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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을 등한시 한 나의 독서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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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새벽(나에겐 새벽이다. 6~7시경)에 케이블 TV를 보다가 <인문학열전>이라는 대담 프로그램을 보았다. 석영중 고려대교수와의 대담이었다. 주제는 그(녀)가 쓴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를 가지고 나눈 이야기였다. 너무 좋은 프로그램이었다. 왜 이런 프로그램은 꼭두새벽에 하는 것일까?

우리에게 너무 잘 알려진 도스토예프스키의 삶과 문학에 대하여 나눈 이야기는 많은 새로운 것을 알게 해 주었다. 인생은 5분의 연속이다로 알고 있는 그는 '언제나 돈이 부족했다'고 한다. 도박에 빠진 십년의 세월은 더욱 더 그러하였다. 너무나 궁핍한 생활은 한 그 이기에 작품에도 그것이 배어나와 있다.

대담을 보고 언젠가 읽었을(? 지금은 읽었는지 조차 기억이 나지않는다. 아마도 읽었으리라 기억된다.) '죄와 벌', '카라마조프 형제들'을 다시 보고 싶어졌다. 많은 독서에 관한 책들이 '고전읽기'를 권하고 있다. 하지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신문을 읽는 이유와 유사할 것이다.

요즈음 나의 독서 아니 책읽기가 당장 필요한 - 이것 또한 나의 조급증에 기인한 것이다. 경제, 경영, 자기계발서 등등에서 만족을 얻고자 하는 자기 마스터베이션에 불과하다. 알고 있지만 그것을 쉽게 버리지 못하고 있다. - 것만 보고 있다. 소설도 눈에 잘 들어 오지않고 읽혀지지 않는다. 물론 소설뿐이 아니라 '미학'관련, 인간과 그에 관한 美에 관한 책은 더욱 더 그러한다. 철학을 말할 것도 없다. 고전을 처세에 빗대어 읽고 있다. 한심한 행태다.

고전을 읽지않고 다시말하여 인간을 바라보지않고 인간에 대한 책을 본다는 자체가 모순이다. 올해 남은 얼마간의 기간에 고전을 읽음에 할애하여야겠다.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언제나 돈이 부족했다. 투르게네프, 톨스토이, 곤차로프는 모두 넉넉한 지주계급 출신이었다. 성공을 원하는 마음이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떤 작가든 다 마찬가지겠지만, 그래도 그들은 돈 문제로 전전긍긍하지 않으면서도 집필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중산층 부모에게 물려받은 약간의 재산은 일찌감치 다 써버린지라 달랑 펜 하나만 들고서 돈을 향한 고달픈 경주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는 날마다 줄기차게 써댔다. 단 한 푼의 원고료라도 더 받으려고 벗어진 머리를 굴려가며 열심히 펜을 휘둘렀다. 집필이라기보다는 노동에 가까웠다. 돈이 걸려 있었기 때문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글을 썼다. 러시아에서건 유럽에서건, 좌우간 언제 어떤 상황에서건 글을 썼다. 전천후 작가란 괜한 말이 아니다. 그러나 놀라운 필력이니 작가적 역량이니 하는 꿈같은 이야기는 하지 말자. 그는 생존을 위해 써야만 했다. 그는 밥을 먹기 위해, 자식들에게 옷을 사주기 위해, 빚을 갚기 위해, 채무자 감옥에서 여생을 보내지 않기 위해 써야만 했다.

그런데도 돈이 모이기는커녕 빚만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 저자의 말

덧붙임_2008.10.07

프로그램은 KTV의 <인문학열전>이라는 프로그렘이다. 내가 본 프로그램은 도스토예프스키와 돈 - 석영중(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이다.

기획의도

인문학(Humanities)에는 분명 인간(Human-being)이 있다.
『인문학 열전』은 동시대를 사는 인문학 거장들이 말하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볼 수 있는 장이자, 인문학적 사고와 상상력의 세계로 안내할 바이블이 될 것이다.
인류와 함께 시작한 인문학, 오래된 건축물을 복원하듯 이 고귀한 인문학은 『인문학 열전』을 통해 재탄생하고, 인문학 고유의 순수성을 잃지 않으면서,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실용’과 ‘통섭’을 조금씩 더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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