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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間/새로 나온 책

2012년 6월 1주 새로 나온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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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이 바지를 입고 대학 교육을 받고 카페와 술집에서 삼삼오오 환담을 나누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상이지만 20세기 초만 해도 해방을 의미하는 모험이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제인 애덤스, 마거릿 생어 등 근대 페미니스트들은 이런 환경 속에서도 기꺼이 모험을 즐긴다. 저자는 이들의 일탈을 가볍게 그리면서 “이들이 ‘여성답지 않다’는 당시의 비판을 기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여성의 주체성 확립’이라는 대의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일탈에서 대의를 뽑아내는 저자의 기획 의도는 여성의 인식 변화에서 시작해 정치, 경제 영역의 여성 해방을 그려내는 책의 구조와 비슷하다. 이 책은 100년 전 서구에서 여성들이 ‘일상’을 어떻게 급진적인 활동의 장으로 만들어 갔는지 보여주면서 여성에 대한 연금제도, 소비 문화 속 여성의 위치, 여성의 민주의식 등을 차례로 다룬다.

저자는 맺음말에서 “지난 수십 년간 여성 운동가들은 한 가지를 성취할 때마다 생각하지도 못한 문제들에 직면했으며 다시 그에 맞는 해결책을 모색해야 했다”고 말한다. 이 말대로라면 인식의 유산은 나비효과와 같다. 우리 주변의 삶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통찰력은 이 지점에서 나온다.

아름다운 외출
실라 로보섬 지음, 최재인 옮김/삼천리

‘바지입은 여성’은 혁명의 결과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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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세상에는 자도, 저울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은 삶을 영위하고 세상을 해석하기 위해 온갖 사물에서부터 인간사의 모든 것까지를 견주고 재왔다. 거리와 시간, 땅에서 나는 모든 것들의 생산량은 물론이거니와 거래의 공정함을 확보하려는 기준도 측정이라는 방법을 통해 이뤄져왔다. 결국 “도량형은 한 사회가 우주만물을 해석하고 인간의 삶과 일상을 보여주는 척도로 자리했으며, 문명의 본질적 요소로 격상됐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물론 저자는 그 문명의 배후에 깔려 있는 폭력성과 정치성, 아울러 측정에 대한 광신도 간과하지 않는다. 세계를 점령한 미터법은 “프랑스 군대의 총검”과 무관하지 않으며, “이제 인간은 측정 세계에 대한 거의 무의식적인 신뢰, 모든 것을 측정할 수 있다고 믿는”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행복이나 삶의 질까지도 자로 재거나 저울로 달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얘기다.

책의 말미는 측정에 사로잡힌 현대사회에 대한 성찰이다. 저자는 하이데거의 말을 인용하면서 “현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세상이 자신을 측정하라고 어르고, 측정 이외에는 의미를 찾을 방법이 없다고 구스른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이제 측정은 세상을 이해하는 도구에서, 세상에게 나를 이해시키기 위한 도구로 바뀌었다는 의미로 읽히는 문장이다. 그래서 저자가 내리는 마지막 결론은 매우 도발적이다. 그는 “오늘날 절대 선으로 간주되고 있는 측정은 우리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이며 “자아를 파괴하는 사악한 억압의 수단”이라고 강조하면서 “측정을 단호히 거부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권면한다. 그것이 바로 물리학과 철학을 함께 전공한 저자의 마지막 메시지다.

지방마다, 나라마다 다른 측정 단위를 쓰던 도량형을 통일하게 된 계기는 1789년 프랑스혁명이었다. 영주들이 기존 도량형을 멋대로 악용해 농민을 수탈했다며 성토하는 목소리가 빗발쳤다. 사람들은 '길이도 하나, 무게도 하나'를 요구했다. 혁명세력은 도량형 개혁이야말로 봉건제와 구체제를 타도하고, 자유와 평등을 구현하며 농노제를 타파하기 위한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프랑스 아카데미는 새로운 도량형 표준을 제정하는 임무를 정치인 탈레랑에게 맡겼다. 귀족 출신의 노회한 정치가 탈레랑은 시류에 편승하고 손해를 피하는 능력이 남달랐다. 도량형 개혁 같은 난제를 해결하는 데는 적격이었다.

"도량형의 난맥상은 정신을 혼란시키며 상거래를 저해한다." 1790년 탈레랑이 아카데미 회원과 의논해 국민의회에 제출한 도량형 개혁안 첫 구절이다. 아카데미는 1791년 파리를 지나는 지구 자오선의 4000만분의 1을 1m로 정했다. 자오선 길이를 측정하기 위해 메생과 들랑브르는 원정을 떠났다. 혁명정부 공식대표인 메셍은 스페인에서 간첩 혐의로 붙잡히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원정은 7년이나 걸렸다. 원정대의 측정 결과를 토대로 1799년 미터 표준기를 만들었고, 증류수 1㎥의 무게를 재서 킬로그램 표준기를 공식적으로 제정했다. 하지만 미터법 이외의 단위를 사용할 때마다 10프랑씩 벌금을 매겨 미터법을 강제한 것은 1840년 이후의 일이었다.

'미터법은 인쇄술 이후 인간이 만들어낸 최고의 발명이다.' 1821년 미국의 도량형 개혁을 추진하던 존 퀸시 애덤스 국무장관은 미터법을 극찬했다. 그러나 미터법이 세계적으로 통용되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19세기 전반을 지났을 무렵, 영국 및 영국 전·현 식민지국들은 야드파운드법을,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등 프랑스 영향을 받은 몇몇 나라들은 미터법을 쓰며 각축을 벌였다.

측정의 역사
로버트 P. 크리스 지음, 노승영 옮김/에이도스

행복도 자로 재고 저울로 달까… 억압의 수단인 ‘측정’을 거부하라
정확한 '1m'를 위해 프랑스 원정대는 7년을 헤맸다
“문화를 이해하려면 도량형을 알아야”…‘측정의 역사’
도량형의 기준은 곧 권력이었다
1마일이 몇 미터지?…각양각색 척도, 문화를 읽는 또 하나의 방법
뒤죽박죽 이 세상, 도량형은 세상을 잡는 권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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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에 관심이 많아야 세련된 태도라고 생각하는) 당신이 묻는다. 우리나라는 언제 노벨문학상을 받겠습니까. 문학평론가 김주연 숙명여대 석좌교수가 돌려주고 싶었던 대답은 이렇다. "올해 어떤 시집/소설집을 읽으셨습니까."

문학은 다른 가시적 예술과 달리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반성의 예술이다. 그런 이유로 많은 사람이 외면한다. 대학교수, 법조인, 의사 등 이른바 지식인마저 "책은 읽는데 문학은 읽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선언하는 나라. 1966년부터 문학비평을 시작한 이 원로 비평가는 "이런 박토(薄土)에서 노벨상 수상 작가가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심리는 무엇인가"라고 되묻는다.

서울에는 스웨덴 콜롬비아 체코 멕시코 등 주한 외국대사들로 구성된 서울 문학회라는 모임이 있다. 한국문학을 읽고 한 달에 한 번 정도 한국 작가를 초청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다. 이 모임에 참석한 김 교수가 대사에게 물었다. "문학에 너무 많은 관심을 쏟고 있는 건 아닌가? 경제 문제도 시급할 텐데." 답은 이랬다. "이게 경제다."

미니멀 투어 스토리 만들기
김주연 지음/문학과지성사

노벨문학상 타령하는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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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는 오로지 '색깔'이라는 단어와 만났을 때, 그 정치적 의미가 폭발했다. 흑인종과 백인종, 황인종이라는 색깔 구분은 인종을 분류하고 차별하는 수단이자, 문명과 미개를 가르는 상징으로 활용돼왔다. 피부색은 곧 인종을 나타내는 표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피부색 자체는 인종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표시로서 아무 쓸모가 없으며, 피부색은 단지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의 산물일 뿐"이라고 단호하게 정리한다.

사람 피부색은 짙은 갈색에서 창백한 상아색까지 매우 다양하다. 적도 부근 거주자의 색이 가장 짙고, 극지로 가면서 점점 옅어진다. 피부색은 멜라닌 양에 의해 결정되는데, 지구 표면에 닿는 자외선 양이 위도에 따라 다른 만큼 멜라닌 색소의 양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 적도처럼 자외선이 매우 강한 지역에 사는 원주민의 피부색이 짙은 것은 피부의 멜라닌 양을 최대한 늘리는 쪽으로 진화한 결과다. 멜라닌은 과도한 자외선으로 인해 DNA가 손상되는 것을 막고, 남성의 정자 생산과 여성의 태아 형성에 필수적인 엽산이 파괴되지 않도록 막아주는 기능을 한다.

'피부색=인종의 표식'은 유럽의 식민화 정책에 그 원인이 있었다. 힘으로 아프리카를 식민화하던 시대, 침략자인 백인은 짙은 색 피부를 '불량한 인격'이나 '도덕성 결핍' 같은 의미로 치환했다. 그리고 노예무역을 합리화했다. 검은 피부를 지닌 주민들은 얼굴이 붉어져도 잘 보이지 않았다. 이걸 '그들은 감정도 없고 수치심도 없는 열등한 존재'라는 증거로 삼았다. "피부색은 우리 조상이 과거 어떤 자외선 환경에서 살았느냐를 보여주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인간은 피부를 갖고 '장난'치는 유일한 동물이다. 사람만이 피부 장식을 통해 자신의 감정이나 의사를 표시한다. 피부는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혹은 어떤 사람이 되길 원하는지 보여주는 개인적 태피스트리(tapestry) 역할도 한다. 인간은 주위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에 관한 특별한 이야기를 알리기 위해 피부를 노출시키고, 덮고, 색칠하고, 문신을 새기고, 흉터를 만들거나 구멍을 뚫는다.

신체 '미술'의 역사는 길고 복잡하다. 인류가 피부 모양을 변화시키기 위해 최초로 사용한 방법은 자연에 있는 색소를 이용해 장식하는 것이었다.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에서 발견된 약 8000~9000년 전의 바위그림, 암각화, 조각상을 보면 당시의 신체 페인팅 양식이 상당히 정교했음을 알 수 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최초로 화장술이 널리 행해졌다. 문신은 고대부터 행해진 신체 미술의 한 형태. 늦어도 신석기 시대에 이미 문신이 영구적 신체 장식으로 이용됐다.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것은 알프스 빙하에서 발견된 신석기 시대의 냉동인간 '외치'의 몸에 새겨진 문신. 역사 속에서 대부분의 문신은 소속감과 기념, 자기보호 등을 강조해 자신이 어떤 사회적 단위에 동조한다는 뜻을 선언했다.

스킨
니나 자블론스키 지음, 진선미 옮김/양문

인간은 '피부' 갖고 장난치는 유일한 동물
흑인·백인·황인 ‘자외선의 색다른 선택’
자외선이 만든 피부색의 비밀
인간 피부 색은 환경 순응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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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이, 중립성과 독립성이 보장되는 사법기관의 눈치를 보는 것은 헌법적으로 용납된다. 법치주의 국가에서 사법부의 판단은 최종적이기 때문이며, 그렇기 때문에 사법부의 독립성을 보장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정기관은 권력자의 영향력 아래 있을 뿐 아니라 헌법상 권력자의 합법적인 통제 아래 있는데, 이들 행정기관의 눈치를 보는 것은 위헌적인 상황이다.”

이명박 정권이 ‘괴물’로 키워 놓은 방통위는, 검열에 관한 한 헌법재판소나 법원보다 더 큰 힘을 갖고서, 헌법은 물론이고 일반적인 법해석보다 더 광범위하고 수위가 높은 검열을 행사한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간행물윤리위원회도 검열을 행하는 위법적인 행정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한 최소한의 적법성은 ‘공공질서와 안녕’ 혹은 ‘명백하고 현존한 위험’이다. 하지만 방통위가 그간에 해 온 일들이 그랬던가? 네티즌의 입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보통신망법 44조의 여러 조항은 피해자가 사생활 침해나 명예훼손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게시물에 대해 즉시 삭제와 차단 조치를 취하게 되어 있다. 포털 업체에 모니터링 업무마저 부과한 이 악법의 최대 수혜자는 권력자와 기득권자다.

피해자를 자처하는 사람의 일방적인 요구만으로도 삭제와 차단이 가능한 정보통신망법도 문제지만, 사실 이 법은 그보다 상위에 있는 형법 307조 1항의 지원이 없으면 생겨날 수 없는 법이다. 흔히 명예훼손죄로 불리는 저 조항은 상대에 대한 허위나 모욕이 아니라, 진실을 말해도 죄가 성립되는 기막힌 법이다. 그래서 지은이는 우리나라의 명예훼손법 체계에 책 제목과 같은 별명을 달아 주었으니, 바로 ‘진실유포죄’다. 전세계에서 일본과 한국 정도에만 있다는 저 법에 따르면, 정봉주는 비비케이(BBK) 주가 조작에 이명박이 관여했다는 명백한 입증을 했다 하더라도, 바로 그 때문에 감옥행을 피할 수 없다. 논리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이 외에도 이 책은, 이명박 정권이 위축시키고 강화시킨 표현의 자유와 검열에 대한 생생한 사례를 제시하고, 정론과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진실유포죄
박경신 지음/다산초당(다산북스)

진실 유포가 죄 되는 나라, 한국·일본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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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이 고전이 되는 까닭은 바로 끊임없는 해석의 연속에 있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늘 새롭게 해석될 여지가 있어서 고전이 되는 것이다. 그럴 여지가 없다면, 그것은 고전이 아니라 그저 "오래된 책"으로서 고서(古書)일 뿐이다. 고전의 가치는 '지금 여기를 사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고전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다. 새로운 해석을 통해서. 그리고 새로운 시대마다 거듭 새롭게 해석되면서 오래도록 고전의 명성을 누린다. 새롭게 해석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고전이 아니다. 죽은 자의 찌꺼기로 남을 따름이다.

2011년 대한민국이라는 특정한 시공간을 다루면서도, 『맹자』는 전혀 낡은 느낌을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2천 년이라는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마치 명의가 침을 찌르듯, 읽는 이를 따끔거리게 합니다. 게다가 그 어마어마한 심연의 시간을 넘어 마주하는 맹자는, 오늘날 우리에게 오래 곱씹어볼 수 있는 지혜를 제공하기까지 합니다. 저자는 이것이 바로 고전이 가진 힘이며 참된 맛이라고 말합니다. 넓게 볼 줄 아는 역사의식은 오늘의 문제에서 어제와 내일을 비추기 때문이지요.

맹자가 살았던 춘추전국시대는 혼란의 시대였습니다. 전국칠웅(戰國七雄)을 중심으로 세력 판도가 재편되면서, 전란과 반역이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살기 힘들다"라는 소리가 지금에 비해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어지러운 시대에 태어난 맹자는 “천하를 바르게 다스리려 한다면, 지금 시대에 나를 빼고 누가 있겠는가!”라고 호기 있게 외칠 만큼 매우 강건한 기질을 지닌 사상가였습니다. 당대를 주름잡던 제후들 앞에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고, 직설적이고 거친 어조와 논법을 주저 없이 구사하였지요. 당시 제후국들 중에서 가장 강력했던 제나라 선왕의 바로 면전에서도, ‘임금을 죽여도 된다’는 뜻의 말을 서슴지 않고 했으니 그가 얼마나 담대한 사상가이자 독설가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맹자의 거침없는 말을 빌려, 오늘의 이야기를 합니다. 이는 거꾸로 말해, 오늘날 한국 사회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거침없는 맹자보다 더 나은 고전을 찾기가 힘들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만큼 우리 사회의 병증이 깊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맹자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시비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이에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시대를 외면하는 자, 사람이 아니다.” 지금은 뿌듯한 민주주의 시대입니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이 주인이 되어야 가능한 제도입니다. 주인으로서 주인 노릇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그 사회엔 결코 봄이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자가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는 대상은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검찰도 아닌, 바로 시민들입니다. 마찬가지로 봄이 오지 않는 시대의 책임도 ‘시민들’에게 있음을 주저없이 말합니다. 이 책은, 시민들이 시대와 현실을 두루 살피고 깊이 이해하도록 자극하며, 더 나은 사회로 이끌어주는 고전해설서가 될 것입니다.

맹자독설
정천구 지음/산지니

고전학자 정천구의 맹자 현대도시를 거닐다
날카로운 고전의 맛 『맹자독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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