실은 딸이 세 살이든 서른셋이든 신데렐라처럼 멋져 보이는 것만이 행복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일러주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이 책에는 분홍색과 공주마케팅의 격전장인 장난감과 엔터테인먼트비즈니스의 다양한 사례가 등장한다. 마텔의 인형, 디즈니의 공주시리즈에선 비즈니스 성과가 탁월한 ‘팽크 팩터’를 짚어낸다. 뉴욕도 맨해튼 거리 밖은 21세기지만 완구박람회의 장난감 세상에선 여성해방운동이 일어난 적도 없다는 듯 전통적인 공주이미지가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어린이미인대회와 아이돌스타의 콘서트 역시 여자 어린이들이 공주 인형에 이어 섹시한 우상을 찾아 나서게 이끄는 마케팅의 현장이다.
유아복의 경우 20세기 초만 해도 미국서 남녀 성별에 따른 색 구분이 없었다. 아기옷은 위생적이고 깨끗해 보이는 흰색이었다. 분홍색은 여아용이기보다 강인함의 상징인 빨강의 파스텔톤이라는 점에서 남아용품형 색깔로 여겨졌다. 유아복은 남녀구분없는 원피스형이었으나 1930년대 의류업체들은 유아용품을 남녀별로 내놓기 시작했고, 1980년대 이후 색과 디자인에서 성별 차이가 극대화했다.
이 책은 분홍과 공주스타일을 양산하는 소녀문화가 왜곡된 성적 이미지의 산물임을 일깨운다. 여자 어린이에게 여성스러움을 지나치게 주입시키다보면 다양한 사고와 유연한 판단이 어려워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자 어린이들이 ‘분홍과 공주스타일을 강요하는 환경’에 의문을 제기하는 회의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도록 부모의 역할을 강조한다.
신데렐라가 내 딸을 잡아먹었다 |
여자=핑크' 마케팅이 만든 현실
여자아이엔 핑크옷 ? 공주마케팅의 꼼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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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유럽에 최초의 기계식 시계가 등장했다. 그 이전에도 해시계와 물시계처럼 시간을 측정하는 정교한 기구가 있었지만 그 동력을 기계로 대체한 것은 유럽이 처음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왜 유럽이 기계식 시계를 만들었는가'다.
저서 '대포, 범선, 제국'으로 유명한 유럽의 대표적 경제사학자 카를로 마리아 치폴라는 유럽이 시계를 만든 이유에 대해 "'기계적 세계관'이 유럽에서 싹트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기계의 힘으로 인력을 대체하려는 유럽인들의 관심이야말로 이후 이어질 산업적 발전과 군사적 우위를 선점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책은 유럽에서 기계 시계가 탄생한 배경과 그 의미, 그리고 시계를 먼저 발명한 중국에서는 왜 그것이 실패했는지와 그 역사적 맥락을 분석한다.
시계를 제작했던 사람들은 대포 장인들이었다. 초창기 시계가 쇠나 청동으로 만든 거대한 공공 시계였기 때문에 시계 제작자들이 대장장이나 자물쇠공, 총포공 등 일반적으로 금속을 다루는 노동자들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시계는 시간을 측정하는 정밀 기구로서 특히 과학 혁명의 견인차 구실을 했다. 시계공, 렌즈 제작자, 정밀 도구 제작자 같은 숙련 수공업자와 과학자가 발상과 제안을 주고받았다. 과학자와 수공업자의 협력이 이뤄졌고 시계 제작은 물리학과 역학의 이론이 실용화된 최초의 산업이 됐다.
반면 중국에서 신기술은 산업으로 발전되지 못했다. 유럽인들이 렌즈를 가지고 현미경과 망원경, 안경을 만들어내고 있는 동안 중국인들은 렌즈를 멋진 장난감으로 사용했다. 인쇄술도 마찬가지다.
중국은 유럽인들이 인쇄술을 발명하기 수세기 전에 인쇄술을 발명했지만 그것을 십분 활용한 쪽은 유럽인이었다. 저자는 이것이 기술혁신과 사회ㆍ문화적 환경의 관계에 대한 좋은 사례라고 말한다. 중요한 기술혁신은 사회ㆍ문화적 환경의 성격과 특성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시계와 문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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