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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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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땅의 메마른 사상 지평 넓힌 전환시대의 지식인, 리영희 리영희(李泳禧), 1929년 12월 2일~2010년 12월 5일리영희(81). 5일 타계한 그는 한국 민주화운동사에서 이름 석자로 통하는 몇 안 되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기자·교수·사회운동가 등 여러 직함이 있지만 ‘지식인’이란 호칭이 어울리는 삶을 살았다.1970∼80년대는 그의 시대이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을 필두로 대한민국의 산업화가 속도를 내던 시절, 대한민국의 다른 한 축을 이루는 민주화운동 진영에 리영희가 있었다. 기자 출신의 대학 교수였고, 가진 것은 펜밖에 없었지만, ‘약한 펜’으로 군사독재의 ‘강한 벽’을 허무는 데 앞장섰다. 네 번의 해직, 세 번의 투옥을 겪었다. 고통이었지만 영광이기도 했다. 여기까지는 우리 현대사에 그가 기록해 놓은 공적으로 평가된다.한국 현대사의 명암고인의..
주머니에 단돈 5천원…법정 안팎의 의인 백기완 - 한승헌 백기완(白基琓), 1932년 1월 24일~2021년 2월 15일추모글 _ 한승헌 변호사21일 오전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에서 열린 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삼우제에서 유족들이 절을 하고 있다.고인이 되신 백기완 선생이 겪은 수난 내지 박해엔 법정이라는, 일반에 알려지지 않은 특수 공간을 빼놓을 수 없다. 따라서 변호인인 나는 증언자의 소임까지도 염두에 두어야 할 때가 있다.박정희의 폭주가 끝날 줄 모르자 대학가 반정부 시위가 격화됐고, 1973년 12월엔 마침내 함석헌·윤보선 등 지도급 인사를 망라한 ‘개헌청원운동본부’가 장준하, 백기완의 주도 아래 ‘유신헌법 폐지 100만 인 서명운동’에 돌입했다.박 정권이 최악의 위기를 벗어나려는 대증요법으로 긴급히 내놓은 조치가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였다. ..
1927. 11. 27. 김수영 2011. 11. 27. 서울 1927년 11월 27일 서울 종로 김수영.1968년 6월 16일 종로 청진동에서 마지막 술자리 후 서강 종점 김수영. 죽은 사람의 생일은 없는 거라 했으니 오늘은 아무 날도 아니다. 이 세상을 살다간 어떤 이가 세상에 나온 날이다. 모든 실험적인 문학은 필연적으로 완전한 세계의 구현을 목표로 하는 진보의 편에 서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모든 전위 문학은 불온하다. 그리고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문화의 본질이 꿈을 추구하는 것이고 불가능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어령과의 불온시에 대한 논쟁의 일부분이다.68년이나 2011년 지금도 불온함은 존재해야 한다. 그들의 불온한 노래가 멀리 울려 퍼져야 한다. 김수영의 시적 주제는 자유이다.그는 자유를 시적 시적, 정치적 이상으로 생각하고, 그것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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