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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間/새로 나온 책

2014년 11월 4주 새로 나온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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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11월9일 밤. 독일 프랑크푸르트시 인근의 소도시인 '크로넨베르크'에서 유대교 회당이 불에 탔다. 그 날은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나치)의 기념일이었다. 1923년 히틀러는 뮌헨 중심가에서 '맥주홀 폭동'을 일으켰다가 11월9일 체포돼 투옥되었다. 그러나 제1차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을 옭아맨 '베르사유의 사슬(베르사유 조약)'을 끊자는 히틀러의 구호는 전국적으로 알려졌고, 이는 훗날 나치 집권의 기반이 되었다. 따라서 나치에게 11월 9일은 '해방절'이나 다름없었다.

크로넨베르크에서도 나치돌격대(SA) 예비군 중대원 20여명이 축하 모임을 갖고 있었다. 자정 가까운 시각에 유대교 회당을 불태우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예비군 중대장인 칼 슈벵케는 대원 4명을 데리고 모임터에서 떠났다. 새벽 1시25분. 자율소방대 부대장인 칼 클링겔회퍼는 집에서 전화를 받았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화재 현장에는 경찰관이 나와 있지 않았으며 SA 대원들이 상황을 통제했다. 회당으로 다가간 순간 기름 냄새가 훅 끼쳤다. 불은 여러 장소에서 일어난, 전형적인 방화였다. 그 밤에 화염이 타오른 곳은 크로넨베르크만이 아니었다. 독일 전역의 유대교 회당이 소멸했다. 독일 국민은 나치가 유대인에게 보내는 최후통첩을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 일상은 흘러갔다. 이듬해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해 제2차세계대전을 일으킨다.

"나치가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었다고 믿었다"

지은이는 미국의 언론인이자 교육가이다. 아울러 독일에서 태어난 유태인이었다. 그는 나치의 등장에 혐오감(미국인으로서), 부끄러움(독일계로서), 충격(유태인으로서) 등 복합적인 감정을 느꼈지만 언론인으로서는 '매혹'을 느꼈다. 왜 독일 국민이 나치라는 집단 광기에 빠졌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7000만 인구 가운데 전면에 나서 설친 자는 불과 100만 명 정도였다.

그는 1952년 프랑크푸르트 대학 객원교수 자격을 얻어 가족과 함께 독일에 건너와 인근 소도시에 자리 잡는다. 크로넨베르크는 실제 있는 도시 이름이 아니라 그가 산 곳에 붙인 가공의 이름이다. 거기에서 지은이는 예비군 중대장 슈벵케, 자율소방대 클링겔회퍼 등 평범한 독일인 10명과 '친구'로 사귄다. 전부 나치당원이던 그 친구들과 1년 동안 깊이 대화를 나누면서 지은이는 점차 그들의 내면에 존재한 나치즘의 실상을 하나하나 깨우쳐 간다.

그들이 나치당원이 된 이유는 다양했다. 나치야말로 조국을 위기에서 구할 수 있다고 믿은 이가 있는가 하면 누군가는 직장을 잃지 않거나 새로 얻으려고, 그리고 나치가 되어 곤경에 빠진 주위 사람을 돕겠다는 목적으로 입당했다. 선의 또는 사소한 이익을 지키려고 나치당원이 된 이들을 용서해야 할까. 그들은 하나같이 '작은 자'(소시민)였다. 부지런하고, 보통 정도의 지능을 가졌고, 정직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나치즘이 사악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들 모두는 심지어 히틀러가 도덕적으로 악하다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았다. 히틀러가 한 최악의 실수는 보좌관을 잘못 선택해 배반당한 일이었다(우리 역사에서 이승만·박정희 독재를 옹호하는 논리와 어쩌면 이리도 닮았는가!). 게다가 그들에게 나치 시대는 인생의 황금기였다. 지은이는 그 '부지런하고, 보통 정도의 지능을 가졌고, 정직한' 독일인 친구들에게서 진정으로 반성하는 목소리를 끝내 듣지 못했다. 나치 치하에서 행한 선택을 캐물을라치면 그들은 한결같이 되물었다.

"그런 상황에서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나치와 관련해 그들이 보여준 감정은 결국 후회 비슷한 무엇에 그쳤다. 그렇다고 독일인이 다 그런 것만은 물론 아니다. 지은이의 동료 교수는 1935년 자신이 세상을 상실한 경험을 들려준다.

'국민 총동원'에 관한 법률이 생긴 그 해 화학 전공자인 그 교수는 군수품 공장에서 일했다. 법에 따라 공장 측이 충성 선서를 요구하자 거절했다. 공장 측은 하루 더 말미를 주었다. 거듭 거절하면 일자리를 잃을 테지만, 그는 외국에 나가서라도 취업할 수 있는 전문가였다. 그는 고민 끝에 충성 선서를 했다. 주위에 돌봐야 할 친구들이 유태인을 비롯해 많이 있었다. 선서를 하고 직장을 지키면 나중에 그들을 도울 기회가 있으리라는 '이성적인' 판단에서였다. 실제로 제 아파트에 수배자들을 숨겨줘 여러 목숨을 구했다. 그런데도 그는 충성 선서를 한 순간 '세상을 잃었다'. 자신처럼 지배층에 있는 사람들이 선서를 거부하고, 이에 대중이 호응하면 나치의 광기를 막을 수도 있었으리라는 깨달음 탓이었다. 그는 "1935년 내 믿음이 강했더라면 그 모든 악을 방지할 수 있었다."고 참회했다.

'그들이 내게 왔을 때, 나 위해 말해 줄 이 아무도 없었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7년 후, 독일인들과 살며 그들의 속내를 파헤쳐 본 지은이는 당시 독일 국민 모두가 나치의 범죄에 공동 책임이 있다고 결론 짓는다. 그들은 갖가지 이유를 대며 가해자가 아니라 자신도 피해자임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들은 사소한 이익을 지키려고 공동체의 정의가 한 단계씩 무너져 내리는 걸 보면서도 외면했다. '법과 질서'라는 미명 아래 그들은 오히려 공감하고 동참했다. 그럼으로써 공범이 되었다. 마르틴 니묄러는 당시 독일에서 저명한 신학자이자 목사였다. 그는 나치 정권 초기에 히틀러와 독대해 종교계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내곤 한동안 나치의 정책을 지지했다. 그러다 뒤늦게 저항에 나서지만 체포돼 강제수용소에 수감된다. 그가 전후에 남긴 말은 구전되면서 여러 사람의 손으로 다듬어져 시가 되었다. 그 시는, 국가권력의 폭력이 정의를 무너뜨릴 때 인간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새삼 일깨워 준다.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했다
밀턴 마이어 지음, 박중서 옮김/갈라파고스

6900만 독일인은 평범한 악...나치의 공범이었다
나치’ 뒤에는 수천만 평범한 사람들의 참여가 있었다
나치 치하 독일국민은 왜 유죄인가
나치즘 비극 부른 대중의 동조와 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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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ㆍ부시가 집권한 암울한 시대에 청년 인구 집단 가운데 일부가 코베인의 펑크적인 세계관, 그의 연민과 불안, 그리고 줄어들고 있는 기회에 처한 한 세대에 깊이 공감했다.”(344쪽) 1990년대를 풍미했던 록 그룹 너바나에 대한 설명이다. 예술사회학의 시각으로 보자면 지당한 논의이겠으나 수용자 혹은 소비자는 간과하기 쉬운 관점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이른바 클래식 그리고 이른바 ‘좋은 음악’에 대한 근본주의적 논의를 펼치면서 “최고의 음악은 세상에 다른 음악은 없다고 우리를 설득하는 음악”이라는 논리를 펼친다. 책에서 고전음악과 팝에 대한 개괄은 필연적이다. 현재 고전음악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음악은 공허한 지적 우월감에 빠져 그것을 지나치게 숭배하는 속물적 엘리트주의자들 탓에 오늘날 죽은 음악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 지적은 진정한 창조성이 도리어 축출되는 현실을 겨눈다.

책의 미덕은 밑바닥에서부터 독자들과 함께 고민하고 함께 다그쳐 올라가는 서술 방식에 있다. 가장 기초적인 수준에서는 음악을 수용자와 생산자의 관점으로 통찰한다. 그런 점에서 포크 가수 밥 딜런과 클래식 작곡가 브람스가 동일 선상이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책이 저자 개인의 관점을 끝까지 견지하기 때문이다. “바로크를 완성시킨 주인공은 1970년대 하드록계의 거물 레드제플린이다. …(중략)…’신스 아이브 빈 러빙 유’에서는 출렁이는 바흐 풍의 오르간 연주가 교회의 느낌을 자아낸다.”(91쪽) 레드제플린이 바흐와 동렬에 오르는 순간이다. 그리고 “대중음악을 짓누르는 가식의 두려움과 고전음악을 짓누르는 천박함의 두려움을 모두 던져 버리고 원래 상태의 행복한 모습으로 복원된다”(242쪽)

작곡가, 지휘자, 피아니스트, 현악4중주단, 록밴드, 싱어송라이터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가들이 지극히 개인적이고도 참신한 시각으로 재구성된다.

책은 28세이던 1996년부터 뉴요커지의 음악비평가로 이름을 얻고 있는 저자가 10여 년 동안 기고한 글을 모은 것이다. 참신하고도 예리한 시각은 왜 그가 지금 미국 음악 비평계를 선도하는 거물이 됐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장르를 초월하고 세대의 벽을 뛰어넘는 무소불위의 필력으로 복잡하고 다양한 음악 세계를 통찰한다. 관련 웹 사이트에 들어가면 무료 청취 기회와 보다 자세한 설명이 주어진다.

리슨 투 디스
알렉스 로스 지음, 장호연 옮김/뮤진트리

펑크록을 들었다… 신념의 위기가 찾아왔다
"바로크는 레드 제플린이 완성" 장르 초월한 음악세계 통찰
아는 만큼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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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버지는 분명한 어조로 말씀하셨죠. 인생으로 배가 부르다고. 인생으로 지친 게 아니라, 그만하면 인생을 충분히 맛보았노라고. 인생에 곧 마침표를 찍고 싶다며 하신 말씀이세요. 제가 아는 아버님은 일단 결심하면 막을 수가 없는 분이시죠.”

아버지는 아흔을 맞은 뒤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는 결심을 아들에게 전한다. 아내는 먼저 죽었지만, 여자 친구가 있고 재산이 넉넉하고 건강에 큰 이상이 없던 아버지였다. 그는 죽음의 날을 미리 정하고 두 아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약을 들이켜 생을 마감한다. <죽음을 어떻게 말할까>는 그 아버지의 아들인 저자 윌리 오스발트(62)가 아버지가 ‘자유죽음’을 준비하던 한 해, 그리고 마지막 순간과 그 이후에 대해 담담히 기록한 책이다.

‘자유죽음’은 당사자가 온전히 자신의 정신을 의식하면서 적절할 때 스스로 결정한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말한다. 니체의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 ‘자유로운 죽음에 관하여’ 부분에서 비롯된 개념이다. 자살은 세상을 더 감당할 수 없다는 소극적 태도라는 점에서 자유죽음과 구별된다.

한 인간이 죽음을 맞는 방식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준다. 약을 마시기 직전 쓰다는 경고에 아버지는 말한다. “아, 괜찮아요. 인생에서 쓴맛은 충분히 보았소.” 아버지의 가장 친한 친구 셋은 모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합리적이고 책임감 강했던 아버지는 스스로 통제하는 삶과 죽음을 맞길 원했고 무엇이든 자기 희망을 실현하는 데 익숙한 남자였다. 그는 자유죽음이 주변 사람에게 부담을 안길까봐 괴로워하고 비겁함으로 해석되진 않을까 걱정하기도 한다. 2008년 사망한 윌리의 아버지 하인리히 오스발트(왼쪽 사진)는 스위스 기업의 전문 경영인으로, 스위스 군대 개혁위원회를 맡아 군의 현대화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받았다. 성공한 인생을 살았던 아버지는 나이 들어서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표본으로서 사회적 존경을 받았다.

죽음이란 무거운 주제를 다루지만, 저자 윌리가 겪은 시간 그대로를 적은 이야기는 극적이지 않다. 마음 뜨거워지는 부자의 정을 그린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윌리는 늙어 가는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애정은 물론, 거리감과 미움, 증오도 감추지 않는다. 죽음을 향해 가는 남자의 일상을 살피는 건 결국 그와 그 주변인들 삶과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과거를 돌아보는 일이 이제 내키지 않는 아버지와 달리 윌리는 그와의 과거를 자꾸 되살린다. 사회적 성공만큼 훌륭한 아버지는 아니었다. 형 마르얀과 윌리는 아버지의 잣대에 갇혀 항상 이렇게 살아도 좋은 건지 하는 회의와 불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윌리는 아버지가 돈을 주면 지폐 하나하나가 ‘너희는 인생을 다스릴 줄 몰라’라고 속삭이는 것 같아 수치스러웠다고 고백한다. 어머니는 쇼핑 중독에 빠져 있었다. 아버지는 죽음 직전까지도 정확한 재산 내역을 비밀에 부쳤다.

내내 멀어지기만 했던 부자는 늙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의존하면서, 함께 자유죽음을 준비하면서야 화해한다. ‘강인함과 지성, 능란한 언변으로 활기 넘치는 남자’라는 세간의 이미지 뒤에 감춰진 두려움과 연약함을 아버지는 말년에야 아들 윌리에게 내보인다. 늙어 갈수록 아버지는 야누스처럼 변했다. 사람들에게는 빛나는 얼굴만 보여줬지만, 죽기 전 족히 반 년간 아버지는 의욕과 체념 사이를 오가며 방황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그의 자유죽음을 마주하도록 아버지가 용기를 낸 것에 대해 윌리는 자랑스럽게 여긴다. 아버지가 죽음의 날을 정하고 임종을 맞기까지, 윌리는 자신의 아들들부터 아버지의 여자 친구, 형 마르얀, 간병인, 조력 자살 단체 관계자 등 죽음을 대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태도를 보여준다. 윌리는 죽음을 손놓고 기다리지만 말고, 가까워 오는 죽음에 대해 대화하는 것이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고 말한다. “죽어 가는 사람은 살아남을 가족을 지켜 주려 진실을 말해 주지 않는다. 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임을 알면서도 ‘곧 괜찮아질 거야’라는 말로 죽어 가는 사람에게 견디라고 부추긴다. 삶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마지막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거짓말을 하고 마는 것이다.”

죽음을 어떻게 말할까
윌리 오스발트 지음, 김희상 옮김/열린책들

이 가을, 늙음과 죽음을 사유하다
죽음을 어떻게 말할까
늙음 그리고 죽음…당신에겐 어떤 의미일까
아흔 살의 아버지는 자유롭게 죽음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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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란? 누구나 전적으로 홀로 소유하면서도 손에 쥐어지지 않는 것. 고통인 동시에 희망. 정밀하게 이해하려 하면 할수록 지성을 비웃으며 달아나는 실체 없는 실체. 그러면서도 우리 모두를 지배하고 있는 것. 그래서 우리는 종종 이렇게 중얼댄다. “시간 참 빠르다” 혹은 “세월 참 덧없다”.

늙어갈수록 시간의 무게는 더 무거워진다. 저자 장 아메리는 시간의 이 얄궂은 속성을 깨닫는 순간을 이렇게 표현한다. “돌연 수풀에 덮여 있던 과거의 무게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순간을 맞이하며 뒤통수를 얻어 맞은 양 화들짝 놀란다.” 아마도 그건 우리가 ‘늙었음’, 혹은 ‘늙어가고 있음’을 알아채는 찰나일 테다.

그렇다면 ‘늙어감’은 뭔가. 여느 때처럼 아침에 일어나 본 거울 속 내 얼굴, 유난히 눈가 주름이 확연하다. 손등엔 노란 반점이 늘었다. 새로운 모습은 아니다. 늙어감의 징표가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부정하고 부인하다 이제는 더 이상 인정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때 눈에 들어오고야 만다.

아메리는 그때의 감정을 분석해보려고 한다. ‘증오’는 너무 나간 표현이다. 늙음이 옳지 않은 건 아니니까. 아니면, ‘혐오’? 늙었다고 혐오까지 해서야 되겠나. 게다가 아직은 봐줄 만 한데. 그렇다면 ‘권태’는 어떨까. 그래, 인생은 더 이상 우리에게 베풀기를 거부하는 권태에 빠진 게다. 아메리는 “거울 속 자신에게 빠진 사랑은, 황홀함을 선물하는 사랑이 아니라 권태사랑, 곧 권태가 자신을 연민하는 나머지 그 사랑마저 깊은 권태에 사로잡힌 바로 그런 감정”이라고 설명한다. 인정과 부인, 그 속에서도 인간이 놓지 않는 본능인 나르시시즘까지 고려한 정의다.

이 대목에서 아메리의 서술은 인간의 심리를 적확하게 꿰뚫어 섬뜩하기까지 하다. “이 권태를 이루는 가장 강력한 요소는 자기소외, 곧 오랜 세월 동안 지녀온 젊은 나와 거울에 비친 늙어가는 나 사이의 불일치다. 그러나 (거울 속 나에게서) 소외를 느끼는 바로 그 순간, 거울을 응시할 뿐 화를 내지는 않는다. 이내 거울에 등을 돌린다. 화를 낸다면 이는 타인의 분노일 뿐이니까.”

‘늙어감에 대하여’는 아메리의 철학 사전이다. 시간, 노화, 죽음, 몸 등에 대해 자신만의 사유와 통찰로 얻어낸 정의를 풀어놨다. 아메리가 생각하는 죽음이란 뭘까. 그는 ‘근원적 모순’이라고 적었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부정을 포괄하는 ‘절대적 부정’이라는 얘기다. 어떤 것이 더는 존재하지 않음을 경험하는 게 죽음이라서다. 다시 말해 ‘나이 먹음’은 ‘존재하지 않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이처럼 냉정하리만치 객관적인 기술이 어떻게 가능할까 놀랍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경험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아메리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다.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가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한스 차임 마이어. 본명과 함께 조국도 버린 그는 벨기에로 건너가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다. 게슈타포에 체포돼 강제수용소를 전전하다 살아남았다. 그는 나치의 유대인 절멸을 알린 대표적인 증언작가이기도 하다. “나는 죽음이 아니라 죽어가는 게 두려웠다”는 책의 대목에서 고문을 당하며 그가 느꼈을 환멸과 고통이 어렴풋이 짐작된다. 그래서 ‘죽어가는 두려움’ 대신, ‘죽음’ 그 자체를 택한 걸까. 예순여섯이던 1978년 잘츠부르크의 한 호텔방에서 그는 수면제를 먹고 스스로 목숨을 거뒀다.

늙어감에 대하여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돌베개

몸이 쇠락하며 벌이는 축제
늙어가고 죽어가는 시간을 마주하기, 삶의 존엄을 위한 죽음의 성찰
홀로코스트 생존 작가가 쓴 노화ㆍ죽음에 대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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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화창한 6월 오후, 미국 혁신 컨설팅업체인 ‘파렌하이트 212’ 임직원들은 한자리에 모여 삼성이 만든 ‘반투명 액정표시장치(LCD) 스크린’ 시제품을 감상했다. 반투명 LCD는 스크린 너머를 보여주는 동시에 디지털 콘텐츠를 전달할 수 있는 투시형 유리 패널이다. 직원들은 이제껏 보지 못한 신기술에 환호하며 흥분할 무렵 ‘삼성 프로젝트’ 팀장이 일어나 벽에 ‘와우 멋있군. 그런데 그래서 뭐?(It’s cool. But so what?)’라고 쓰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게 삼성이 우리에게 던진 질문입니다. 답을 찾는 데 주어진 시간은 넉 달입니다.”

프로젝트팀은 수많은 사업 아이디어를 내놨고, ‘머니앤드매직(money & magic)’ 혁신 모델을 적용해 수개월간 조사와 연구, 토론을 거친 후 답을 제시했다. 상업 냉장·냉동고의 유리문을 대체하는 지능형 진열창이다. 삼성은 ‘반투명 LCD 지능형 진열창’을 2012년 국제 가전제품 박람회(CES)에 선보였고 그해 ‘최고의 혁신상’을 받았다.

‘파렌하이트 212’의 설립자이자 사장인 마크 페인은 《어떤 생각은 세상을 바꾼다》에서 이 회사의 핵심 철학인 ‘머니앤드매직’ 전략을 다양한 실제 사례를 들어 상세하게 풀어 소개한다. 10년 전 창업한 이 회사는 그동안 삼성 코카콜라 허쉬 스타벅스 씨티뱅크 P&G 등 대기업들과 협력해 혁신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왔다. ‘머니앤드매직’은 사업 초기 각종 혁신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겪은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혁신의 성공률을 높이기 위한 방법론이다. 저자가 직접 고안하고 다듬어 ‘기존의 혁신을 파괴하는 혁신 이론’으로 정립했다.

이 전략의 목적은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기업의 진정한 성장동력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전통적인 혁신 이론에서 분리된 두 가지 동력원인 ‘사용자 중심의 창의성(마법)’과 ‘성과 주도의 수익성(돈)’을 아이디어 구상 단계부터 서로 충돌시킨다. ‘수익성을 따지는 것은 창의성을 떨어뜨려 아이디어를 가두는 것’이란 통념을 벗어던진다.

이 회사는 프로젝트를 수행할 때마다 ‘돈’팀과 ‘마법’팀을 나눈다. 각자의 영역에서 얻은 정보를 공유하며 상호 협력과 비판을 통해 보다 큰 파급력을 가진 혁신 해법을 마련한다. 이렇게 해야 저자가 ‘유니콘’이라고 부르는 ‘겉모습은 화려하지만 실행이 불가능한 아이디어’를 일찍 제거할 수 있다. 이 책의 원제는 ‘유니콘을 죽이는 방법(how to kill a unicorn)’이다.

사용자 또는 소비자 중심의 혁신 과정에선 기업의 수익성을 고려하지 않은 다량의 ‘유니콘’이 등장한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채 유니콘들을 방치하면 실행과정을 더디게 만들고, 실패율을 높인다. ‘반투명 LCD’ 프로젝트에서 나온 다양한 유니콘들은 ‘돈’팀의 신속하고 면밀한 검토를 거쳐 조기에 하늘로 날아갔다. 그는 “기업에서 진행하는 중대한 프로젝트가 우리에게 맡겨지면 유니콘으로 분류돼 즉시 폐기되는 일이 많다”며 “프로젝트를 실제적인 성과로 보여주지 못하면 비용을 받지 않는 우리에게 ‘유니콘 죽이기’는 생존 법칙”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혁신을 소비자와 기업의 양면 문제로 간주하는 것이 성공률을 높일 수 있다고 강조한다. 훌륭한 양면 해결책의 사례 중 하나로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이 인천국제공항에서 겨울에 따뜻한 나라로 떠나는 여행객들을 위해 도입한 ‘외투보관 서비스’를 든다. 이 서비스로 여행객은 거추장스러운 외투를 해변까지 들고 다닐 필요가 없고, 항공사는 외투를 여객기 선반에 넣느라 우왕좌왕하는 상황을 피할 수 있다.

저자는 ‘시장의 니즈를 충족하면 회사의 니즈는 저절로 충족된다’ ‘돈을 버는 방법을 생각하는 일은 창의성을 저해한다’ ‘창의성은 성과에 대한 압박이 없을 때 가장 잘 발휘된다’ 등 창의성에 대한 속설의 위험성을 하나하나 파헤치며 기업들에 일반화된 혁신 관행을 꼬집는다. 그는 “대다수 시장이 포화 상태라 매출을 끌어올릴 혁신이 더 중요해진 지금도 수익과 관계없는 아이디어만 좇고 있다”며 “혁신의 높은 실패율을 당연시하는 태도도 문제”라고 지적한다. 이어 “혁신의 초기 과정부터 성과의 압박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기발한 아이디어가 결국 수익성 있는 비즈니스가 될 수 있다”며 “마법과 돈을 계속 동등한 위치에 놓고 이중 나선처럼 긴밀하게 결합시켜야 혁신의 성공률을 높일 수 있다”고 강조한다.

어떤 생각은 세상을 바꾼다
마크 페인 지음, 김태훈 옮김/위너스북

실용성·창의성에 경험까지… 3박자 맞아야 진정한 혁신
혁신은 어디서 오나…'어떤 생각은 세상을 바꾼다'
잘못된 '혁신'에서 벗어나다
화려하지만 실행 불가능한 아이디어는 상상 속 유니콘일 뿐…성공적 혁신 위해선 '유니콘'을 죽여라
삼성전자·코카콜라·스타벅스 혁신의 진원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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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말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개관할 당시 이런저런 말이 많았다. 박물관은 유례없이 짧은 시간에 엄청난 성장을 보인 한국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증언하겠다고 공언했으나 한쪽에서는 경제성장사에 치우쳐 민주화 역사를 제대로 담지 못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이 박물관의 성격을 두고 벌어진 논란은 한동안 계속됐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흔히 보는 풍경 중 하나는 전시실을 분주하게 오가는 초등학생이다. 관람객 중 누군가는 ‘초딩’이 만들어내는 박물관의 시끌벅적함이 마뜩잖을 수도 있다. ‘문화재 감상’이라는 게 뭔지를 알 리 만무해 보이는 꼬마도 꽤 많다. 이들에게 박물관은 ‘그저 놀이터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박물관은 기본적으로 문화재를 보관 · 전시하고, 연구하는 곳이다. 동시에 ‘집단기억’을 구체적인 문화재를 통해 증언하는 국민 정체성 형성의 통로이며, 역사 해석을 둘러싼 팽팽한 긴장이 감도는 현장이다. 또 누군가에게는 그저 쉼터일 수 있다. 이처럼 박물관은 다양한 면모를 가진다. 책은 기존의 역할을 뛰어넘어 새롭고 다양해진 모습으로 일상 속으로 파고든 박물관의 기원과 발전 방향을 탐색한다.

애초 박물관의 소장품은 왕가 혹은 부유층의 컬렉션이었다. 비슷한 계급의 사람이 폐쇄적으로 감상하던 대상이었다. 유럽에서 근대적 박물관이 생기며 대중이 유물 감상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였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은 대중 참여의 폭을 급격하게 넓혔다. 이때부터 박물관 향유는 대중의 권리가 되는데, 정체성을 형성하고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가야 한다는 필요성 때문이었다. 하지만 박물관은 “경비에 의해 삼엄하게 감시되고 있어 몹시 찾기 어려워” 여전히 불편한 곳이었다. “박물관의 진정한 이용객은 지식인과 예술가들, 즉 소수의 특권계층”에 한정된 상황이었다. 19세기의 고전적 박물관은 “한 국가나 공동체의 상징과도 같은 것”으로 변모했다. 박물관의 소장품은 해당 공동체의 한 부분을 특징짓거나 대표하는 것들이었다. 관람객에게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이때 시작됐다.

20세기 박물관의 주요한 변화 양상 중 하나는 관람객의 수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보관하는 박물관’에서 ‘보여주는 박물관’으로의 변화였다. 당연히 관람객의 편안한 동선 구성이 고민거리로 등장했고, 전시실 내부의 색, 질감, 조명은 물론 박물관 외부 환경의 조성과 접근성의 관리까지 신경을 써야 했다. 뉴욕현대미술관의 건축가 필립 굿윈의 말을 빌리면 박물관은 이제 “백화점처럼 쇼윈도를 갖추어 행인이 밖에서 컬렉션의 일부를 언뜻 보고서 한번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해야 하는” 곳이 됐다. 과거의 유물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재를 담아내야 한다는 인식도 싹텄다. 지식인들의 전유물처럼 되어버린 역사를 대중에게 전달하는 공간으로서 박물관은 주목을 받았다.

프랑스 파리1대학 교수인 저자는 수세기에 걸친 박물관의 변화 양상을 추적하며 과거에만 머물지 않고 변화의 흐름이 어디로,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에 관심을 쏟았다. 박물관을 하나의 문화공간으로만 보지 않고 거시적인 시선으로, 문화적 현상으로 조망한 것이다.

한국어판을 내며 집필의 배경을 따로 밝힌 것에서 한국 독자에 대한 배려를 읽을 수 있다. 비슷한 주제를 다룬 다른 책을 소개하고 있고, 원서에는 없는 다양한 이미지 자료를 배치해 이해도를 높이려 한 점이 눈에 띈다.

박물관의 탄생
도미니크 풀로 지음, 김한결 옮김/돌베개

박물관은 살아있다 진화하니까
박물관 수준, 소장품이 아니라 테마가 결정한다
예술과 일상을 넘나드는 박물관
20세기 박물관은 ‘정치체제 선전도구’
18세기 박물관은 귀족 전유물이었다
박물관, 과거 공간인가? 현재 공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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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리아의 씨앗은 인류, 특히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등 열대 빈국의 국민을 끈질기게 괴롭히고 있는 두 개의 전염병에 관한 이야기이다.

말라리아는 '인류의 천형'이라고도 불리는 대표 전염병이다. 말라리아 기생충에 감염된 얼룩날개모기가 인간 몸에 붙어 피를 빨 때 모기의 침샘에 저장돼 있던 가느다란 기생충을 사람의 피에 주입하면서 시작된다. 말라리아 기생충이 알제리에 파견된 프랑스 육군 의사에 의해 처음 관찰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34년 전인 1880년의 일이다. 이후 70년가량 수많은 학자의 헌신과 열정, 시행착오로 질병의 원인과 매개충, 감염 경로 연구가 이뤄졌고 지금은 질병의 기제가 속속들이 밝혀졌다. 충분한 자원만 주어진다면 완치할 수 있는 항말라리아 약물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그럼에도 21세기 현재 최소 2억5000만 명이 말라리아에 걸리고 있으며 250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있다. "불필요한 죽음이다." 저자는 개탄한다.

칼라아자르증이라는 질병도 다르지 않다. 인도 아샘 지방 말로 '검은(칼라) 병(아자르)'이라는 뜻의 이 전염병은 흡혈 플레보토무스 모래파리가 리슈만편모충이라는 기생원충을 사람에게 옮겨 일으키는 질병이다. 칼라아자르가 인간을 처음 공격한 것은 1824년, 스코틀랜드 출신 병리학자이자 군인인 윌리엄 부그 리슈만이 이 병으로 사망한 환자의 비장에서 기생충을 발견한 것은 1900년이다. 1940년대 창궐했던 칼라아자르증은 1965년 들면서 거의 잊히는 듯했으나 1972년 인도 바이샬리 지방에서 재유행하기 시작, 지금은 인도 방글라데시 네팔 등지에 재토착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연간 130만 명이 새로 감염되고, 3만여 명이 사망하는 무서운 질환이다. 그러나 이 역시 아직 치료제는 없다.

혜성에 로봇을 보내고 식물과 동물의 유전자 조작까지 하는 눈부신 생명공학의 발전에도 발견된 지 100년이 훨씬 넘은 질병을 아직도 퇴치하지 못해 수백 수천만 명의 목숨이 오늘도 위협받는 사태에 이르게 된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저명한 기생충학자이자 현장 연구가인 저자는 치료제 개발에 앞장서야 할 서방 세계의 의과학자와 제약회사에 화살을 돌린다. 이윤이 남는 약만 만들어 파는 제약업계는 저소득 지역 주민이 앓고 있는 질병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언론을 장식하는 휘황찬란한 연구들은 연구실 안에만 있을 뿐이고 현장에서는 구경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서아프리카의 에볼라 사태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저자는 풍부한 제3 세계 현장 경험과 실험실 연구 경험을 바탕으로 실험실 안의 과학과 현실에서의 과학 사이에 얼마나 큰 괴리가 존재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1980년대 미국 국제개발처의 말라리아백신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이 실질적인 연구 성과는 없이 천문학적 연구비만 받아 가로챈 부패 스캔들은 '황우석 사태'를 겪은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무엇보다 진짜 악당은 부패한 과학자가 아니라 이들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하지 않은 기성 과학자의 침묵이라는 일침이 아프다.

말라리아의 씨앗
로버트 데소비츠 지음, 정준호 옮김/후마니타스

전염병 매개체 밝히는 데 38년 걸린 까닭
전염병에 얽힌 현대과학의 성패
기생충과 싸우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인간사회의 추악함
전염병으로 보는 인간 사회의 민낯
말라리아가 퇴치 안 된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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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여전히 자본이다.’ 이 책의 문제의식은 이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저자인 데이비드 하비(79)는 마르크스주의 지리학과 경제학의 대가라는 평을 듣는다. 마르크스주의에 공간적 사고를 통합한 그는 세계화, 제국주의, 환경문제, 사회정의 등 마르크스주의에서 미완의 작업에 해당하는 지점에서 독창적인 사유를 펼쳐왔다. 마르크스주의의 여러 분파 중에서도 유연한 축에 속한다는 평도 나온다. 다작의 저술가인 그의 책은 국내에도 여러 종 번역·출간돼 있는데 현재 유통되는 것은 약 7종이다. 이번에 번역된 <자본의 17가지 모순>은 올해 초 영어로 출간됐던 하비의 가장 최근작이다.

첫 문장부터 의미심장하다. “위기는 자본주의 재생산에 필수다. 자본주의의 불안정성은 바로 이 위기 속에서 드러나 그 형태가 수정되고 재가공된 뒤 새로운 버전의 자본주의를 낳는다.” 이렇게 위기를 기회로 환골탈태하는 자본주의의 모습은 물리적 경관의 대규모 재편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노동계급의 주거지는 재개발된다. 소규모 경작지와 작은 공장도 자취를 감춘다. 매끈한 외관의 대규모 산업단지, 상업구역, 도매창고, 물류센터 같은 것들이 교외의 아파트 타운을 가로지르면서 고속도로 인터체인지와 연결된다. 크고 화려한 복합단지들의 경쟁이 가속화되면서 마치 국제공항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메가쇼핑몰도 등장한다.

한데 자본주의의 새로운 확장은 물리적 외형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사고와 이해, 제도와 지배이데올로기, 정치적 충성과 절차, 정치적 주체성, 기술과 조직 형태, 사회 관계,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문화적 관습과 취향의 극적인 변화”로 이어진다. 그렇게 자본은 점점 크고 세련된 외형으로 변모하면서 더 막강해진다. 인간의 삶, 어쩌면 영혼까지도 송두리째 지배한다. 하비는 말한다. “우리는 이 새롭게 출현하는 세상의 난잡함에 대해 의견을 개진하기도 하겠지만 결국은 억압이나 동의를 거쳐 새로운 상태에 적응해야 한다.”

그래서 다시, 문제는 자본주의다. 물론 언제부턴가 자본 중심적 연구는 심지어 좌파 진영에서조차 외면받아 왔다. 하지만 하비는 단호하다. “자본 축적의 경제적 엔진이 현재의 위기와의 관계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해석과 이론들을 ‘자본 중심적’이라고 일축하는 것은 근시안적 태도다. 자본 중심적 관점이 없다면 우리는 주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오독하고 오역하게 될 것이다. 잘못된 해석은 잘못된 정치로 이어진다. 사회적 고통을 경감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심화하는 결과를 몰고 올 것이 확실하다.”

하비는 책에서 자본의 열일곱 가지 모순을 추출하고 이를 기본 모순, 움직이는 모순, 위험한 모순으로 나눠 설명한다. 예컨대 가치(사용가치, 교환가치), 화폐, 사유재산, 자본주의 국가, 노동, 분업, 독점과 경쟁 등 마르크스 <자본론>의 주요 토픽이자 자본주의가 기능하는 데 없어서는 안되는 기본적 내용들을 현재의 사례들과 함께 설명한다. 읽는 입장에서는 두번째로 거론한 움직이는 모순에 좀 더 눈길이 간다. 지리적 경관, 스펙터클, 정보, 기술, 비물질 노동, 대중문화, 소셜미디어 등 우리 시대의 첨예한 사회·문화적 현상을 논평하고 있다. 마지막 위험한 모순에서는 복률 성장의 한계, 자본과 자연의 관계를 논하면서 자본이 지구라는 생태계 자체를 위험하게 만들 것이라는 진단으로 나아간다.

하비는 인간의 삶을 둘러싼 총체적 난국의 주범이 자본이라는 사실을 확언하면서 위기에 대한 우리의 실천을 주문한다. 그는 자본이 스스로의 모순 때문에 자체적으로 붕괴할 것이라는 입장에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하지만 그는 “자본이 새로운 형태로 재구성되는 혼란스러운 과도기의 국면”이 또 다른 실천의 기회라는 사실을 역설한다. “사회를 지금과 다른 모습으로 재구성하고자 하는 사회운동들이 심도 있는 질문을 던지고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국면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명확해지는 저자의 의도처럼 보인다.

마지막 문장은 선언적이다. “전 세계 대중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정확한 표현대로 ‘무관심의 세계화’에 맞서, 파농의 재치 있는 표현처럼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겠다는 결심을 하고, 자신의 머리로 생각을 하면서 잠자는 숲 속의 공주 놀이를 중단’해야 한다. 우리가 살펴본 대로 자본 안에는 흥미진진한 모순들이 많으며 우리는 여기서 수많은 희망의 근거를 찾아낼 수 있다. (…) 모든 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본과 그 모순에 맞선 투쟁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서는 이해관계들 간의 동맹이 반드시 필요하다.”

자본의 17가지 모순
데이비드 하비 지음, 황성원 옮김/동녘

소비에 놀아나지 말고 사용가치 중심 경제로
자본의 모순 속에 기회도 있다
우리 삶이 팍팍한 이유는? 데이비드 하비 ‘자본의 17가지 모순’
모순투성이 자본, 그 모순의 틈새에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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