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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間/돈 안되는 정치

더 이상 박노자를 읽지 못한다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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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아니지만 한동안 이권우의 글을 텍스트의 하나로 받아드리려 했다.
작년에 읽은 <죽도록 책만 읽는>에는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에 대한 글이 있다. 나도 파란 눈을 가진 한국인이 가진 시각의 다양성에 존경을 표한바 있다.(다양성의 나라, 평등한 나라를 위하여, 니네들의 대한민국)

이권우는 박노자의 이 책을 신문 사설의 이야기로 풀어간다. ("박노자 또는 등에" 261쪽)
"답답한 마음에 박노자라면 어떻게 말했을까 궁금했는데..."

박노자는, 일찍이 소크라테스가 말한, '등에'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스스로 진보주의자라고 여기는 이들도 미처 눈치채지 못한 '마음속의 파시즘'을 그이는 정확하게 지적한다. 그리고 진정한 세계시민으로서, 한 개인이나 국가의 경제적 풍요가 또 다른 개인이나 국가의 희생을 밑거름으로 삼고 있음을 밝혀낸다. 오랜 진보운동의 대가로 경제적으로 넉넉하면서도 정치적으로 민주적인 사회를 이룬 노르웨이를 바라보는 그이의 눈이 그러했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이들이라면, 현실과 쉽게 타협하지 않고 늘 정진하고 있는, 박노자를 읽어야 할 일이다.


지금도 박노자를 꼭 읽어야 할까.
박노자가 진보신당 비례대표 6번이다. 만일 당선이 된다면 정치인이 된다. 정치인이 되어서도 글을 쓸 수 있을까. 이권우의 바램과는 다르게 박노자의 글을 더 이상 읽지 못한다 하더라도 진보신당 6번 박노자가 국회의원이 되기를 기대한다. 박노자를 비롯한 진보신당 국회의원들은 "등에처럼 이 (척박한) 나라에 달라붙어 있게 하여, 여러분을 깨우되, 하루종일 어디나 따라가서 곁에 달라붙어 설득하고 따지기를 그치지 않게" 할 것임에 틀림없다.

이권우의 말을 빌려 다시 말하면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이들이라면, 현실과 쉽게 타협하지 않고 늘 정진하고 있는, 박노자"가 국회의원이 되어야 할 일이다. 그것은 간단하다. 정당투표를 진보신당에 하면 된다. 간단하고 명료한 일이다.

덧_
고종석의 칼럼을 보고 비례대표를 2년씩 번걸어가며 하기로 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3번까지 당선되면 된다. 지지율이 얼마인지 궁금했는데 5%라고 한다. 쉽지는 않지만 불가능한 숫자도 아니다. 모두 진보신당에 투표하면 된다.
 

등에

등에는 파리목 등에과에 속하는 곤충들이다.

저는 신이 이 나라에 달라붙게 한 사람입니다. 마치 몸집이 크고 혈통이 좋지만 그 큰 몸집 떄문에 좀 둔한 말을 깨어있게 하려면 등에가 필요한 것처럼 말입니다. 신은 저를 마치 이 등에처럼 이 나라에 달라붙어 있게 하여, 여러분을 깨우되, 하루종일 어디나 따라가서 곁에 달라붙어 설득하고 따지기를 그치지 않게 한 것이 아닌가 저는 생각합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덧붙임_
고종석의 박노자 생각이다. 늘 스크랩하는 이유의 핑게지만 한두 해가 지나면 링크가 여러 이유로 깨져 읽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문제가 된다면 삭제하겠지만 변방의 블로그에 시비를 걸지 않으리라는 막연한 기대로 스크랩한다.

그간 고종석의 의견에 동조했다. 하지만 이 글은 동조할 수 없다. 좌파라 인지되는 또는 진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는 얼치기 부르조아를 좌파로 오독한 것은 아닐런지. 정체성이 분명한 우파나 보수주의자들이 문제가 아니라 진보라 포장하며 중도를 내세우는 그들이 더 큰 적이다. 협력과 타도의 대상을 모호하게 만들어 전선을 혼란시킨다.

+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학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는 박노자 교수가 진보신당 비례대표로 이번 4·11 총선에 출마한다. 학자·논객 이미지가 강한 박 교수가 현실정치에 뛰어드는 것이 그 자신에게 잘된 일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더라도 그의 출마 결심 뒤에는 진보신당 지도부의 강한 요청이 있었던 모양이고, 그 당 당원으로서, 또 좌파 지식인으로서 그가 어렵사리 내린 결단이었을 테니 우선 반기는 게 좋겠다.

나는 박 교수의 글을 남김없이 섭렵하지는 못했으나, 그의 초창기 글부터 최근 글까지를 관심과 애정에 떠밀려 그럭저럭 따라 읽어왔다. 배운 것이 많다. 그의 전공인 한국 고대사와 관련된 글들만이 아니라 그가 정기적으로 쓰는 정치평론을 읽으면서도 내 지적 게으름을 깨닫곤 했다. 그런데 그의 초기 정치평론에 크게 공감했던 내 눈에 요즘 그의 글에선 관점의 이동이 관찰된다. 초기 글에서 그는 미국 민주당 좌파 정도에 견줄 만한 리버럴이었으나, 요즘 글에서는 완연한 사회주의자다. 박 교수의 생각에 그간 변화가 있었던 건지, 아니면 그가 초기엔 제 생각을 명확히 드러내지 않다가 요즘 와서 자기주장을 또렷이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는 그 자리 그대로인데, 내가 그의 글을 오독한 탓에 그의 관점이 변했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요즘 박 교수의 글을 읽노라면 마음이 좀 불편하다. 비록 자본주의가 많이 망가져 있기는 하나 그것을 잘 수리해서 쓰면 되겠거니 생각하는 보수주의자에게, 자본주의 자체를 근본적 악으로 여기고 그 이후를 도모하는 그의 견해는 너무 까칠까칠해 보인다. 심지어 위험해 보이기도 한다. 자본주의를 때려 부수는 과정에서 생길 부작용이 자본주의 자체의 부작용보다 크리라는 판단 때문이다. 우리는 그 부작용을 지난 세기 70년 동안 이미 목격한 바 있다. 박 교수의 도저한 국제주의도, 지금의 국민국가 체제를 하릴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나로서는 감당하기 벅차다. 아름답든 추하든, 인류의 지금 진화 단계에서 계급은 민족이나 국민을 이길 수 없다. 다시 말해 피(라는 관념)는 계급보다 진하다. 좌파를 자임하는 정권들이 소위 국익을 챙기는 데 우파 정권 못지않게 날쌔다는 것이 하나의 방증이다. 애국주의는 좌우 모든 정치인들이 흔들어대는 깃발이다.

그래서 때로는 대내적으로 민주주의자 노릇을 하는 정치인이 대외적으로 제국주의자 노릇을 하는 우스운 풍경도 생긴다. 대표적 예가 프랑스 제3공화국 정치인 쥘 페리다. 페리는 장관과 총리를 지내며 의무교육, 여성교육, 무상교육, 세속교육을 진작시켰을 뿐만 아니라 언론의 자유와 노동자 권익을 옹호한 민주주의자였다. 그러나 그의 민주주의는 프랑스 국경을 넘지 못했다. 그가 튀니지를 보호국으로 만들고 마다가스카르를 식민지화하고 콩고와 인도차이나를 정복했을 때, 그의 민주주의는 가뭇없이 사라졌다.

박노자 교수는 세상사의 복잡한 매듭을 계급투쟁이라는 칼로 단번에 잘라버린다. 그것은 그가 사람의 본성을 신뢰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악한 듯 보이는 인간의 행위는 궁극적으로 계급모순 때문에 생겨난다고 그는 판단하는 듯하다. 사람의 본성을 박 교수만큼 신뢰하지 못하는 나는 세상사의 복잡한 매듭을 번거롭더라도 찬찬히 풀어헤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쾌도난마는 반동을 불러오기 십상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것은 역사가 누누이 가르친 바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떠나, 박노자 교수는 한국 사회의 부정의와 세계의 비참을 진실로 가슴아파하며 그 해결을 모색하는 윤리적 인간이다. 대한민국 국회에서 이런 윤리인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한국인 모두에게 좋은 일일 테다. 박 교수는 진보신당 비례대표 명부의 6번에 올랐다. 진보신당은 비례대표 국회의원직을 두 해씩 나눠서 수행하기로 결정했으므로, 여느 정당에서 비례대표 세 사람을 당선시킬 수 있는 정당 지지율을 얻으면 박 교수는 두 해 뒤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된다. 비례대표 의원 세 사람을 배당받으려면 정당 지지율 5% 안팎을 얻어야 한다. 진보신당에 보내는 지지율 5%는 한국 유권자가 발휘할 수 있는 자존심의 최저선일 것이다. 그것이 10%가 되면 또 어떠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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