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를 언제 알았을까?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30년이 훌쩍 넘었다. 처음 만나게 된 게 무엇이었을까? 궁금하다. 궁금하지만 꼭 알고 싶지 않다. 그저 궁금하다. 대부분의 초기 단편집은 가지고 있다. 요즘처럼 깨끗한 인쇄가 아니라 활판으로 찍은 책이다. 누군가가 하나씩 글자를 맞추어 선생과 나를 이어주었다. 그래서 낡은 바랜 그 책을 버리지 못한다.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는 선생의 생전 마지막 산문집이다. 2010년 선생이 작고하기 1년 전이다. 내가 구매한 것은 그로부터 2년이 지난 다음이다. 또 2년이 지난 후 책을 읽었다. 서문만 읽고 이 책을 접어 두었다. 조금씩 천천히 읽고 싶었다. "또 책을 낼 수 있게 되어 기쁘다. 내 자식과 손자에게도 뽐내고 싶다. 그 애들도 나를 자랑스러워했으면 참 좋겠다. 아직도 글을 쓸 수 있는 기력이 있어서 행복하다."라고 시작하는 '책머리'를 보며 나 또한 '나를 자랑스러워 했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글을 읽을 수 있는 기력이 남아있음에 행복하다.
······ 나는 살아남았으니까 다른 인생을 직조할 수도 있었지만 내가 애초 꿈꾸던 비단은 아니었다. 내가 꿈꾸던 비단은 현재 내가 실제로 획득한 비단보다 못할 수도 있지만, 가본 길보다는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다운 것처럼 내가 놓친 꿈에 비해 현실적으로 획득한 성공이 훨씬 초라해 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옛일은 항상 아름답고 현실은 초라하고 힘들다. 하지 못한 일은 안타깝고 아쉽다. 그 일이 자신이 아니라 다른 이에 의한 것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과거를 돌아보며 후회해보아도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후회할 시간에 내일 좀 더 행복하기 위해서 무엇을 할까 고민하는 게 현실이 덜 초라하게 느껴질 것이다.
영화는 자투리 시간에 봐야 하는데 지금은 예약을 하지않으면 보기 어렵다. 요즘 영화를 보면 더 현실감이 있는 영화라고 말한다. 영화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라는 게 무슨 말일까.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니 현실에 현실에 더해 영화를 만든다. 선생도 이를 "기록영화도 아닌 극영화가 그렇게까지 현실을 복사할 필요가 있을까. 판타지도 없고 카타르시스의 욕구도 채워지지 않자 이상하게도, 아니 당연하게도 마음이 살벌해지는 걸 느꼈다."라고 했다.
선생은 "돌이켜보면 내가 살아낸 세상은 연륜으로도, 머리로도, 사랑으로도, 상식으로도 이해 못할 것 천지였다."라고 했다. '살아낸' 세상이 아니라 살아가는 이 땅에 지금 일어나고 있다. 머리로도, 사랑으로도, 상식으로도 이해하지 못할 것 천지인 세상.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