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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사태를 바라보며 : 아름다운 부자 이종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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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련의 삼성관련 기사를 보면서 깨끗한 기업이라고는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그 정도가 도를 넘고 있다. '부를 누리기 위해 돈을 좇은 것'은 잘못된 것이며 '부를 베풀기 위해 집요하게 돈을 좇'는 것으로 일생을 보낸 이종만의 꿈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자본주의에서 돈을 쫓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고 아름다운 일이다. 부의 축척의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평가는 달라지고 마음가짐도 달라질 것이다. 삼성은 - 아니 삼성만이 아니고 지금 재벌이라고 불리는 모든 그룹들은 - 부의 축척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 생각해 볼 일이다.

일하는 사람은 다 같이 잘살자.

흔히 존경할 만한 부자가 없다고 푸념하지만, 사실은 존경할 만한 부자가 없는 게 아니라 존경할 만한 부자를 기억하지 못할 뿐이다.

일하는 사람이 잘사는 사회를 꿈꾸며 구십 평생을 헌신한 이종만도 그중 한 분이다.

북한 애국열사릉에 묻힌 유일한 ‘자본가’, 그가 도전한 최후의 실험

금광왕 이종만

이종만이 묻혀 있는 평양의 애국열사릉
그는 이 묘지에 묻힌 유일한 자본가 출신 인사다.

1885년 울산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의 삶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러일전쟁이 발발한 1904년, 약관의 나이에 지혈제 옥도정기(沃度丁幾. 요오드팅크)의 원료로 사용되는 미역을 매점했다가 조기에 종전되는 바람에 첫 실패를 맛본 이후, 어업, 임업, 광업 등 갖가지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손대는 일마다 족족 실패했다.

27전 28기
1937년 쉰세 살의 나이로 '금광왕'에 등극할 때까지 이종만은 33년간 무려 스물 일곱 번이나 실패를 맛보았다.

그는 조선에서 가장 큰 광업 회사인 '대동광업 주식회사'를 설립한 이후 본격적으로 공익사업에 착수했다.
27번 실패하면서도 28번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가슴속에 품은 꿈 때문이었다. 이종만은 대동광업에서 해마다 나오는 엄청난 이익금을 쏟아 부어 교육과 문화 그리고 자영농 육성 사업을 왕성히 전개했다.

1937년 5월12일, 경성 남산정(남산동) 천진루여관에서 대동광업(大同鑛業)주식회사의 창립을 알리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천진루여관으로 향하는 기자들은 자본금 300만원(현재 가치로는 대략 3000억원), 광구 면적만 4억평에 달하는 거대 금광회사의 창립 기자회견이 조선호텔이나 철도호텔 같은 특급호텔이 아니라 허름한 일본식 여관에서 열리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더욱이 새로 출범하는 대동광업의 대표취체역(대표이사)은 바로 전날 영평금광을 동조선(東朝鮮)광업주식회사에 155만원을 받고 매각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금광왕 이종만이었다. 그러한 금광 졸부가 자신들을 허름한 여관으로 불러들이는 것은 사람을 대놓고 무시하는 것 아니냐는 게 기자들의 은근한 생각이었다.

자영농 육성을 위해 이종만은 '대동농촌사'라는 재단법인을 세우고 수확물의 7할을 농민이, 3할을 재단이 가지도록 했다. 30년 뒤에는 농민이 수확물 전부를 가지는 대신 토지 소유권만은 재단이 갖게 했다. 농민에게 소유권을 양도하지 않은 이유는 농민이 일시적 충동으로 토지를 저당 잡히거나 팔아서 다시 소작인으로 전락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재단이 거둔 3할의 소작료는 토지를 늘리는 자금으로 사용했다. 그런식으로 조선 토지를 몽땅 사들이면 농민 전체가 자영농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사람들이 '이종만이 더 큰 부자가 되지 못한 것은 조선의 크나큰 불행'이라고 말한 이유가 그 때문이다.

그는 부를 독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를 베풀기 위해 집요하게 돈을 좇았다. 그에게 돈은 이상을 실현하는 도구였기에 해방 이후 자본가 신분임에도 '노동자의 나라'를 표방한 북한으로 자진 월북했다. 그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과 조국통일 민주주의 전선 의장을 지냈고, 광업부 고문으로 활동하다가 1977년 아흔세 살을 일기로 사망해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이종만은 부를 누리기 위해 돈을 좇은 것이 아니라 부를 베풀기 위해 집요하게 돈을 좇았다. 돈은 이상을 실현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종만은 자본가 신분에도 ‘노동자의 나라’를 표방한 북한으로 자진 월북했다.

1938년 이종만은 대동광업주식회사, 대동광산조합, 대동농촌사, 대동출판사, 대동공업전문학교 등 ‘대동콘체른’이라 불린 총 5개 거대 사업체의 수장이 되었다. 대동광업주식회사에서 나오는 수익을 바탕으로 영세 광산 지원, 자영농 육성, 신문화 보급, 과학기술 전문가 양성 등 20대에 사업을 처음 시작하며 가슴속에 품었던 꿈을 차례로 실천에 옮겼던 것이다.

"일하는 사람은 다 같이 잘살자."

이종만은 이 단순한 경영철학으로 사업체의 생산성을 극대화할 수 있었고, 추가이익을 노동자들에게 배분하여 자신이 사심 없는 경영자임을 확인해주었다. 그러나 이종만에게나 조선에나 축복이었던 ‘대동콘체른’ 역시 이전 28번의 사업이 그랬던 것처럼 끝내 실패로 돌아갔다. 다섯 개의 거대 사업체 중 수익을 창출하는 기업은 대동광업뿐이었는데, 그것만으로 나머지 사업체에서 천문학적인 숫자로 발생하는 적자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1940년 대동광업의 부채는 500만원에 달했고, 대동공전은 교사 신축자금이 부족해 사채까지 끌어 썼다. 경영실적이 극도로 악화된 가운데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대동콘체른’은 차례로 붕괴했다. 1942년 부채액이 800만원까지 늘어나 이미 파산상태였던 대동광업은 1943년 총독부의 금광 강제정리사업 과정에서 해체되었고, 같은 해 대동출판사는 대동공전 경비마련을 위해 매각되었다. 1944년 대동공전은 평남도청이 인수하여 공립으로 전환되었다. 평양공업전문학교로 간판을 바꿔 단 대동공전은 광복 후 평양공업대학, 김일성대학 공학부를 거쳐 김책공업대학으로 이어졌다.

참조 : 금광왕 이종만의 ‘아름다운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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