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피터의 고백>이라 하면 뭐가 떠오르는가?
추송웅 또는 카프카라고 말 할 것이다. 원작 <학술원에의 보고>에 대해서는 나중에 말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기억 속에 남아있는 추송웅에 관한 기억을 떠올려 보자. 모노드라마 <빠알간 피터의 고백>은 <길>의 젤소미나를 떠올리게 한다. 젤소미나와 피터가 무슨 연관이 있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둘의 이미지는 오버랩된다.
아프리카 밀림에서 잡혀와 인간의 길을 택해 서커스 스타가 된 빨간 원숭이 피터는 과거 원숭이 시절의 삶에 대해 보고해달라는 학술원의 요청을 받고 진정한 자유와 현대인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인간들은 너무 자주 자유를 착각합니다. 자유가 가장 숭고한 감정에 속하듯이 착각 또한 가장 숭고한 감정에 속하는 것이지요… 저는 오로지 보고만 할 뿐입니다."
프란츠 카프카 원작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를 각색한 연극 '빨간 피터의 고백'이 1977년 8월 20일 서울 명동 삼일로창고극장에서 첫선을 보였다. 1985년 작고한 연극배우 추송웅이 제작, 기획, 장치, 연출, 연기까지 1인 5역을 맡은 이 연극은 전례 없는 흥행기록을 세우며 한국 연극계에 모노드라마 붐을 일으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하지만 대중적인 성공을 거뒀음에도 연국 자체에는 긍정적인 평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카프카의 원작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피터의 고뇌를 표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추송웅의 분장한 모습은 매우 원숭이를 닮았지만 "원숭이의 세계를 벗어난 빨간 피터의 원숭이이면서 인간인 내면을 그 양쪽이며 어느 쪽도 아닌 차원으로 형상화시키는데는 역부족"이고 극적 감동을 주지 못했다고 평한다.
이러한 평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극으로 흥행할 수 있다는 계기를 만든 작품이다. 그것이 모노드라마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음에도 그의 연극을 후하게 평해야 한다. 연극이라는 한계성으로 그의 모습을 영상으로 볼 수 없음이 안타깝다.
해변으로 가요 - 산울림 & 추송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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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독일 베를린 예술 아카데미에서 클라우스 캄머 Klaus Kammer의 열연으로 호평을 받으며 공연된 <어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는 카프카의 단편 소설이 관객에게 향하여 보고하는 형식으로 각색되어 한 사람의 배우가 전 공연시간을 이끌어 가는 모노드라마의 장르를 개척해 놓았으며 이 작품의 한국공연 이후 모노드라마는 80년대 한국 연극계에서 즐겨 택해지는 연극 장르가 되었다. 추송웅은 이 작품과 접하게 된 동기에 대해, <주간한국>에 실리고 있던 「예 (藝)」라는 씨리즈 기사 중 하나로 보도된 클라우스 캄머의 공연에 대한 기사에 "충격에 가까운 감동을 받고 언젠가는 공연해 보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중 독일문화원의 최영일 씨에게서 번역본을 얻게 되었다" 고 한다. 성격배우 추송웅은 균형이 잡히지 못한 외모와 작은 체격 등으로 배역 맡기에 한계를 느끼고 있던 중 원숭이 역을 자신의 천생의 배역이라 생각하고 15년 배우경력의 성패를 이 작품에 건다. 무엇보다 관객을 사로잡을 수 있는, 그래서 많은 관객을 유치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려는 계획 하에 그는 작품 선정에서부터 제작, 연출, 출연을 모두 직접 시도한다.
관객을 사로잡는다는 것은 물론 연극 예술적인 의미에서도 이해될 수 있지만 무엇보다 많은 관객동원을 목표로 계획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는 세 가지 점에 착안한다. 우선 그는 카프카라는 이름으로 성패를 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카프카의 "심판", "성", "변신"등 의 작품이 이미 한국의 독서계에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관객동원의 문제가 없으리라는 계산에서였다. 둘째로 그에게는 당시 한국 연극계에서는 새로운 장르인 모노드라마를 개척하겠다는 포부가 있었다. 모노드라마는 새로운 장르이기도 했지만 제작비가 저렴하다는 유리한 점이 작용한다. 셋째로 인간이 아닌 원숭이의 모방은 연극계의 새로운 시도로 관객의 호기심을 끌기에 족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우선 그는 <어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라는 제목은 너무 딱딱하여 관객에게 유연하게 다가갈 수 없겠다고 생각하고 주인공 원숭이의 별명을 따서 <빠알간 피이터의 고백>이라고 제목을 바꾼다. 15년간의 배고픈 연극인으로서의 만네리즘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가능성을 위한 도전을 목표로 연기수업을 하며 연극적인 면을 살리기 위해 무엇보다 원숭이의 동작을 완벽하게 모방하면서 동작의 반경을 넓혀간다.
원래 9쪽 정도의 단편을 하루저녁 공연물로 각색하기 위해서는 공연시간을 확대시켜야하는 필요성이 따랐고 이 연장된 시간을 동작으로 채울 수 있어야 했다. 이는 특히 여러 등장인물을 통해 다양성을 제공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단조로움, 단일 인물의 대사만으로는 지루할 수 있는 상황을 동작으로 커버하려는 시도이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카프카의 해석에 한계성을 느꼈기 때문인 것 같다.
"흐물거리는 피이터의 절규는 역시 문학적 향기만으로는 결코 밟히지 않는 그림자와도 같은 카프카의 몽상적 공포를 표출해 내기에 아무래도 역부족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는 대사를 통한 표현보다는 동작위주의 무대를 지향한다고 한다. 그 자신도 물론 그렇게 함으로써 카프카의 "문학적 향기"가 감소될 것을 우려하기도 하지만 "카프카를 음미하려는 사람은 책이나 사서 보면 될 것"이라고 말하는 그의 공연에 임하는 자세를 보면 그가 텍스트 해석 자체에 비중을 덜 두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래서 그가 만들어낸 공연은 원숭이 연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이러한 원숭이 모방 연기가 관객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것도 사실이다.
카프카의 침팬지는 출구가 없는 철창 속에서 출구를 찾기 위해 인간세계에 적응하면서 침팬지적 기질을 거의 상실한 상태이기 때문에 구태여 그를 원숭이의 동작으로 원숭이임을 강조할 필요는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추송웅은 원숭이 모방에 이 공연의 성패를 건다. 그는 원숭이를 모방하기 위해 2개월간 창경원 동물원으로 출근하며 침팬지의 동작과 습성을 연구, 특이한 버릇 등을 유심히 관찰, 기록하며 사진을 찍기도 하고 실제로 침팬지 우리에 들어가 침팬지 노릇을 해보기도 하는 등, 각고의 노력을 통해 그의 상상 속에 그려진 피이터의 "괴기스런 모습"을 형상화하려 한다.
1977년 8월 21일부터 31일까지 공연예정이었던 이 작품은 9월 31일까지 연장하여 하루 2회씩 공연하였고 마지막 날에는 네 번을 공연해야할 정도로 관객의 호응은 열광적인 것이었다. "8월 하순, 9월 초 푹푹 찌는 더위에 땀에 젖은 관객들이 침, 땀방울 할 것 없이 모조리 머리 위로 떨어지는데도 얼굴하나 찡그리지 않고 시종일관 뜨거운 반응으로 피이터의 절규를 가슴속에 새기고 있었다"고 추송웅은 회고한다.
관객의 선풍적인 인기는 프라이에 뷔네의 공연에서도 감지된다. 70년대 초, 특히 독일문학의 한국소개에 기여하던 프라이에 뷔네는 7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단원들의 다수가 독일로 유학하고 그 일부는 현역으로 연극에 참여한다. 독일 유학중인 선배들은 독일 연극의 새로운 정보를 입수하는 직, 간접적인 창구가 된다. 주인공 원숭이 역으로 출연했던 김상경은 한국에서 드물게 보는 저음 배우로서 이 공연을 위해 독일까지 방문하면서 자료를 모으는 등, ‘학구적인 자세’로 카프카 해석을 시도하며 공연에 임하고 있었다. 추송웅의 공연이 추송웅의 독무대로 연출, 주연, 제작을 모두 혼자 맡았던 데 비해 프라이에 뷔네의 공연은 기획 이재창, 연출 김승수, 주연 김상경, 분장 박수명, 무대 조형래 등이 나누어 맡아 모두가 맡은 바 분야에서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삼일로 극장과 실험극장에서 거의 동시에 공연된 서로 다른 성격의 두 공연은 서로에게 자극제가 되며 모두 성공적이었다. 학생극단의 규모를 벗어나 기성극장에서 일반관객을 대상으로했던 프라이에 뷔네의 공연은 독일문학을 전공하는 학생과 졸업생들로 구성된 극단인 만큼 원작에 충실한 작품해석을 해 놓았고 추송웅의 <빠알간 피이터의 고백>은 관객을 염두에 둔, 관객의 기호에 어필하는 공연이었다. 그래서 추송웅의 공연이 상업적이었다는 비난도 만만치않다. 여하튼 이 작품은 연극으로도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준 작품이며 추송웅에게 부를, 꿈에도 그리던 자신의 극장 <떼아뜨르 추>를 가져다 준 작품이었다. 프라이에 뷔네도 이 작품의 성공으로 연장공연을 하며 극단 전문 사무실을 낼 정도가 되었으며 학생극의 범주를 넘는 공연 기획을 위해 ‘우리극장’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특히 추송웅의 <빨간 피터>는 대만, 일본, 파리 공연으로까지 이어지는 ‘대성공’을 거두어 그의 국제적 진출을 가능하게 했고 또 그에게 여러 개의 연극상을 안겨 주기도 했으며 1985년까지 15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할 정도로 흥행에 성공한 작품이다.
그러나 <빠알간 피이터>에 대한 연극계의 반응은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한상철은 이 모노드라마에서 추송웅 연기의 진경을 볼 수 없었다고 전제하면서 "그의 원숭이 연기는 원숭이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연기였다"고 신랄하게 평하며 카프카의 단편은 주인공이 한 편으로 사람이고 또 한 편으로는 원숭이임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그 어느 쪽도 아닌 어떤 새로운 차원을 요구하고 있는데 추송웅의 분장한 모습은 매우 원숭이를 닮았지만 "원숭이의 세계를 벗어난 빨간 피터의 원숭이이면서 인간인 내면을 그 양쪽이며 어느 쪽도 아닌 차원으로 형상화시키는데는 역부족"이고 극적 감동을 주지 못했다고 평한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서 그는 인물과 역의 분화가 없고 그것이 연출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 다시 말해 보다 극적 구성을 갖도록 재구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 그렇다고 다양한 연기술도 동원되지 않았기 때문에 원숭이를 보는 흥미와 호기심 이외에는 별 감동을 주지 못했다고 한다.
(김기선(성신여대) - <한국 무대의 카프타 수용> 中)
- 글: 장석주 (1996년 세계일보 "기인열전" 중에서)
덧붙임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