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권모술수의 교활한 교본'이라는 혹평부터 종교나 도덕의 세계로부터 독립해 독자적인 정치의 세계를 발견한 '근대 정치 사상의 독보적 출발'이란 극찬까지 극단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군주>는 모순어법, 수사적 장치, 역사적 사실의 의도적 조작에다 해학까지 가세해, 오독의 여지가 가장 많아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수수께끼 같은 책이다.
대표적인 예로 볼로냐대학에서 마키아벨리를 연구한 수재였던 무솔리니는 <군주>에서 '이기적인 인간 본성'과 '힘에 대한 찬양'만을 읽었다. 그래서 사회주의자였던 무솔리니가 파시스트로 전향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과일지 모른다. 국내에서도 <군주>는 학계에선 '군주의 교본'으로만 읽히거나 어느 한쪽 측면만 강조돼 왔고, 일반인에게는 자기계발서로 소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마키아벨리 연구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숭실대에서 봉직하고 있는 저자는 <군주>가 '군주의 교본'을 넘어 '시민의 교본'이라는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이 책을 둘러싼 오해와 오역, 논란을 걷어내기 위해 때로는 한 문장씩, 때로는 한 장씩 이탈리아어 원문을 직접 번역해 텍스트 중심으로 재조명했다.
저자에 따르면, 지난 500년 동안 무수한 오해와 다양한 견해 속에서도 <군주>에 대한 일치하는 평가가 있다고 한다. 즉, 정치의 본질적인 요소인 '힘'에 대한 통찰력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 힘은 권력과 권위에 국한되지 않고, '지배를 받지 않으려는 열망'까지 포함하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이 같은 힘에 대한 통찰을 통해 '지배를 받지 않으려는 열망'을 가진 '다수'의 뜻을 충족하는 것이 곧 강력한 나라의 원동력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런 생각이 변화를 추구하는 시대적 열망을 대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이탈리아 통일을 염원했던 혁명가뿐만 아니라 프랑스혁명 지도자도 이 책을 통해 변화의 열망을 키워 나갔다. 러시아혁명을 주도했던 트로츠키는 "마키아벨리는 민주주의 혁명을 보급시킨 정치철학자"라고 평가했다.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16세기 초 피렌체가 그러했듯이 현재 한국 사회도 정치철학의 빈곤과 정치적 상상력의 부재를 경험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무능한 정치인들이 만들어 내는 절망적 대치다. 게다가 좌와 우, 보수와 진보 등 자의든 타의든 특정 진영 논리에 편입되기를 강요당하고 있다.
저자는 "이에 대한 해결책을 마키아벨리의 지혜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마키아벨리의 지혜는 편 가르기와 편견을 내려놓으라고 요구한다. 마키아벨리는 시대를 초월해 존재하며 불변하는 인간의 본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관찰만으로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는 겸손한 태도를 견지했기 때문이다. 그는 '갈등이 곧 정치의 본질'이라고 생각했지만, 제도화되지 않은 갈등은 곧 부패와 몰락의 지름길이라고 믿었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를 꼼꼼히 다시 읽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군주>에는 우리의 닫힌 마음들을 활짝 열어 줄 수 있는 재치와 진지함이 가득하기에 시민적 자유를 위한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군주> 출간 500주년을 맞아 이탈리아를 비롯해 전 세계에서는 마키아벨리 관련 전시와 강연 등이 활발히 펼쳐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8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마키아벨리 <군주> 500주년 기념위원회' 주최로 '2013년 한국 정치, 왜 마키아벨리인가'라는 주제로 학술대회가 열린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 '마키아벨리와 한국 민주주의'라는 주제로, 곽준혁 숭실대 교수가 '민주적 리더십:군주의 가려진 진실'이라는 주제로, 김상근 연세대 교수가 '마키아벨리와 그의 시대'라는 주제로 논문을 발표한다.
지배와 비지배 |
군주론, 500년 편견 버리고 '시민의 교본'으로 다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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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죽음과 세금 외에 확실한 것은 없다"고 외친 벤저민 프랭클린의 말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동의할까. 확률과 숫자가 뒤섞인
의사의 진단을 철석같이 믿어 왔다면, 그리고 DNA 검사를 맹신해 왔다면 아마도 위의 그럴듯한 명제를 참이라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에이즈(후천성면역결핍증) 검사 결과는 반드시 옳고 유방암 정기 검진은 완치에 특효라는 믿음들에 누군가 불신의 칼을
겨누라고 한다면 따를 수 있을까.
독일 최고 두뇌 집단인 막스플랑크협회 인간개발연구소의 게르트 기거렌처 소장이 쓴 이
책은 당연시되고 있는 확신들을 버리고 확률이 제시하는 위험한 계산법을 잊으라 독려한다. 파란 색으로 출고된 차라도 바라보는
시간과 햇볕의 강약에 따라 황색으로 보일 수 있고, 제약회사가 밝힌 부작용 확률이 실제보다 높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라고
지적한다.
사람들은 전문적인 해석에 둘러싸인 숫자를 접할 때 지레 겁을 먹고 '다른 해석'을 주저한다. 심지어 간단한
수식조차 이해할 수 없는 사람도 적지 않아 대부분 너무나 쉽게 숫자를 맹신하는 경향이 있다. 친자 확인뿐 아니라 성범죄, 살인
사건 수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는 유전자 검사 결과는 정확한 답을 내놓을 것이라 믿어진다. 때문에 대다수 사람이 단지 살인
사건 희생자에게서 발견된 피의자 DNA와 일치한다는 이유로 경찰에 잡혀가더라도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한다. 'DNA가 일치하는
다른 사람이 존재할 확률은 10만분의 1'에 불과하다는 통계 자료에 따르면 이런 경우 감옥에 가는 게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피의자로 지목된 사람이 인구 1,000만 명 이상 대도시에 살고 있다면 '10만분의 1'의 확률은 '100명'이라는
무시하지 못할 숫자로 바뀐다. 'DNA가 일치하면 반드시 범인'이라는 확실한 믿음이 부실한 함정으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책
은 최근 유방암 발병 가능성을 낮추기 위해 유방 절제술을 받은 영화 배우 안젤리나 졸리의 사례를 들어 재차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불확실하다'는 프랭클린의 경구를 되새긴다. 졸리는 유전적 이유로 유방암에 걸릴 확률이 87%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절제술을 선택했고 이후 확률은 5%로 떨어졌다고 밝혔다. 이는 얼핏 보기에 극적이고 확신에 찬 전문가의 의견 같다. 하지만 미
미네소타주의 유명 병원인 메이요 클리닉에 따르면 절제술의 효과는 유방암 사망자 수를 100명 중 5명에서 1명으로 줄이는 데
그쳤다. 다시 말해 100명 중 95명은 아무 이득 없이 가슴을 절제한 것이고, 1명은 절제하고도 암을 피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확실해 보이는 확률에 대한 믿음이 예상치 못한 경제적 비용을 부르거나 심지어 위험과 마주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자료다.
숫자에 속아 위험한 선택을 하는 사람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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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학자 홍윤표 전 연세대 교수가 풀어내는 오묘하면서도 흥미를 끄는 한글 이야기가 펼쳐진다. 한글 이름을 왜 훈민정음이라고 했는가. 한글 자모의 배열 순서는 언제 어떻게 정해졌나. 한글 자형과 한글 서체는 어떻게 변화하여 왔는가. 한글 띄어쓰기는 언제부터 왜 하기 시작했는가.
통상 우리는 한글을 늘 내 것인 양 쓸 줄만 알았지 한글 관련 지식에는 거의 무지에 가깝다. 600년 가까이 이어져 온 한글은 널리 쓰이고 있지만 한글 자체에 대해선 알려고 들지도 않았던 게 그간의 현실이다. 홍 교수는 신간 ‘한글 이야기’ 전 2권을 펴내고 자칫 지루할 것 같은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 써서 우리말과 글에 관한 지식을 폭넓게 전한다.
한글 연구로 평생을 바친 홍 교수의 얘기다.
“훈민이라는 말은 한글 창제가 세종이 직접 한 일임을 의미합니다. 세종 혼자서 창제한 것인지, 집현전 학사들과 공동으로 창제한 것인지에 대해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해요. 그러나 자세히 보면 세종이 직접 만든 것이 분명합니다. ‘세종어제훈민정음(世宗御製訓民正音)’에서 ‘어제(御製)’의 의미는 세종이 친히 지었다는 뜻입니다. 임금이 관여한 일에는 어제, 어정(御定), 어찬(御撰) 등이 쓰이는데, 어정은 임금이 명령하여 지은 것을 말하고, 어제와 어찬은 임금이 친히 지은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한글은 세종이 친히 지은 것이죠. 이것은 또한 한글 이름인 ‘훈민’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훈민이란 용어는 임금만이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죠. 정철의 훈민가(訓民歌)가 있지만, 그 훈민은 일부 백성이지 백성 전체는 아닙니다. 백성 전체를 뜻하는 의미로 신하가 훈민을 썼다면 아마도 역적으로 몰리지 않았을까요? 훈민정음은 백성을 널리 가르친다는 의미가 있죠. ‘가르친다’는 뜻으로 쓰이는 한자로 교(敎)와 훈(訓)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교’를 쓰지 않고, ‘훈’을 쓴 것일까? 교와 훈의 새김은 ‘가르치다’이지만, 실제로 교와 훈은 의미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교는 주로 남자에게, 훈은 주로 여자나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 쓰이던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자에 대한 교훈서는 대개 ‘훈’을 사용하였습니다. 다만 임금만이 사용할 수 있었지요. 훈민정음은 세종이 직접 창제하였음을 뜻하는 용어입니다.”
한글을 독창적으로 창제한 세종대왕 동상.
오묘한 뜻 풀이와 함께하는 홍 교수의 한글 얘기가 관심을 끈다. 지금 우리가 쓰는 한글 자모 순서는 언제 어떻게 자리 잡았을까. 창제 당시의 배열 순서는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고 한다. 세종은 자모 순서에 연연하기보다는 글자 만들기에 몰두했다는 것. 다만, 한글을 처음 반포할 때는 소리나는 순서대로이니 지금 순서대로 설명했으되, 자모 배열 순서에는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현재의 배열 순서는 18세기 중반에 언문학자들이 거의 확정했고 후대에 그대로 전해진 결과라고 한다. 한글 자모의 순서를 살펴보면 매우 과학적이고 언어학적인 분석을 토대로 배열됐다고 홍 교수는 자랑한다. 영어 알파벳의 ‘a, b, c, d’ 등의 배열 순서나 한자의 배열 순서는 과학적인 메커니즘 원칙에서 한참 벗어난다고 홍 교수는 지적한다. 홍 교수는 “한글을 과학적인 문자라고 하는 사실을 한글 자모의 배열 순서를 보면 쉽게 증명할 수 있지 않나요?”라고 반문한다.
최초의 한글 전용 문헌도 일반에 알려진 것과는 다르다. 한글 전용 문헌은 세종이 만든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 아니라, 18세기 중기에 간행된 일종의 역사책인 ‘천의소감언해(闡義昭鑑諺解)’이며, 최초로 가로쓰기를 한 것은 1895년에 편찬된 ‘국한회어(國漢會語)’라는 것이다. 1443년 훈민정음 창제 이후 한글 교육용 책도 꾸준히 이어졌다. 맨 처음 나온 한글 교재는 1446년의 ‘한문본 훈민정음’이며, 1527년의 ‘훈몽자회’로 이어져왔다는 것.
한글 이야기 1 홍윤표 지음/태학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