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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間/술 사주는 읽고쓰기

고전은 읽지 않는 것보다 읽는 것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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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은
연구하는 사람 외에
그 누구도 읽지 않는 책일 뿐이며,
진정한 과거의 지에 대한 총체는
최신 보고서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고전이
읽히지 않는 이유는 (결코 읽지 않는 게 아닙니다)
저 하늘의 별만큼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고전은
무언가에 유용하기 때문에 읽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사실은  
고전은 읽지 않는 것보다 읽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고전이란
옛날에 만든 것이지만,  
지금 보아도 현대적이고 신선한 것입니다.
 
고전을 읽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 시대의 인물과 시간을 살아볼 수 있습니다.
 
옛사람과도 벗이 되고
그 시대의 거대한 시간을
살아보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하나는  
현대에 맞게 새롭게 해석하여  
오늘 문제의 실마리를 찾는 데 있습니다.
 
역사를 읽는 이유와 다르지 않습니다.
과거는
현재와 미래의 디딤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멀리 떨어진 시대,  
우리와 사뭇 다른 문화와 사유의 소산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읽게 되면
전보다 더 많이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결코 지나간 시대의 유물이 아닙니다.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힘을 지닐 때에만 고전이 된다.  
그리고 그러한 힘은 재해석을 통해서 드러나며,  
재해석은 늘 해석자의 구체적인 체험,
현재의 삶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거기에 담겨 있는 힘이
재해석을 통해 용틀임을 할 것이고,  
그 힘은
우리에게 필요한 통찰력을 줄 것입니다.
 
결국, 고전을 읽는 목적은  
오늘날의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를 찾는 데 있다.  
고전이 고전인 까닭은  
바로 끊임없는 해석의 연속에 있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늘 새롭게 해석될 여지가 있어서 고전인 것입니다.  
그럴 여지가 없다면,  
그것은 고전이 아니라,  
그저 ‘오래된 책’으로서 고서古書일 뿐입니다.
가치는 ‘지금 여기를 사는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고전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집니다.
새로운 해석을 통해서.  
그리고 새로운 시대마다 거듭 새롭게 해석되면서
오래도록 고전의 명성을 누립니다.
새롭게 해석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고전이 아닙니다.
죽은 자의 찌꺼기로 남을 따름입니다.
 
고전은,  
어린이는 그것을 손안에 가지고 있고,  
젊은이는 그것을 읽으며,  
어른은 그것을 이해하고,  
노인은 그것을 두고 찬양합니다.
세련된 전문가를 위한 특별한 작품이 아니라  
모두가 어떤 식으로든 자기 것으로 느낄 수 있는 작품입니다.
 
내가 읽지 않은 책은
이 세상에 없는 책입니다.
내가 아직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는 내가 읽어보지 못했으므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톨스토이도 다른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그 책을 읽어야 합니다.
내가 한 권의 낯선 책을 읽는 행위는  
곧 한 권의 새로운 책을 쓰는 일입니다.
 
민주사회란
여러 가지 의견이 존재하는 사회입니다.
시민이란
타인의 의견과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과 다른 의견을
존중하고 그것과 함께 사는 사람입니다.
시민은 책을 읽는 사람입니다.
시민이 책을 읽지 않으면 우중愚衆이 됩니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내밀한 정신의 쾌락을 놓치는 사람일 뿐 아니라,  
나쁜 시민입니다.
 
어제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모습으로 살고 싶다면,  
갑작스러운 인생의 위기에
흔들리고 싶지 않다면,  
매일 조금씩 꾸준하게 책을 읽어야 합니다.
독서를 시작했다면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이미 변화는 시작되고 있습니다.
삶의 고비를 넘는 지혜는 책이 줍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이 생각하는 고전으로
채운 서가를 만드는 것뿐입니다.  
이 서가의 반은
읽은 책과 의미 있는 책으로,  
그 나머지 반은
읽을 책과 의미 있을 책으로 채워집니다.  
또한,
우연한 발견과 경이를 선사할 책을 위해
빈 책장도 마련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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