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의 남다른 부고기사 제작기 - ‘터부’에서 ‘뉴스’로 진화하는 부고 기사
이름과 사망일, 장례식장과 발인 일시 등이 간략하게 소개되는 부고 기사. 그러나 이 짧은 글에 한 사람의 일생을 담을 수는 없다. 최근 일반적인 부고 기사에서 벗어나 고인의 삶을 보다 상세히 기록하고자 하는 시도가 늘고 있다. 그중 하나인 세계일보 부고 기사의 제작기를 소개한다. —편집자 주
“미리 죽음을 예측하면 불길한 결과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장례식 계획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지 않다.”
1965년 1월 중순 90세 고령인 윈스턴 처칠 전 영국총리의 임종이 임박했을 때 ‘처칠 장례식에 조문 대표로 누굴 보낼 것인가’라는 주한 미국대사관의 질의에 우리나라 외교부가 내놓은 답변이다. 당시 미 국무부는 세계 각국에 나가 있는 대사관에 ‘주재국이 처칠 별세와 관련해 외교적으로 어떤 대책을 세우고 있는지, 또 조문 사절단장의 급은 어느 정도로 생각하는지 등을 한 번 알아보라’는 지시를 내려 보냈다. 미국의 목적은 아마도 국가원수가 직접 조문하는 나라가 몇이나 되는지 파악하는 데 있었던 듯하다.
주재국의 답변이 속속 국무부에 보고되는 가운데 ‘죽음을 예측해선 안 된다’는 취지의 한국 정부 반응은 가장 독특한 부류에 속했다고 한다. 영국 역사학자이자 처칠 연구 권위자인 존 램스덴(John Ramsden) 교수는 국내에 번역·출간된 책 『처칠: 세기의 영웅』(2004)에서 이 에피소드를 거론하며 한국과 비슷한 내용의 답신을 한 나라로 라오스가 있다고 소개했다. 이들 나라의 문화에서 죽음이란 그게 현실이 되어 닥칠 때까지는 절대 입 밖에 꺼내선 안 되는 일종의 ‘터부’였던 셈이다.
처칠의 타계는 영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신문 「더타임스」의 오래된 편집 관행조차 바꿔놓았다. 램스덴 교수는 책에서 “더타임스는 처칠의 사망 기사를 1면에 넣음으로써 수세기에 걸쳐 지켜온 전통(‘부고 기사는 1면에 넣지 않는다’)을 포기했다”고 적었다. 1785년 창간된 더타임스가 거의 200년 가까이 1면에 부고를 싣지 않는 원칙을 고수한 이유도 따지고 보면 죽음을 터부시한 옛 사람의 태도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급속도로 변했다. 이제 우리는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사들의 타계 소식을 신문 1면에서, 그날의 가장 중요한 ‘뉴스’로 접하는 데 익숙한 시대를 살고 있다. 유명인이 별세했을 때 이를 1면부터 다룰지, 아니면 인물 동정 등을 전하는 피플면에 비중 있게 넣을지 신문사 내부에서 치열한 토론이 벌어지는 건 흔한 광경이 됐다. 종이신문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인터넷판을 발행하며 예전 같으면 지면 제약 탓에 고인과 유족 이름, 빈소, 발인 일시정도만 겨우 단신으로 실릴 수 있었던 것도 이제는고인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장문의 부고 기사로 탈바꿈하고 있다.
사망, 별세, 타계, 서거 표현 신중해야
2021년 노태우, 전두환 두 전직 대통령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과거 노무현·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이 별세했을 때 대다수 언론은 ‘서거(逝去)’라는 표현을 썼다. 필자가 기자 생활을 하면서 접한 죽음을 뜻하는 용어 가운데 단연 최고의 높임말이다. 하지만 공보다는 군사 반란, 민주화운동 유혈 진압 등 과가 더 많았던 노태우·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서거란 단어를 붙이긴 어려웠다. 필자가 속한 신문사를 비롯해 ‘별세’ 정도로 제목을 뽑은 곳이 많았다. 고인에게 비판적인 일부 언론사는 그냥 ‘사망’이라고 했다. 이들은 호칭도 ‘노 전 대통령, 전 전 대통령’ 대신 ‘노씨, 전 씨’라고 불렀다.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장례 기간 여러 신문사에 항의 전화가 쇄도했던 모양이다. 어떤 독자는 “전두환, 노태우가 그래도 엄연히 일국의 대통령을 지낸 분인데 사망이 뭐냐. 당연히 서거라고 해야지”라며 분통을 터뜨렸다고 한다. 반면 “쿠데타 주역이 무슨 전대통령이냐. 노 씨, 전 씨로 쓰면 충분하다”고 버럭 화를 낸 독자도 있었다고 한다. 한국처럼 굴곡 많은 역사를 지닌 나라의 언론사 기자라면 피할 수 없는 숙명이 아닐까 싶다.
영어권 국가의 경우 훌륭한 사람이든 그렇지 않든 부고 기사에는 ‘사망했다(died)’라는 중립적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2020년 미국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Ruth Bader Ginsburg) 전 연방대법관이 타계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고 기억된다. 당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현직 대법관의 별세 소식을 기자한테 처음 듣고선 “그분이 방금 사망했다고요(She just died)?”라고 되묻기도 했다.
물론 영어에도 사망의 높임말은 분명히 존재한다. 저명한 인사가 별세했을 때 미국 대통령이나 백악관이 공식적으로 내놓는 애도 성명에는 ‘돌아가셨다(passed away)’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그 명사형은 다름 아닌 ‘패싱(passing)’이다. 한때 우리 사회에서 누구를 따돌리거나 무시한다는 뜻으로 ‘○○○ 패싱’이란 용어가 널리 쓰였고 종종 신문 기사의 제목으로 뽑히기까지 했다. 물론 당시에도 한국인만 알고 외국인은 못 알아듣는 ‘콩글리시’라는 비판이 거셌지만 패싱의 진짜 의미를 감안한다면 절대 함부로 써선 안될 말이다.
좋은 부고 기사의 전제는 ‘기록’과 ‘정리’
얼마 전 음식점에서 식사하다가 우연히 옆 테이블에 앉은 손님의 얘기를 듣게 됐다. 중년 여성 4명이 일행이었는데 그중 한 명이 털어놓은 사연이 독특했다. 그는 아들만 5명인 집안의 며느리라고 했다. 자식이 많다 보니 매년 누군가는 홀로 된 시어머니의 생일을 꼭 기억해 한 번도 빠뜨리지 않고 잘 챙겼는데, 어느 해인가 그만 아들과 며느리 도합 10명이 모두 까맣게 잊고 그냥 지나쳐 버렸다는 것이다. 뒤늦게 이를 깨닫고 가족 사이에 아주 난리가 났다고 한다. 장남은 동생을, 맏며느리는 동서를 각각 소집해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자’고 굳게 결의했다. ‘내년 생신에는 정말 제대로 잘 모시자’는 다짐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이듬해 생일이 되기 전 시어머니는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부고 기사가 다루는 대상은 대개 유명인이다. 고인은 평범한 삶을 살았어도 유족 중에 크게 출세하거나 그럭저럭 사회에서 자리 잡은 분이 있으면 그래도 ‘○○○씨 별세’로 시작하는 한 줄짜리 부고는 나오게 마련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그냥 유족이 지인한테만 알려 조용히 장례를 치르는 게 일반적이다.
우리가 부고를 보고 빈소에 가면 먼저 부조부터 하고 유족과 간단히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조문을 마치는 것이 보통이다. 고인이 누구고 어떤 삶을 살았느냐보다는 지인의 부친상, 또는 모친상을 잘 챙김으로써 사람으로서 도리를 다하는 것에만 관심을 갖는 경향이 있다. 어떤 이들은 속된 말로 ‘눈도장 찍다’라는 표현으로 이 같은 우리네 장례 문화를 비판하곤 한다.
지금은 대체로 유명인에게만 국한된 부고 기사가 조금 더 보편화한다면 빈소의 풍경도 많이 달라지지 않을까 한다. 필자는 얼마 전 어느 고인의 유족으로부터 감사 이메일을 받은 적이 있다. 과거 차관보급 공직까지 지낸 분인데 한 줄짜리 부고 외에 상세한 기사는 나온 게 없어서 필자가 이것저것 검색을 한 뒤 고인의 삶을 개략적으로 정리한 기사를 썼다. 유족은 이메일에서 “부친상을 당해 망연자실한 가운데 앉아 있는 우리 남매들이 그나마 그 기사를 읽고 아버지의 생애를 떠올리며 이런저런 추억을 나눌 수 있었다”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따지고 보면 이 세상의 모든 고인, 모든 유족 중에서 애틋한 사연이 없는 분이 누가 있을까. 다만 평소에 기록으로 남겨두지 않고, 또 이런저런 자료는 있어도 그걸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시간이나 기술이 없어 놓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좋은 부고 기사가 나오려면 그 전에 ‘기록’과 ‘정리’가 선행돼야 함을 새삼 깨닫는다.
때로는 고인의 ‘기수’에서 단서를 찾는다
한 줄짜리 부고를 접하고 그것을 토대로 자세한 기사를 쓰고 싶어 여기저기 검색을 해봐도 도무지 고인이 어떤 분이었는지 파악할 길이 없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 고인이 속한 어떤 특정한 집단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한국 사회의 특징을 일컫는 용어 중 하나가 바로 ‘기수 문화’다. 학교에는 입학 동기, 군대에는 입대 동기, 정부 기관이나 기업에는 입사 동기가 있다. 필자만 해도 지금 다니는 언론사 내부에선 ‘공채 ○○기’라는 정체성으로 묶여 있다. 그러다 보니 망자 개인에 관한 정보가 부족할 때 고인이 속한 특정 기수가 부고 기사 작성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한다.
어느 날 짧은 부고 기사 한 건이 눈에 띄었다. 유족이 누구고 빈소가 어디며 발인이 언제라는 내용 말고는 고인이 어떤 분인지 알려주는 정보가 없었다. 아니, 딱 한 가지 있긴 했다. 바로 ‘육사 ○○기’였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면 직업군인이었을테고 기수를 대충 따져보니 6·25전쟁 참전용사일 가능성이 컸다. 육사의 해당 기수에 관한 정보를 검색하는 한편 그 기수의 유명 졸업생, 즉 이름만 대면알 만한 동기생으로 누가 있는지 찾아봤다. 과거 신문 기사 검색 서비스를 통해 의외로 많은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고인이 속한 기수가 6·25전쟁 초반 계급도 없이 북한군과 싸웠으며 1950년 7월에야 비로소 소위 계급장을 달고 장교로 임관했다는 것, 자연히 동기생 상당수가 전투 도중 전사했다는 것, 육군에서 준장까지 진급한 고인이 전역 후에는 기업을 경영했다는 것 등이었다.
이런 내용을 토대로 부고 기사를 작성했다. 제목을 그냥 <○○○씨 별세>라고 달 수도 있었으나 6·25전쟁 참전용사, 그리고 장성급 지휘관에 대한 예우를 감안해 <○○○ 장군 별세>라고 붙였다. 얼마 후 유족에게서 연락이 왔다. 기사에 고인이 마지막으로 재직한 부대 명칭을 기재했는데 이것이 계기가 돼 지금도 남아 있는 해당 부대와 유족 간에 연락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유족은 “덕분에 고인의 유품 가운데 해당 부대와 관련이 깊은 기념물들을 따로 모아 부대 역사관 측에 기증할 수 있었다”며 각별히 고마움을 표시했다. 필자로서도 큰 보람을 느낀 순간이었다.
지인의 부고를 쓰는 아픔만은 피했으면
부고 기사를 쓰는 기자가 망자와 지인 관계일 가능성은 낮다. 평균수명이 많이 늘어난 반면 취재 현장의 기자들 연령대는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기 때문이다. 1990년대에 국무총리를 지내고 은퇴한 전직 공직자를 2020년대에 총리실을 출입하는 젊은 기자가 누군지 알긴 힘든 것이 당연하다. 솔직히 ‘어릴 때 얼핏 이름은 들어본 적 있다’는 정도의 반응만 나와도 대단한 일일 것이다.
물론 예외도 있다. 연차가 높고 취재 경험이 풍부한 기자가 “그분은 내가 잘 아는 분이니 직접 부고를쓰겠다”고 나선다면 해당 기자만이 아는 에피소드까지 포함해 아주 의미 있는 기사가 나올 법하다. 또 하나는 안타깝게도 망자의 나이가 그리 많지 않은 경우다. ‘아직 떠날 때가 아닌데’ 싶은 분이 돌아가셨다면 그와 친분이 있는 기자 입장에선 부고 기사를 쓰는 게 아주 고통스러운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필자는 기자 생활을 하며 두 차례 인터뷰를 한 어느 법조인이 60살도 되기 전 별세했을 때 그 부고 기사를 작성한 경험이 있다. 명문대 법대를 졸업하고 앞날이 촉망되는 검사로 일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불우한 처지의 청소년을 돕는 사회운동가로 변신한 분이었다. 법조계 지인을 통해 건강이 별로 좋지 않은 듯하다는 얘기를 전해 듣기는 했으나 막상 타계 소식을 접하니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을 느꼈다.
두 번 나눈 장시간의 대화 때문에 그분의 생애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또 그 결과물인 인터뷰 기사가 그대로 남아 있으니 부고 기사 작성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그렇게 좋은 분이 이렇게 일찍 가시다니’ 하는 비통함에 가슴이 아파 그날 하루 내내 몹시 우울했었다. 인터뷰 때 필자는 ‘검사로 출세할 수 있었고 퇴직 후에도 변호사 일에만 전념하면 큰돈을 벌 텐데 왜 사회운동에 매달리느냐’는 취지의 질문을 던졌다. 그분의 대답은 이랬다.
“요즘 우리 사회는 너무 경쟁적이에요. 다들 죽어라 앞만 보며 내달리죠. 천상병 시인이 ‘귀천’에서 노래한 것처럼 인생은 소풍입니다. 세상으로 소풍을 와서 재미있게 놀다가 때가 되면 하늘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경쟁심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괴롭히며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고 있어요. 더 큰집, 더 넓은 땅, 더 좋은 자동차가 행복을 가져다주는 건 아니거든요.”
이 발언은 부고 기사에도 그대로 인용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이런 기사는 정말 다시는 쓰고 싶지않다고. 요즘은 평균수명이 워낙 길다 보니 ‘호상(好喪)’이란 말을 잘 안 쓰기도 하지만 기실 호상이란게 어디 있겠나. 필자가 아는 많은 사람, 또 필자를 아는 몇 안 되는 지인이 부디 필자가 기자로 일하는동안 쓰는 부고 기사의 주인공이 되는 일이 없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한국언론진흥재단 전체기사
이름과 사망일, 장례식장과 발인 일시 등이 간략하게 소개되는 부고 기사. 그러나 이 짧은 글에 한 사람의 일생을 담을 수는 없다. 최근 일반적인 부고 기사에서 벗어나 고인의 삶을 보다 상세히
www.kpf.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