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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부고」 - 죽음조차 앗아갈 수 없는 우리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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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부고」 - 헤매고 찾고 기다린 끝에, 세상을 향해 내놓은 기억


회장, 교수, 대표, 장관, 이사장…. 부고 기사에 등장하는 이들은 대개 이런 직함을 갖고 있다. 한국일보 엑설런스랩이 기획한 「비로소, 부고」는 세상을 떠난 보통 사람을 다룬 프로파일이다. 평범하지만 보통이 아니었던,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고인의 사연에 주목해 보자. —편집자 주


무언가 빠뜨린 것 같은 기분이 계속 들었다. 기부, 참사, 교통사고, 빈곤 등 몇 가지 사회 이슈에 대한 기초 취재를 진행하던 취재팀은 연일 현기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회의 테이블에는 몇몇 인물의 이름이 놓여 있었다. 생각할수록 그의 온 생애가 궁금해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은 이들이었다. 다만 각자의 이야기를 어떤 실로 꿰려 해도 어쩐지 억지스럽게 느껴졌다. 예닐곱 개의 콘텐츠 기획안이 고심 끝에 등장했다 수첩 안으로 고이 접혀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온갖 ‘기획 취지’와 ‘시리즈 명’을 썼다 지우며 멀쩡한 수첩 수십 장을 내버린 뒤, 고민 끝에 취재 착수의 1차를 받기 위한 회의에서 문제의 발제가 나왔다. “아예, 각 회차를 사람 이야기로 쓰면 안 될까요? 사건 탐사 못지않게 아주 제대로 취재하겠습니다. 본격 인물 탐사 부고로요. 생각해 본 제목은 「비로소, 부고」인데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담당 부장이 침묵 속의 고민에 빠진 찰나의 순간 ‘말을 괜히 꺼냈나?’ 라는 후회 속에 뒤이어 쏟아낼 ‘발제의 변’을 속으로 곱씹었다.

“언론이 여러 사회 시스템 탐사에 집중하는 것은 꼭 필요하고 귀한 일이지만, 그사이 정작 주목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와 생애가 너무 많아요. 생각해 보면 우리가 꼭 남기고 싶은 것은 ‘사람’ 이야기이고요. 느린 부고로 제대로 취재해 쓰면 기존 부고와는 확실히 차별점이 있을 것이고요. 한국 언론은 부고를 제대로 혹은 충분히 다루지 못한다는 고질적 지적을 받아 왔잖아요. 이참에 스스로 대안을 행하는 것이죠. 게다가 여기는 덜 알려진 해외 인물들을 다루는 <가만한 당신> 시리즈로 부고의 새 지평을 연 한국일보잖아요? 이젠 국내 편을 할 때도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엑설런스랩은….”

“괜찮긴 한데.” 부연할 준비가 더 길어지기 전에 침묵은 깨졌다. 다행히 부장의 침묵은 ‘일단 찬성’에 가까웠다. 다만 크고 작은 우려가 서로에게서 쏟아졌다. 사람 기사는 실제론 아주 공들이거나 어렵게 취재했다 하더라도, 쉽게 취재했다는 오해를 받기 쉽다는 점 등이 고민으로 떠올랐다. 무엇보다 엑설런스랩은 한국일보 내에서 혁신, 실험, 도전해야 하는 과업을 받았는데, ‘누구나 이미 할 수 있고 해내고 있는 쉬운 길’을 가려 한다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컸다. 애써 취재해 쓰더라도 유명하지 않은 분들의 생애 이야기를 누가 왜 그렇게 집중해서 읽겠냐는 고민도 컸다. 여러 걱정에 대한 대안이 필요했다.

「비로소, 부고」는 유명하지 않지만 위대한 이웃들의 생애사를 다룬다.



대통령, 교수, 장관 너머

우선 아주 유명한 분들을 써야 할까? 기존 부고 보도 현황부터 파악했다. 최근 2년간 9개 종합일간지 매체가 보도한 부고 기사 전수를 분석 대상으로 했다. 부고 기사 등은 각 매체 형식도 다르고 ‘부고’, ‘별세’, ‘빈소’, ‘유족’ 등의 특정 단어를 포함하고 있더라도 다른 목적의 보도물인 경우가 많아 이를 하나하나 추려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관련해선 학계 논문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까닭이 이해됐다. 다행히 데이터사이언스 석사 학위를 가진 본보 분석가, 황수현 기자가 함께 팔을 걷었다. 수차례 사전 회의와 약 3주간에 걸친 데이터 전처리를 거듭했고, 관련 통계와 텍스트 전문을 확보했다.

이를 다각도로 분석했고, 한국 언론의 부고 보도가 매년 통상 국내 사망자(약 35만 2,700명)의 약 0.07%의 별세만을 다루고 있는데, 특히 고인의 직위와 업적 중심으로 △대통령 △회장 △교수 △대표 △배우 △가수 △감독 △장관 △작가 △총리 △이사장 등의 별세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유독 ‘대통령’이라는 단어가 압도적으로 많이 등장했는데, 이는 유명하지 않은데도 대통령이 조의를 표했거나 대통령과의 인연이 강조되는 인물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최빈 등장 단어들과 함께 언급된 연관어 및 연관 정도의 분석을 통해서는 부고에서 주로 △명예 △재직 △졸업 △최초 △발전 △마련 △연구 △경영 등의 연관어가 언급되는 등 고인의 표면적 직위와 학술 및 경영에 관련된 눈에 보이는 업적만을 보도해 왔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과를 눈으로 보고 나니, 더욱 마음은 ‘평범한 이들’에 쏠렸다. 유명인 부고는 우리 말고도 아주 많은 매체에서 훌륭히 써내고 있거나 쓸 예정으로 보였다.

2023~2024년 9개 중앙일간지 부고 기사에서 자주 언급된 단어 중 ‘대통령’을 제외한 워드 클라우드를 추출했다.


프로파일과 내러티브

‘고인의 주변을 꽤 샅샅이 돌아본다면 보통의 인물들 부고도 남다르게 읽히지 않을까?’ 첫 실마리는 프로파일(profile)에서 보였다. 프로파일, 즉 인물 탐사는 자기 진술인 인터뷰가 아닌 제3자 진술을 통해 팩트를 입체적으로 검증하고 객관화하는 방식을 말한다. 고인 곁을 지켰던, 그리고 고인을 그리워하는 지인들의 취재를 통해 고인의 생애를 복원한다면 인물의 다차원성과 복합성을 발견할 수 있는 데다,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인 삼각확인의 원칙에 충실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됐다. 한국 언론은 많은 경우 당사자 인터뷰를 기사화하는 일에는 매우 탁월하지만, 한 인물을 집중 조명하기 위해 다수의 관련자에게 촘촘히 팩트체크를 하는 프로파일 방식으로 취재, 보도하는 일은 드물다. 발품을 판 프로파일에 충실하는 것만으로도 한국일보가 엑설런스랩에 기대하고 있는 하나의 혁신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두 번째 실마리는 내러티브(narrative)였다. 아무리 충실한 프로파일을 하더라도, 읽히려면 보도의 작법이 남달라야 했다. 지금까지는 궁금하지 않았던 인물의 이야기도 몰입해 읽을 수 있도록 내러티브 방식으로 작성하기로 했다. 뉴스 스토리의 주인공이 압도적인 유명인이 아니어도 독자의 몰입을 끌어낼 수 있으려면 장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역피라미드의 압축된 육하원칙 기사로는 다룰 수 없는 인간의 본질이나 사회의 본질을 다룰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허공만 바라보다

그렇게 맨땅에 헤딩을 시작했다. 이미 꼭 다루고 싶은 인물 몇 분이 있었지만, 혹시 모를 누락을 피하기 위해 다룰 인물을 다시 찾아 헤맸다. 우선 최근 3년간 별세한 최대한 많은 분의 기록을 검토했다. 전국 및 지방 단위 신문, 통신, 방송은 물론 각종 공보물, 게시판 등을 통해 단순 부음 알림부터 사고 기사, 장례 정보, SNS, 서적 등을 검토했다. 의미 있는 삶의 흔적이나 팩트체크의 여지가 있는데도 비교적 간단히 보도된 것으로 보이는 28명의 별세자를 기초 취재했고, 유족, 동료, 제자 등을 수소문해 유족의 동의 의사를 확인하고 나섰다.

인물 선정에는 처음 각오처럼 새로운 기준을 적용했다. △가능하면 우리 주변의 보통 사람일 것 △이름이 알려져 있더라도 더 기록돼야 할 이야기가 묻혀 있는 경우 △충분히 기록됐을 때 누군가에게 인생 교과서로 기능할 수 있는 경우 △부고를 다루는 것만으로도 우리 사회의 못다 푼 과제를 꼬집을 수 있는 경우 △갑작스러운 이별로 주변 후배, 제자 등의 아쉬움이 크거나 △인품이 훌륭하고 성과도 있는데 겸손한 성정 등 탓에 매스컴 노출이 적은 경우 등을 찾으려 했다. 미처 자서전까지는 남기지 못하고 떠난 이들에게 축소판을 선사한다는 생각도 해봤다. 이미 많이 다뤄졌지만 새로운 시선에서 다룰 수 있거나 몰랐던 이야기를 꺼내 올 수 있다면 그런 분도 포함했다.

그렇게 본격 취재가 시작됐지만, 고인이 모두 저명인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생전 재직 회사, 소속 기관 등의 기록이 있더라도 유족을 찾는 일 자체가 쉽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빈소에 화환을 보냈던 분들을 수소문해 묻기도 하고 인쇄소, 식당, 빌라, 노동조합, 학교 등 고인이 자주 출입했던 장소를 배회하기도 했다. ‘이 방식이 맞을까’라는 회의가 드는 순간도 많았지만, “이분의 뜨거웠던 삶과 황망한 별세를 꼭 좀 다뤄달라”는 이웃들의 이야기를 마주할 때마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비로소, 부고」 기사 페이지에는 별도 플랫폼 작업이 들어갔다. 여타 보도와 달리 댓글창 대신 ‘헌화 하기’와 ‘추모 댓글’ 달기 기능이 노출된다. 댓글 입력란에도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와 같은 가이드 문구가 흐른다. 고인의 명예훼손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물론 이렇게 어려운 노력 끝에 만난 유족이 긴 고민 끝에 반대 의사를 전해오면 그 즉시 취재를 멈췄기에 책 한 권 분량의 취재를 하고도 보도하지 못한 사연도 많았다. 유족은 취재팀이 ‘보통 사람들의 부고’를 심층 취재하겠다는 설명을 건네면, 그간 쌓인 미디어에 대한 불신을 털어놓기도 하고, 악성 댓글 등에 대한 부담감을 피력하며 고민 끝에 반대 의사를 전하고 연락을 끊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긴 취재가 물거품이 된 날이면 오후 내내 허공만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정반대로 긴 고민 끝에 취재에 나서줘 고맙다고 눈물짓는 취재원도 있었다. 물론 이렇게 어렵게 취재에 응한 가족이라 할지라도 고인의 삶을 프로파일로 복원할 만큼 많은 정보를 알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관련 인물을 수소문해야 했고, 비단 보도물에 직접 충분히 인용하지 못하더라도 사실 검증, 사진 확보 등을 위해 전국을 헤매기도 했다. 실제 보도로 이어진 다섯 고인의 사연을 취재하기 위해 취재팀은 약 3개월 동안 전국에서 수소문한 42명을 심층 인터뷰했다. 보도에 직접 활용하지 않은 경우를 포함하면 전국(서울, 인천, 여수, 사천(삼천포), 울산, 대전, 세종, 화성, 김포, 남양주, 수원, 통영, 거제, 성남, 오산, 평택)에서 만난 전체 인터뷰이는 보도물에 실명으로 담긴 수의 2배를 웃돈다.

**다섯 이야기를 적다**

두 달쯤 취재를 거듭하다 보니, 취재팀 사이에는 ‘딱 한 명만 더’라는 하나의 공통 공식이 등장했다. 다들 ‘고인의 지인을 벌써 일고여덟이나 취재했나? 이쯤 하면 다 아는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는 순간, 혹시나 싶어 한 명만 더 취재를 거듭하다 보면 반드시 “아! 이분을 취재하지 않고 기사를 썼더라면 큰일 날 뻔했다”는 생각을 안고 서울의 사무실로 돌아오게 된 것이었다. 의사자 곽한길 씨에 대한 예상 밖 핵심 증언을 들려준 인터뷰이는 취재 중 여덟 번째로 만난 고인의 군 동기였다. 그는 유족들도 고인의 생전에 세세하게 다 전해 듣지 못했던 당시의 기억을 취재팀에게 들려줬다. 탈시설 장애인 활동가 김진수 씨 일기장은 취재원 중 열한 번째로 만난 이가 건네줬다. ‘이 정도면 충분할까’ 싶은 찰나, 고인의 일기장을 소중히 간직해 온 뜻밖의 동료를 만난 상황이었다. 취재 윤리를 감안해 많은 내용을 공개할 순 없었지만 취재팀은 이 자료로 ‘딸들을 함께 키우지도 못한 아버지’의 슬픔을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씨줄과 날줄을 엮어 다섯 이야기를 완성했고, 지난 2월 4일부터 하루씩 다섯 이야기가 보도됐다. 첫 보도 당일까지도 ‘과연 이게 맞을까’ 싶은 불안이 계속됐다. 다행히 독자 반응은 호평이 주를 이뤘다. 본보 웹페이지와 포털 사이트에서 독자들은 “모처럼 기사다운 기사를 봤다”, “많이 울었다, 알려주셔서 감사하다”, “기록해 주셔서 감사하다”, “선물 같은 기사다”라는 평을 주었다.

무엇보다 언론계 내에서 인상적 피드백을 많이 받았다. 한 타사 매체 기자가 보낸 한 통의 이메일은 취재팀을 감동시켰다. 그는 “항상 국내 신문에서 아쉬웠던 지점은 오비추어리(obituary, 사망기사)였는데 외신이 부럽다고 느낄 뿐, 지면에 어떤 기사와 제목으로 실체화해야 할지 깊게 고민하거나 행동하지 못했는데 그런 치열한 고민의 결과물을 한국일보에서 만나게 돼 부끄럽고, 부럽고, 감사하다”고 적었다. 찰나의 침묵 끝에 여러 조언을 건넸던 부장도 격려 편지로 지난 속내를 고백했다.

“「비로소, 부고」를 취재하고 싶다고 했을 때 전율이 밀려왔습니다. ‘바로 저거야!’ 하면서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만, 겉으로는 ‘이게 적합한 주제일까?’ 라고 하면서 딴지를 걸었던 기억이 납니다. 진심이 아니었습니다. 집요한 취재, 취재원에게 신뢰를 얻는 과정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는 타 부서의 부장으로 자리를 옮기고도 최근 누구보다 자주 취재팀에게 “다음 편은 언제 나오느냐”고 묻는 중이다.

시리즈 전체를 소개하는 리스트 페이지에는 여러 독자의 기리는 마음을 모아 각 댓글의 내용이 흐르도록 하고 있다. 애도의 마음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공간이다.


 
이제 한국일보에는 느린 부고를 다루는 두 연재가 존재한다. 2014년 시작된 해외 편 「가만한 당신」은 덜 알려졌기에 더 알려져야만 하는 사람의 이야기다. 세상에서 가장 더디게 쓰는 부고. 인권과 자유, 차별 철폐와 페미니즘, 조력 자살, 동성혼 법제화 등을 위해 우리보다 앞서 헌신했던 인물의 느린 부고를 전한다.

2025년 시작된 국내 편 「비로소, 부고」는 우리 곁에 머물렀던 보통 아닌 보통 사람의 이야기로 고인을 기리는 기억을 마주한 뒤 비로소 써 내려간 프로파일이다. 이들 시리즈를 통해 독자와 ‘죽음조차 앗아갈 수 없는 우리의 이야기’를 함께 읽으며, 인생의 난관을, 나아가 언론의 난관을 극복하는 길을 찾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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