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 지배를 받던 고려 말, 처음으로 소금 전매제가 실시됐다. 어린 시절 대부분을 원나라에서 보낸 충선왕이 소금 전매를 통해 재정 수입의 3분의 2를 거둬들이던 원나라의 제도를 벤치마킹한 것이다. 국가 재정은 튼튼해졌지만, 소금을 생산하던 염호(鹽戶)들은 세금을 바치느라 등이 휠 지경이었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선 조정이 백성과 소금의 이익을 다투는 데 대해 비판적 시각이 우세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터지자 유성룡은 군량·군비 확보를 위해 소금과 철의 생산·유통을 관리하는 염철사(鹽鐵使) 제도를 건의했다. 18세기 실학자 정약용도 백성을 위한 염법 개혁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조선은 소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개항과 일제 침략을 맞았다.
저자는 천일염을 우리의 전통적 소금으로 알고 있는 현실이 불편하다. 천일염이 들어온 것은 불과 한 세기 전의 일. 일제가 조선 말 대만의 것을 본떠 들여왔다는 것이다. 우리 민족이 원래 쓰던 소금은 바닷물을 끓여 만든 '자염(煮鹽)'. 특히 서해안에 발달한 갯벌을 이용해 소금을 얻는 방식이 유행했다. 갯벌의 유기물이 소금에 섞이면서 맛있고 몸에 좋은 소금이 만들어졌다. 문제는 바닷물을 끓이는 소금가마에 쓰는 연료였다. 조선시대 내내 목재 말고는 마땅한 연료를 구하지 못했다. 때문에 염전 주위는 민둥산이 돼버렸다.
일제는 1907년 인천 주안에 처음으로 천일염 염전 시험장을 설치했다. 이완용을 비롯한 대신들이 직접 시찰 나와 소금 굽는 마당을 시찰할 만큼, 관심을 기울인 사안이었다. 천일염은 식용뿐 아니라, 무기·군수산업에 필요한 화학공업의 필수품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천일염을 생산할 수 있는 지리적 조건을 갖춘 곳이 없었다. 이 때문에 입지조건이 뛰어난 조선을 천일염공급지로 결정하고, 집중적으로 천일염전을 설립했다.
이때부터 전통 자염 생산지였던 충청, 전라, 경상도의 소금 생산은 쇠락했다. 일제는 자염 생산의 뿌리가 약한 북한에 집중적으로 천일염전을 세웠다. 해방 후 소금 기근에 시달린 남쪽에선, 6·25 때 시장에서 쌀 한 말과 소금 한 말에 거래될 정도였다. 이승만 정부는 1952년부터 '소금증산 5개년 계획'을 밀고 나가 대대적으로 천일염전 증설에 나섰다. 결과는 대성공. 1957년엔 10만톤의 소금이 과잉생산됐다. 이 때문에 1960년대 이후 소금 생산은 계속 내리막길이었다.
소금의 주술적 힘에 관한 대목도 흥미롭다. 소금을 이용해 액을 물리치려는 행위는 우리나라만이 아닌 기독교나 이슬람교에서도 널리 행해졌다고 한다. 신생아가 태어나면 소금으로 문질렀고(구약성서 에스겔), 유럽에서는 기독교 전래 이전에 아이에게 소금을 뿌리거나 아이의 요람에 소금을 놓아두었다고 한다.
저자는 이런 소금이 만병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그 때문에 소금이 주었던 그 짭짤한 역사문화의 진미까지 잊어버렸다." 저자는 "인간이 짠맛을 추구하는 이유는 내부의 세포가 품고 있는 바다를 정상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라며 "우리는 매일 소금을 먹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인 바다를 먹는 것"이라고 말했다.
작지만 큰 한국사, 소금 |
천일염이 전통소금? 100년 전엔 없었다
착취와 수탈의 소금정책, 백성 눈물 쏙 뺐다
‘푸대접’ 소금 과거엔 ‘권력’ 이었다
국가가 독점해 온 소금, 백성의 땀-눈물이었다
소금이 주었던 짭짤한 역사문화의 진미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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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과 한자를 섞어 쓰는 국한혼용론과 한글전용론을 둘러싼 논쟁은 우리 사회의 오랜 숙제이자 해묵은 논쟁거리다. 한글을 둘러싼 논쟁은 때론 민족 정체성 논란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신간 ’한글 민주주의’는 ’한글이 없어진다면 민족의 정체성이 없어질 수도 있다’는 인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저자인 최경봉 원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한글을 둘러싼 소모적 논쟁은 잠시 접어두고 우리 삶에서 언어와 문자의 역할은 무엇이며 어떠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 최 교수는 언어민족주의를 과감히 걷어내고 한글이 우리 말을 표기하는 문자로 자리 잡은 ’역사적 선택’의 과정을 고찰한다. 최 교수는 “한글이 한국어를 표기하는 문자가 된 것은 당위적인 것이 아니라 선택적인 것이었고, 그 선택은 역사적 선택이었다”고 분석한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게 된 것은 당시 조선 사회에 소리 문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며, 양반들에게 ’언문’으로 불리며 천시받던 한글이 19세기 말 국어의 위상을 확립하게 된 것 역시 근대적 개혁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따른 것이라는 게 최 교수의 분석이다.
최 교수는 “인간이 사용하는 도구라는 점에서 언어와 문자는 해당 공동체 구성원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지만, 사회생활의 도구이기에 언어와 문자의 선택과 유지에는 구성원의 합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문자의 선택에도 ’민주주의’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한글전용과 국한혼용의 논쟁도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보자고 말한다. “한글전용론은 더 많은 사람들이 의미를 쉽게 공유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국한혼용은 한글로 표기했을 때 의미가 불분명한 부분도 있다는 것이죠. 두 주장의 문제는 어느 한쪽을 초등학교 교과서부터 시작해 전체 어문생활에 적용시키려는 데 있습니다. 읽는 독자들을 고려해 보면 해답은 명확합니다. 신문처럼 많은 사람들이 보는 매체는 한글만 쓰는 것이 좋겠죠. 전문서를 쓸 때는 한자를 혼용해도 좋을 겁니다.”
우리말글 연구에 평생을 바친 주시경 선생 또한 비슷한 글을 ‘황성신문’에 쓸 때는 국한혼용체를 썼지만, ‘서우’라는 잡지에 쓸 때는 한글만으로 썼다. 독자층을 고려해 글쓰기 양식이 달라질 필요가 있다고 본 것이다. 아름다운 우리말 시를 썼던 만해 한용운 또한 <조선불교유신론>에서는 “佛이 言하시되…”처럼 이두문에 가까운 국한혼용체를 썼다.
최 교수는 표준어를 정하고 외래어를 순화할 때도 이것이 ‘바른말’이며 ‘규범’이라는 식으로 접근하기보다 원활한 의사소통을 돕는 ‘공통어’를 만들자는 입장에서 풀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면에서 여전히 ‘걸판지다’ ‘어줍잖다’는 안되고 ‘건방지다’ ‘어쭙잖다’만이 표준어로 인정되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표시한다.
“단일표준어를 고집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60~70%의 사람들이 쓰는 말을 틀렸다고 스트레스를 주기보다 인정해주는 것이 언어생활을 더 역동적으로 만들 수 있지 않겠어요? 세계적으로도 단일표준어 원칙은 없습니다. 다만 많이 쓰는 말을 사전에 올릴 뿐이죠. 게다가 이번에 새롭게 표준어로 인정된 말들이 북한에서는 이미 문화어로 쓰이고 있다는 걸 보면, 통일 이후의 표준어 문제를 생각해 보더라도 결국 복수표준어로 갈 수밖에 없을 겁니다.”
외래어도 마찬가지다. 외래어 배척운동이 가장 극심했던 때가 유신체제였고, 독일에서는 나치 시절이었다는 점을 들어 “극단적인 어문민족주의는 결국 언어를 정치의 문제로 만든다”고 설명한다. 북한도 ‘아이스크림’을 ‘얼음보숭이’로 순화했지만 결국 다시 환원시킬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최 교수는 표기법의 문제는 결국 “원칙과 원리의 문제가 아니라 조정과 타협의 문제”라고 본다. “민주주의 사회라면 좋은 정책이나 제도도 사람들의 수용 여부에 따라서 결정이 되잖아요. 대중을 좇아간다고 걱정할 수 있지만, 좋은 모델이라도 수용이 안되면 고쳐나가면서 대중의 검증을 받아야 한다는 측면을 더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한글민주주의 |
"딸아이 남친은 재원" 이 문장은 틀렸다?
어문정책 대중의 요구 반영해야
신문은 한글전용, 전문서적은 한자혼용하면 논쟁이 사라질겁니다
語文정책 ‘사회적 합의’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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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세계화’는 일상용어다. 한국 사회에서 그 용어는 1990년대 문민정부 시절에 ‘국제화’라는 말로 처음 등장했다가 차차 ‘세계화’로 정착한다. ‘글로벌’이라는 용어로 변형되기도 했다. 기업과 대학들이 앞장서서 그것을 유포했다. 우리는 월드컵과 올림픽 같은 스포츠 이벤트는 물론이거니와,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세계 곳곳의 뉴스들, 쏟아져 들어오는 여러 나라의 상품을 접하면서 세계화를 체감한다. 아울러 금융자본의 전 세계적 흐름이 만들어낸 경제위기를 몸으로 겪으면서 세계화의 실체를 목도한다. 이제 어린 학생들의 대화 속에서도, 팝스타의 노랫말에도 세계화가 등장한다.
그렇지만 정작 세계화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상황을 세계화라고 일컫는 것일까? 막상 그런 질문과 마주하면 답하기가 쉽지 않다. 이 책의 저자인 앤드루 존스는 “이제 세계화는 광범위하고 당연하게 여겨지면서 그것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혹은 왜 중요한지조차 묻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말한다.
저자는 영국 런던대학교 버크벡대학의 경제지리학 교수다. 그는 “세계화는 얼굴을 바꾼 채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진행 중”이며 “세계화를 둘러싼 논쟁 역시 끝나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정치인부터 시인까지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온갖 변화를 일으킨 원인으로 ‘세계화’를 내세우며 환호하거나 비난”하지만, 정작 세계화에 대한 논의는 아직도 미진하다는 것이다. 물론 저자는 “(양적으로 보자면) 그동안 질릴 만큼 많은 논의들, 과용·과대 포장됐던 이론들”이 범람했음을 지적한다. 그래서 “논의의 현 상태를 점검하고, 어떤 이론이 가치 있는지를 평가하는 중간점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렇게 이 책의 집필 동기를 밝히면서 “세계화 이론의 폭주”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예일대 석좌교수인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세계체체론이야말로 세계화 논의의 출발점이라고 바라본다. 물론 그것은 누구나 쉽게 동의할 수 있는 보편적 관점이기도 하다. 세계체제론은 세계를 하나의 체제로 보면서 중심부, 반주변부, 주변부로 나눠 권력관계와 자본주의적 양상을 분석한다. 1970년대 초반에 등장해 이후의 세계화 논의에서 커다란 줄기를 형성했으며, 세계화와 근대성의 필연적 관계를 주장한 안소니 기든스(2장)를 비롯해 정보통신기술의 발달과 세계화를 연결시킨 마누엘 카스텔(3장)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들은 “세계화가 갑자기 등장한 현상이 아니라 500년도 넘는 긴 역사”를 갖는다고 바라보는 공통점을 갖는다. ‘파이낸셜타임스’의 칼럼니스트인 마틴 울프와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토마스 프리드먼(7장)은 세계화를 “경제발전의 기회”로 본다는 점에서 세계화를 긍정하는 대표적 논객들로 손꼽힌다. 또 “세계화에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조지프 스티글리츠(8장)는 ‘대안적 세계화’의 대표적 이론가로 평가된다. 하지만 이 권위 있는 경제학자가 주장하는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는 양쪽에서 날아오는 돌을 피하기 어렵다. IMF를 포함한 세계기구의 이론가들은 물론이거니와, 급진적이고 개혁적인 논객들에 의해서도 “이상적이거나 정치적으로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물론 이 책의 저자도 “(스티클리츠가 보여주는) 단언(斷言)과 일반화”에 불편한 입장을 드러내기는 마찬가지다.
세계는 어떻게 움직이는가 |
말은 넘치나 실체 모호한 ‘세계화’…끝나지 않은 40여년 논쟁을 살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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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민주주의가 탄생했던 기원전 아테네로 돌아가 민주주의가 과연 무엇인지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는 책, ‘최초의 민주주의’가 출간됐다. 비록 이 책에서 다루는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에 직접적으로 대입시켜 비교하기는 힘들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담긴 이상과 이념들은 우리의 생각을 다듬고 우리 사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의 대안을 고민하는 데 귀중한 영감을 제공할 것이다.
저명한 고전학자이자 정치철학자인 폴 우드러프 교수는 그리스 고전 문헌 속에 담긴 역사가와 사상가, 문인들의 저술과 기록을 통해 인류 역사상 최초로 시도됐던 민주주의의 역사와 그 속에 담긴 7가지의 논쟁적인 이념들, 곧 ‘참주정으로부터의 자유’, ‘조화’, ‘법에 따른 통치’, ‘본성에 따른 자연적 평등성’, ‘시민 지혜’, ‘지식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추론’, ‘교양 교육’을 생생하게 복원했다.
저자가 이 책에서 민주주의에 반드시 요청될 이념으로 강조하는 ‘조화’는, 이념 · 계급 · 지역 갈등으로 극심한 분열을 겪고 있는 한국 사회에도 상당히 유효한 가르침을 준다. 또한 저자는 우리가 민주주의를 다수결의 원칙이나 투표제와 같은 그 대역들과 혼동함으로써, 이와 같은 민주주의의 이상과 이념들에 대해 깊이 성찰할 기회를 놓쳐왔다고 지적하며, 바로 이 이념들을 온전히 실천할 때 비로소 진정한 민주주의가 가능하다고 역설한다.
저자가 민주주의의 7가지 핵심 이념들을 통해 우리에게 던지는 논쟁적인 물음들은 진지하게 경청할 필요가 있다. 정당은 항상 폭군처럼 참주적인 권력을 추구해야만 하는가? 무엇이 국가의 분열을 조장하는 정치적 분노를 야기하는가? 부가 정치적 혜택을 얻는 것을 제지할 수 있는가? 복잡한 사안들을 결정하는 문제에 있어 시민들의 지혜가 어떻게 국가에 도움이 될 수 있는가? 교육은 단순히 직업적 목적만을 위해 사람들을 훈련시킬 것인가? 어떻게 하면 소수의 유권자들에게 공정한 기회를 줄 수 있는가?
이 책은 민주주의의 본질을 찾는 지적 탐사이며, 정치 성향에 상관없이 모든 독자에게 그동안 익히 들어온 논쟁을 새로운 각도로 바라볼 것을 권유한다. 저자는 이러한 논쟁을 통해 아테네인들이 민주주의에 대해 얼마나 도전적인 발상을 선보였는지 신선한 자극을 준다. 민주주의가 어떤 이념들을 토대로 두고 있는지, 어떤 배경에서 그 이념들이 나오게 되었는지 이해한다면 우리 개개인이 올바른 정치적 삶을 살아가는 데는 물론이고, 사회 전체를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다.
최초의 민주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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