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가 내 책을 사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가격 그리고 그 돈을 벌기 위해 들인 노동과 시간에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고 싶어요. 혹시 반값 할인을 해줘야 하지는 않을까, 환불해줘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미안함을 느끼지 않을 책을 쓰는 것이 작가로서 나의 책임이고 욕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읽는 동안 독자에게 재미와 가치가 있는 시간을 주고 싶어요. 감성을 자극하든 깨달음을 주든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든 듣지 않는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이게 하고 싶습니다. 거기에는 교양과 교훈 그리고 엔터테인먼트가 모두 포함됩니다.
세계를 변혁하는 책이나 세계를 해석하는 책은 아닐지언정 ‘스스로 낭비’해 세계를 낭비하는 책은 안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작가라면 책 한 권 사주어도 절대 아깝지 않겠다.
덧_
고병권의 말을 차용했다.
모든 위대한 것은 저 태양처럼 자신 스스로 낭비한다. 그러나 이 책은 자신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낭비한다. 세계에 산소를 공급하는 나무를 죽이고, 그 나무로 만든 종이에 독을 담아 유포하는 책. 너무 가혹한 말일 수 있지만, 세계의 질병임을 증언하는 책 중에는 아예 독극물로 돌변해서 돌아다니는 책이 있다. 이런 책은 어떤 질병보다도, 어떤 살상 무기보다도 이 세계에 치명적이다
청소기로 지구를 구하는 법 _박지영
청소기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꿀벌을 사라지게 하는 일. 북미를 시작으로 남미, 유럽, 아시아 전역에 걸쳐 꿀벌들이 사체도 없이 사라졌다. CCD, 군집붕괴 증후군의 원인은 전자파, 바이러스, 온난화 등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정확한 증거는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남자는 알 것 같았다. 글쎄. 청소기가 아닐까? 할 수만 있다면 남자도 청소기로 많은 것들을 사라지게 하고 싶었다. 산지 석 달 밖에 안 됐는데 고장이 나잖아요, 제품 불량 아니에요? 툴툴대는 저런 여자들. 아인슈타인은 꿀벌이 사라지면 4년 안에 인류에 재앙이 닥칠 거라고 했다는데, 꿀벌이 사라지고 야생표범이 사라지고 북극의 빙하가 사라지고……. 사라짐이 가속화되는 걸 보면 4년까지 기다릴 것도 없을 것 같았다. 청소기 하나도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르는 인간들이라면 그런 꼴을 당해도 싸다.
고장의 원인은 게으름이었다. 청소기를 분해하자 퀴퀴한 먼지 냄새가 훅 끼쳐왔다. 오랫동안 제거하지 않은 먼지가 단단히 뭉쳐 있었다. 핀셋으로 주입부를 막고 있는 먼지 덩어리를 집어 여자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증거를 수집하는 형사처럼 조심스러운 손놀림이었다. 남자는 CSI 과학수사대의 팬이었다. 덕분에 남자는 세상의 모든 일이 범죄라는 것을 깨달았다.
더럽게! 얼굴을 찌푸리며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인간들이란. 확실한 증거를 들이밀어도 자신은 범죄와 무관하다는 듯 시치미 떼는 염치 없는 종족들. 먼지를 봉투에 담아 가방에 넣었지만 정말 봉투에 담아 격리시키고 싶은 건 자신의 잘못은 깨닫지 못하고 청소기 탓만 하는 저 여자였다. 대신 남자는 온화한 서비스용 미소를 지으며 멀쩡한 부품을 가리켰다. 이게 고장의 원인입니다. 새것으로 교체해 드릴까요?
교체용 부품은 오전에 다른 고객의 집에서 고장이라고 빼내온 물건이었다. 고객들은 교체할 필요 없는 멀쩡한 부품을 다른 집의 청소기에서 빼온 중고부품으로 교체하는 데 8만원의 요금을 지불했다. 그건 청소기 사용법을 지키지 못한 규칙위반에 대한 정당한 벌금이었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범죄를 저질렀다. 사용법만 제대로 읽고 매뉴얼대로만 하면 되는데 왜 그걸 못할까. 청소기를 팔 때 자격시험을 볼 수는 없는 걸까.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청소기를 사용해도 좋은 사람과 청소기로 쓸어 버려야 하는 사람들.
여자는 물론 후자였다. 뭐가 이렇게 복잡해요? 남자가 친절히 청소기의 다양한 기능을 설명해도 건성으로 들으며 지겨워했다. 똑바로 앉아서 해야지! 거실 바닥에 누워 학습지를 하는 아이에게 여자가 엄한 목소리로 일렀다. 저런 어른들이 아이를 키운다. 세상엔 겁 없는 인간들이 너무 많았다. 청소기도 다루지 못할 정도로 무식하면서 어떻게 아이를 낳고 교육시키는지 남자는 부모 된 인간들의 뻔뻔함을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남자는 정해진 규칙에 따라 사는 사람이었다. 면도기 하나를 사도 사용법을 꼼꼼히 읽고 정해진 매뉴얼대로 사용했고 컵라면을 먹을 땐 정확히 안에 그어진 선에 맞춰 물을 붓고 정확히 3분을 기다렸다. 교통법규를 어긴 일도 없었고 고객과의 약속에 늦거나 결근한 적도 없었다. 남자는 누구보다 성실했다. 고객의 집을 방문하기 전에는 가글을 했고 코털을 확인했고 언제나 청결하게 손톱을 바짝 깎았다. 수리가 끝나면 청소기를 올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A부터 Z까지 친절하고 알기 쉽게 설명해주었고, 직접 시범을 보여주며 부탁하지 않아도 거실과 방, 침대 매트리스까지 꼼꼼히 청소해 주었다. 하지만 남자의 서비스 평점은 같은 지역의 기사들 중 가장 낮았다. 남자에 대한 고객의 불만은 지나치다는 거였다. 그게 좀, 지나쳐요. 남자는 규정대로 할 뿐이었다. 순서대로 하나도 빠짐없이 꼼꼼히 제대로. 그런데 지나치다니. 그 때문에 남자의 평점은 C-였다. C-를 받아야 할 것은 제대로 된 서비스를 받고도 지나치다고 생각하는 고객들이었다. 남자는 큰 걸 바란 게 아니었다. 평균 B 정도의 사람들과 어울려 살고 싶었을 뿐인데. 이 지구는 확실히, 잘못되어가고 있다. 지구는 곧 F 학점을 받게 될 것 같았다. 재수강이, 가능할까?
침대 안쪽에는 돌돌 말린 스타킹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여자는 거실에서 큰 소리로 통화 중이었다. 침대 매트리스의 진드기를 보여주자 여자는 남자가 진드기라도 되는 양 몸을 피하며 방을 나갔었다. 남자는 작업복 주머니에 스타킹을 집어넣었다. 주머니에는 오전에 들렀던 집에서 가져온 립스틱이 들어 있었다. 남자는 립스틱을 꺼내어 침대 아래쪽에 살짝 내려두었다. 이 물건 때문에 여자는 남편을 의심하고 싸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물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야기를 만드는 건 사람들이다.
청소를 하다 보면 먼지 외에도 작고 하찮은 물건들이 청소기에 끌려왔다. 침대 밑에서 소파 뒤에서 옷장 안쪽에서 동전, 단추, 머리핀, 작은 장난감 조각 같은,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 잃어버린 물건들이 발견되곤 했다.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화장대 아래에서 작은 머리핀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유리알들이 붙어 있었다. 남자는 아무 생각 없이 물건을 주머니에 넣었다. 아마도 청소가 끝나고 돌려줄 생각이었던 것 같지만, 기억이 난 건 그 집을 나와 지하철을 타려던 때였다. 남자는 10분 거리의 집까지 다시 되돌아갔다. 특별한 감사를 기대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주인 여자는 피식, 정말 피식, 웃었다. 문도 열지 않고 여자는 인터폰으로 말했다. 이거 하나 때문에 돌아오신 거예요? 귀찮아, 했다. 말은 안 해도 얼굴에 귀찮아, 가 묻어나왔다. 이 남자는 왜 이따위 걸로 다시 되돌아온 거지? 의심 같은 게 묻어났다. 어쨌거나. 고마워요. 문 앞에 두고 가세요. 되돌아와서 되돌아가기까지, 20분이었다. 다음 고객과의 약속 시간을 지키자면 남자는 오늘 점심을 굶거나, 길에 서서 토스트 하나로 때워야 할 터였다. 느긋한 점심시간과, 어쨌거나 고마움의 사이. 남자는 머리핀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반짝, 반짝이는 유리알들. 이 유리알이 진짜 보석이었다면 여자는 어쨌거나가 아니라 진심으로, 고마워했을까? 혹시라도 머리핀을 찾는 전화가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서비스를 끝내고 건넨 명함에는 남자의 핸드폰 번호가 적혀 있었다. 전화는 오지 않았다.
그 후로 남자는 고객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청소기에 걸리는 물건들을 하나씩 들고 왔다. 누군가의 전화번호가 적힌 노란 포스트잇, 클립, 오래된 아카시아 향 껌, 할인쿠폰, 증명사진, 단추와 엽서 같은 것들. 물건이 없어졌다고 고객이 항의 전화를 걸어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차피 잊혀진 물건들이었다.
남자의 작은 방에는 지난 4년간 수집해 온 물건들이 가득했다. 잃어버린 물건들 사이에 있다 보면 자신도 누군가 잃어버린 물건 같았다. 이 버려진 물건들을 왜 모으는지 남자도 알지 못했다. 그저 언젠가는 가장 쓸모없는 것들로 가장 쓸모 있는 것을 만들고 싶었다. 무엇이 좋을까. 예를 들면, 청소기는 어떨까. 모든 더러운 것들을 빨아들이는 청소기.
해봐도 돼요? 어느새 아이가 곁에 와서 청소기로 빨려 들어가는 먼지를 보며 신기한 듯 말했다. 해볼래? 뭐든 다 빨아들인단다. 햄스터두요? 아이는 우리에 들어 있는 햄스터 한 쌍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면 햄스터가 죽을 텐데. 재밌잖아요. 죽여보고 싶다. 해봐도 돼요?
아이의 까만 눈동자가 호기심에 반짝거렸다. 여자는 알고 있을까. 자신이 연쇄살인범의 씨를 키운다는 걸. CSI에 나오는 연쇄살인범들은 어릴 때 고양이를 죽이는 것부터 시작했다. 남자는 아이의 얼굴을 찬찬히 봐두었다. 언젠가 세간을 떠들썩하게 할 살인사건의 증인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삶을 리셋할 수 있다면. 남자는 꿈 꾸곤 했다. CSI에 나오는 증인들처럼 과거를 지우고 신분을 바꾸고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다. 지금 이 시간과 공간, 지금의 나만 아니라면 아무리 하찮고 보잘것없는 삶이라도 좋았다. 가끔은 이미 자신이 증인보호프로그램에 속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기억조차 지워진 채 가장 낮게 가장 작게 들키지 않는 것만을 목표로 살아가도록 프로그램된 인간. 그렇지 않고서야 고작 이런 삶이 이 지구에서 내 몫의 전부라니. 이것은 허상, 내 진짜 삶은 저 밖의 어딘가에서 환하고 아름답게 쓰이고 있는 건 아닐까.
이 아이가 내게 증인이 될 기회를 제공해 줄지도. 아이는 지극히 평범했다. 쌍꺼풀이 없는 눈과 낮은 코. 교정이 필요한 고르지 못한 치아. 몽타주를 그리기 힘든 얼굴이었다. 세상의 범죄는 이렇게 평범함만을 버무려 평범함만을 추출한 듯한 어린 아이에게서도 자라고 있구나. 이 지구는 정말 더 이상 가망이 없는 걸까?
더럽다니까! 여자가 청소기를 잡고 장난치는 아이를 보고는 서둘러 전화를 끊고 달려왔다. 너는 왜 쓸데없는 짓을 하고 그러니. 더럽게. 여자가 아이를 끌고 욕실로 들어가 손을 씻겼다. 싹싹 씻어 싹싹. 학습지도 하다 말고! 너도 나중에 아저씨처럼 될래? 남자는 자신이 여자의 집을 더럽히는 거대한 먼지 덩어리가 된 것 같았다. 남자는 성실한 아이였다. 숙제를 잊은 적도 없었고, 보충수업을 빼먹은 적도 없었고, 공부도, 했다. 잘, 하지는 못했지만 어쨌거나 책상에 앉아서 공부란 걸 했다. 학생은 공부를 해야 하는 거니까. 그리고 햄스터를 죽여 볼까, 재미삼아, 란 생각 따위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확실히 누가 더 착한 어린이인가 줄을 세우면 어린 시절의 남자가 저 아이보다 훨씬 앞에 설 것 같았다. 하지만.
남자는 진공청소기의 스위치를 강으로 올렸다. 세상의 소리를 다 빨아들일 것처럼 시끄러운 소음을 내며 청소기가 다시 작동을 시작했다. 여자의 목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우주가 폭발할 것처럼 요란한 소음. 덜덜덜 손끝에 느껴지는 진동도 강해졌다. 엉망진창인 지구가 흔들려 새롭고 질서정연한 세계로 재탄생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공기 중에 부옇게 뜬 먼지가 혼란스럽게 떠돌다 다시 포근히 가라앉았다. 지구는, 따뜻한 먼지가 모여 만든 별이었다. 먼지가 다 사라진다면 이 지구도 어쩌면. 조금의 먼지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남자는 꼼꼼히 청소를 계속했다.
Q〉 우주에는 지구와 비슷한 별이 존재할까요?
A〉 최근에는 우리의 태양보다 약간 큰 질량을 가진 별 주변에서 지구형 행성을 잉태할 소용돌이 치고 있는 거대한 먼지 벨트가 발견되었습니다.
남자는 질문자가 채택한 답변을 읽기 시작했다.
A〉 HD 113766으로 불리는 이 별은 지구에서 424광년 떨어져 있습니다. 이 따뜻한 먼지 벨트는 항성계의 서식 가능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 덩어리로 뭉쳐지면서 행성 형성이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1천만 년 정도의 나이를 가진 이 별은 암석형 행성을 형성하기에 알맞은 상태에 있습니다. 존스 홉킨스 응용물리학 연구소의 Carey Lisse 박사는 지구와 같은 행성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적절한 위치와 시간뿐만 아니라 알맞은 비율의 먼지 혼합물이 존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지구와 닮은 별이 만들어지기에 알맞은 형태. 알맞은 비율의 먼지 혼합물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질문은 오랜만이었다. 레벨 9 정도. 남자는 질문을 블로그에 스크랩했다.
매일 퇴근 후 남자는 지식인에 접속해서 희귀한 나비나 곤충을 채집하듯 질문들을 채집했다. 하루 중 유일하게 의미 있는 대화가 이루어지는 시간이었다. 세상에는 질문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청소기도, 올바른 사용법에 대해 질문만 했다면 고장 없이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답은 어디서든 구할 수 있다. 지식인에는 정말 많은 지식인들이 살고 있었다. 문제는 질문이었다. 무엇을 질문할 것인가를 아는 게 중요했다. 남자는 언젠가 영화에서 본 것처럼 궁극의 질문을 찾고 있었다. 언젠가 이 생이 남자에게 원하는 답이 무언지, 궁극의 질문을 찾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사실 남자는 자신의 삶에 대한 궁극의 변명을 찾고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남자는 다만, 그것이 무어건 찾아야 했을 뿐이다. 무언가를 찾느라 열심히 자신의 생을 낭비해야 했다.
다행히 최근의 지구는 사용설명서도 제대로 읽지 않고 함부로 사용한 인간들 때문에 너무 빨리 낡아버린 청소기 같았다. 이미 진 바둑을 복기하듯 지루한 이 지구에서의 삶도 얼마 남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청소기가 이 정도 되면 고쳐 쓰는 것보다는 새 걸 구입하라고 남자는 권유하는 편이었다. 마침 지구와 닮은 별이 형성되기에 알맞은 상태라니. 얼마나 좋은 타이밍인가. A/S맨이 있을 거야. 지구에게도. 남자는 그 사람에게 묻고 싶었다. 새 지구로, 교체할까요?
오늘의 살인사건은 라스베이거스 식당에서 일어났다. 범인은 남편이나 동생인 것 같았다. 언제나 가족이 첫 번째 용의자. 작은 증거도 놓치지 않는 게 중요했다. 드라마를 보며 남자도 작업복 주머니에 넣어온 오늘의 범죄 증거물들을 서랍에 담았다. 10장을 모으면 치킨 한 마리가 무료인 쿠폰 1장과 그물 스타킹과 공룡의 꼬리. 별것 아닌 것 같아도 무료쿠폰 9장을 모으고 나면 마지막 1장이 아쉽겠지. 아이는 잃어버린 퍼즐 한 조각 때문에 영영 공룡을 완성하지 못할 거야. 모든 잃어버린 것들은 아무리 작고 하찮은 거라도 이렇게 거대한 퍼즐의 일부분인데 사람들은 그걸 몰라. 아이는, 울음을 터뜨릴까? 비어 있는 퍼즐 한 조각을 찾기 위해 침대 밑을 확인하고 책상 서랍을 뒤지다가 뒤늦게 결코 채워지지 않는 상실감에 엉엉 울지도 모르지. 그렇게 소중한 거라면 소중히 간직했어야지. 남자라면 엄하게 타이를 것이다. 자신이라면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장 좋은 부모자식 관계란 혈연으로 이어지지 않은 사이일지도 모른다. 아이의 태생과 유전적 특질을 책임지지 않은 부모가, 어쩔 수 없이 물보다 진한 피로 끌리는 부모보다 아이를 훨씬 제대로 된 인간으로 키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가족이라면, 가족이란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야.
범인은 남편이었다. 남자라면 완전 범죄도 가능할 것 같았다. 잠이 오지 않아 남자는 포르노를 틀었다. 마스터베이션이라도 하면 잠이 올 것 같았지만 요즘은 포르노를 봐도 쉽게 흥분되지 않았다. 남자는 발기시켜 보려고 죽어있는 페니스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다가 서랍에 넣어둔 스타킹을 떠올렸다. 돌돌 말린 검은색 스타킹에는 무늬가 새겨 있었다. 꽃인가? 남자는 천천히 스타킹을 신어보았다. 촘촘한 그물 스타킹에 감싸인 다리가 손바닥 아래서 매끄럽게 미끄러졌다. 종아리에서 검은 장미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치, 여왕 같구나. 남자의 페니스가 우뚝 섰다.
페니스는 이내 수그러들었다. 성욕도 환경에 의해 자연 도태되는 모양이지. 사라진 공룡들처럼. 어린아이의 것처럼 작고 말랑말랑한 페니스를 만지작거리며 남자는 멍하니 벽에 붙여놓은 갈라파고스 군도의 사진을 보았다.
에콰도르 서쪽 해안으로부터 약 1000킬로미터 떨어진 외딴섬은 1835년 비글 호를 타고 온 찰스 다윈이 진화론의 단서를 발견한 섬이었다. 몇 달 전, 붕어빵을 싸고 있던 잡지에서 갈라파고스군도의 기사를 읽었을 때 남자는 찰스 다윈처럼 진화의 비밀을 깨달았다. 단지 찰스 다윈보다 170년 정도 늦었을 뿐이었다. 이 섬에는 하늘을 찌르는 원시림 '데이지 트리'가 빽빽하게 산타크루즈 섬의 분화구를 덮고 있다고 했다. 해바라기 과 식물의 일종인 데이지 트리는 보통은 키가 작지만 갈라파고스에서는 다른 나무나 천적과의 경쟁이 없었던 까닭에 15미터까지 자라났다고 한다. 상상을 초월한 거대한 식물이 어디에나 존재하는 곳. 갈라파고스.
갈라파고스에 가면 나도, 키가 10미터쯤 더 자랄 수 있을까. 페니스도, 남자는 자신의 페니스를 보았다. 내 페니스도 거대해지겠지. 거대한 페니스로 지구에 구멍을 뚫고 싶었다. 깊이 더 깊이. 세게 더 세게. 쑥. 거대한 성기를 빼보면 거대한 구멍만 남겠지. 그리고 그 구멍 너머로 거대한 우주가 보일지도 몰라. 그러면 거대한 페니스를 로켓 삼아 우주로 날아가야지. 머나먼 우주에서 바라보면 지구는 보이저 1호가 찍은 사진처럼 아직 연약하고 아름다울지도 몰랐다.
무인우주선 보이저 1호는 1977년 태양계 행성을 탐사할 목적으로 발사되었다. 1977년은 남자가 태어난 해였다. 13년이 흐른 뒤인 1990년, 배터리는 다 닳고 관성으로만 진행하던 보이저 호는 지구의 사진을 찍어 전송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몇 달 후, 실현가능성이 없을 것 같던 이 명령에 따라 보이저 호는 지구를 찍은 여러 장의 사진을 보내왔다. 창백한 푸른 점 같은 지구. 지금은 임무를 끝내고 관성에 따라 홀로 떠도는 중이라고 했다. 남자는 때로 자신이 보이저 1호가 꾸는 꿈이 아닐까 생각했다. 200만년 동안 광대한 우주를 여행해야 하는 보이저 1호의 꿈.
보이저 1호가 찍은 사진 속의 지구는 왜 그토록 아름다워 보였을까.
*
이 악당! 죽어라!
붉은 가면을 쓴 사내아이가 칼을 휘두르며 식당을 휘저었다. 아이의 부모는 고기를 구우며 테이블 사이를 날뛰는 무법자를 보며 웃고 있었다. 남자가 먼저 왔지만 남자가 주문한 음식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아이가 남자에게 칼을 들이밀었다. 이 악당! 난 정의의 용사 레스큐 맨이다!
아이들은 어쩌면 이렇게 어리석을까. 아이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넌 정의의 용사가 아니란다. 너 같은 아이가 바로 물리쳐야 할 악당이야. 버릇없는 너와 무책임한 너의 부모 같은 인간들.
악당은 바로 너란다.
남자는 아이의 칼을 뺏어 찌르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장난인 줄 아는지 아이는 키득키득 웃었다. 거짓말! 너의 정체를 밝혀라. 소리치는 아이에게 남자는 속삭였다. 아저씨는 사실, 지구를 구하러 온 클린맨 이란다. 정의의 칼을 받아라.
클린맨이라고 적을까? 남자는 설렁탕이 나오길 기다리며 앨리스의 편지를 다시 읽었다. 앨리스는 남자가 후원하는 몽골의 고아 소녀였다. 몽골의 아이들은 1달러면 한 달간 점심을 먹을 수 있습니다. 이 아이의 가족이 되어주세요. 덧니가 난 몽골의 여자아이가 까만 눈동자로 남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인터넷에 뜬 배너광고를 통해 남자는 몽골의 7살짜리 여자아이와 가족이 되었다. 피가 섞이지 않은 가족. 거기다 같이 살지도 않고 언어도 통하지 않는 가족이라면 가장 이상적일지도 모른다. 앨리스는 남자가 소녀에게 붙여준 영어 이름이었다. 자신의 이름은 존, 이라고 소개했다. 존 도. 아무개나 무명씨와 같은 익명의 이름.
공주가 되고 싶다고 했다. 아저씨는요? 앨리스가 물었다. 내가 뭐가 되고 싶냐고? 남자는 학교를 졸업한 후 뭐가 되고 싶냐는 질문 따위는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이런 건 지식인에 물어도 알 수 없겠지.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 걸까. 남자는 생각했다. 클린맨?
깨어나요, 클린맨.
그러니까, 그것은 반 토막 난 깍두기였다. 남자는 설렁탕에 깍두기 국물을 부으려다가 그것을 보았다. 누군가 먹다 남긴, 반쯤 베어 문 잇자국이 선명한 깍두기. 서둘러 먹고 자리를 비켜줘야 할 정도로 성황인 식당이었다. 벽에는 대박집으로 소개됐을 때의 방송사진과 기사가 붙어 있었다. 남이 먹다 남긴 반찬을 재활용하는 식당 주제에. 이렇게 불합리한 세상이 있을 수가. 남자는 감탄할 지경이었다. 남자는 착한 사람이었다. 길에 쓰레기를 버린 적도 없고 노상방뇨를 한 적도 없었다. 그래도 이 별은 남자에게 너무나 적대적이었다. 먼저 와도 남보다 늦게, 남이 먹다 남긴 깍두기나 대접받는 것이다. 일어나요, 용사여. 남자는 우주의 외침을 들은 것 같았다. 지구는 더 이상 가망이 없었다. 남자가 청소기 서비스기사가 된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지구는 따뜻한 먼지로 만든 별. 남자는 지구를 없애기 위한 소명을 타고난 클린맨이었다.
아저씨는 클린맨이란다. 남자는 편지에 적었다. 클린맨의 캐릭터도 그렸다. 남자는 어릴 때부터 상상력이 풍부했다. 만화도 곧잘 그렸다. 반에서 50명의 아이들 중 1/100, 1/150의 존재감밖에 가지지 못한 아이였지만 만화를 그릴 때는 확실히 1/50의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고 때로는 1/25까지도 가능했다. 선생님께 보여 드리고 싶어 일부러 수업시간에 만화를 그려 주의를 끌었던 적이 있다. 혼내러 왔던 선생님은 남자의 솜씨에 감탄했다. 너도 잘하는 게 있구나! 이름이 뭐더라?
너도! 잘하는 게! 있구나! 그때 남자는 자신이 만화를 그리는 것 외에는 잘하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남자는 더 이상 만화를 그리지 않았다. 우주선도, 별의 여왕도 그리지 않았다. 그냥 모든 걸 고르게 못 하는 이름 없는 아이로 남았다.
어릴 땐 나도 여왕이 되고 싶었지. 머나먼 별에서 권력의 암투에 희생당해 지구로 보내진 여왕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지. 언젠가 모선을 보내올 거라고. 돌아오라고. 돌아와서 우리의 여왕이 되어 달라고. 남자는 클린맨의 가슴에 검은 장미를 그려 넣었다. 커다란 청소기를 들고 버려진 박스와 구겨진 종이, 플라스틱 조각으로 만들어진 옷을 입고 있어도 클린맨은 여왕처럼 우월했다. 거대한 진공청소기로 지구의 모든 더러움을 제거하는 클린맨. 남자는 60억분의 1의 사나이가 되었다.
*
남자는 더욱 열심히 일했다. 청소기가 먼지를 빨아들일 때마다 지구가 한 뼘씩 줄어든다고 생각하면 절로 신이 났다. 먼지가 다 모이면, 이 먼지들로 새로운 지구를 만들어야지. 이 별은 남자를 언제나 돌연변이처럼 대했다. 적응하기 위해 사용법을 꼼꼼히 읽고 규칙을 준수해도 늘 배타적이었다. 맞지 않는 60억 피스의 퍼즐에 끼어든 잘못된 조각 같았다. 조금만 더. 부지런히 먼지를 모으면 남자가 몸을 구기거나 접지 않고도 편안히 들어앉을 수 있는 새로운 별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남자가 열심히 지구를 사라지게 할수록 고객들의 평가는 올라갔다. 남자는 이달의 우수 직원으로 뽑혔다. 남자는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콧노래도 찾았다. 하나도 남김없이 싹싹. 클린 클린 클린맨.
남자 이전에 많은 이들이 클린맨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남자도 클린맨의 세계에 들어오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 클린맨의 세계는 이미 포화상태였다. 이 지구를 폐기시키고 새로운 지구를 건설하기 위해 청소기나 그물, 집게나 먼지떨이를 들고 뛰어다니는 클린맨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그들은 이미 많은 것들을 사라지게 했지만 그들의 활약상은 어디에도 보고되지 않았다. 뉴스에도 신문에도 떠도는 소문으로도 클린맨의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았다. 서랍에서 사라진 양말 한 짝, 책상 위에서 사라진 펜들, 잃어버린 우산들과 대답을 듣지 못한 질문들, 반도 돌아오지 않은 애정의 크기……. 매일 무언가 사라졌지만 사람들은 쉽게 눈치 채지 못했다. 은행 잔고가 사라지고 북극의 빙하가 녹고 여름이 계속되어 가을이 오지 않고 겨울이 오면서 사람들은 조금 두려움을 느꼈지만 그 모든 사라짐 뒤에 새로운 지구를 준비하는 클린맨들이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짝 잃은 장갑과 사라진 꿀벌과 불리지 못한 노래와 출간되지 못한 책과 알려지지 않은 진실과 돌아오지 않는 답장. 지구에서 사라진 것들이 저 우주에서 새로운 별로 옮겨가기 위해 머물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알았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남자는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공중화장실에서도 자신을 스쳐간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길을 걷다 보면 자신과 닮은 사람들이 거리에 넘쳐났다. 패스트푸드점에서 런치세트를 먹다가, 오뎅 하나를 먹고 국물을 세 번씩 리필해 먹다가, 남자는 자신을 복사한 듯한 고만고만한 인물들을 만났다. 혹시 저 남자도? 3만9900원 잭 필드 삼종 세트 바지를 입고, 싸구려 넥타이를 휘날리며 걷는 사람들. 지구를 없애고 새로운 별을 건설하는 소명을 띤 영웅들은 하찮은 모습으로 진짜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있는 법. 가장 하찮아 보일수록, 아주 작고 작아서 먼지처럼 쉽게 쓸어내고 닦아낼 수 있는 존재일수록 클린맨일 가능성이 컸다. 사람들이 클린맨을 눈치 채지 못한 건 그들이 드물어서가 아니라 어디에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디에나 있지만 너무나 많아서 눈에 띄지 않는 존재, 그게 클린맨이었다. 영웅이 지구를 지키고 한 나라를 지키던 시대는 갔다. 슈퍼맨은 미국의 영웅이었지만 스파이더맨은 뉴욕의 영웅일 뿐이었다. 이제는 직업의 분화시대, 영웅에게도 지역구가 필요하게 된 건지도 모른다. 한국의 영웅도 서울의 영웅도 아니고 개봉동의 영웅, 상계동의 영웅, 구로 2동의 영웅, 을지로 3가와 4가 사이 가로수 길의 영웅. 그래도, 그게, 영웅인가? 그건 그냥 통장이나 반장, 아파트 부녀회장 같은 거 아닌가. 보조금도 받지 못하는.
싼값에 대량생산되는 영웅, 클린맨. 시장에 가면 폭탄세일, 창고개방, 폐업처리, 따위의 문구를 달고 떨이로 팔 것 같은 꿈의 히어로. 클린맨의 세계에서조차 남자는 뒤처졌다. 남자는 꿀벌이나 빙하를 사라지게 하는 대담한 발상은 절대로 하지 못할 터였다. 단지 먼지를 조금 사라지게 할 뿐이었다. 80퍼센트 세일하는 철 지난 옷만 입으면 꿈도 남들이 꾸고 버린 꿈만 꾸게 되는 걸까? 유일한 꿈을 꾸는 시대, 영웅이 영웅다운 시대 또한 사라져 버렸다. 60억분의 1의 사나이가 아니라 단지 60억 인구 중의 한 명이 되기 위해 클린맨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 클린맨의 세계에서도 가장 낮은 자. 남자는 다시 하나의 점이 되었다.
버스는 오지 않았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사람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구조선을 기다리듯 버스를 기다렸다. 그중에는 작은 보따리를 든 중년의 딸과 노모도 있었다. 노모는 중년의 딸에게 자꾸 만원짜리 지폐를 쥐여주었다. 딸이 기어코 사양하고 버스에 타자 밖에서 쳐다보던 노모가 딸이 앉은 창을 향해 만원을 던지고는 굽은 등으로 내처 돌아갔다. 만원 한 장이 허공을 맴돌았다. 딸이 창밖으로 손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다. 어어어 사람들이 바람에 날리는 만원을 쳐다보며 당황하는 사이 버스는 출발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달렸다. 만원짜리 지폐를 쥐고 버스를 따라잡았다. 세워요. 버스의 승객들이 소리쳤다. 운전기사는 버스를 세웠다. 남자는 버스에 올라 중년의 딸에게 만원을 건넸다. 딸의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정말, 고마워요. 여자는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어쨌거나, 가 아니라 진심으로. 버스 안의 승객들이 모두 웃으며 지켜봐 주었다. 처음으로 진짜 영웅의 일을 한 것 같았다. 버스를 세워준 운전기사도, 세워달라고 소리친, 지친 하루를 끝내고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었을 승객들도, 모두가 영웅이었다. 그들은 모두 어떤 하루를 견뎌왔건 잠들기 전 생각하겠지. 참 좋은 하루였어, 라고. 그러니까. 이 지구는 참.
잘못 올라탄 버스는 남대문시장을 지나는 노선이었다. 잘못, 올라탄 게 아닌지도. 남자는 오래전 떠났던 곳으로 돌아왔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식당은 영업 중이었다. 주문을 하지 않아도 남자의 앞에 이내 따뜻한 해장국 한 그릇과 반찬 그릇 몇 개가 놓였다. 모두가 네모 반듯한 깍두기와 멸치볶음, 그리고 따뜻하고 두툼한 포근포근한 계란찜. 어릴 때부터 남자는 따뜻한 계란찜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졌다. 멀리 우주를 떠돌던 영혼이 비어 있던 육신 안에 들어와 노란 계란이 부풀어 오르듯 포근히 차오르는 것 같았다.
굶고 다녔냐. 많이들 처먹어라.
어머니는 언제나처럼 배고픈 손님들에게 공깃밥을 하나씩 더 내어주며 말했다. 어떤 것들은 사라졌지만 어떤 것들은, 소중한 것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식당의 벽에는 남자가 중학생 때 과학 동아에서 오려 붙여놓은 보이저 1호가 찍은 지구의 사진이 있었다. 창백한 푸른 별. 지구는 기억보다 더 작고 보잘것없었다. 해 볼만, 한 거 아닌가? 애초에 내게 맞는 퍼즐이 아니라 해도, 나의 규칙과는 다르게 돌아간다 해도, 이렇게 우주에서 보잘것없는 지구라면 보잘것없는 나로도 충분한 것 아닐까. 먼지를 제거하고, 깨끗이 청소만 해주면 새걸로 교체하지 않고도 재활용이 가능하지 않을까. 이 지구.
남자라고 꼭 지구를 사라지게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어디든 자신이 올바른 사용법에 따라 쓰이는 별에서 살고 싶었을 뿐이었다. 만약 지구가 이 남자의 사용법을 지금이라도 제대로 숙지해서 올바른 곳에서 올바르게 쓰려 한다면, 그렇다면. 남자는 버스를 세울 수밖에 없었던 운전기사처럼 브레이크를 밟고 멈춰서고 싶었다.
꿀벌들은 정말 어디로 갔을까. 빙하는, 야생표범들은, 그들은 조금 더 지구를 참아줄 순 없었을까. 클린맨들이 가져간 많은 것들을 남자는 떠올렸다. 오래전 공룡부터 이력서를 보낸 회사에서 돌아오지 않은 회신들까지, 지구에서 사라진 많은 것들이 우주에 둥둥 떠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너무 많은 것들이 사라졌어. 이제 너무 늦은 걸까. 그들은 모두 지구가 아닌 새 별이 생기기만을 기다리는 걸까. 그곳에서 다시 빙하가 되고 표범이 되고 꿀벌이 되고……. 그러니까 이건, 지구잖아. 남자는 깨달았다. 다른 별을 만들기 위해 지구에서 가져간 이토록 많은 것들, 이건 마치 지구를 복사해서 우주에 컨트롤+v로 붙여넣기 하려는 것 같잖아.
남자는 웃었다. 클린맨들, 보잘것없는 그들은 지구를 너무 사랑했던 거다. 똑같은 별을 만들고 싶을 만큼. 지구도 또한 우주에서 보잘것없는 하나의 창백한 푸른 점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이 사람들. 말하자면 이건 짝사랑하는 여자의 물건을 훔쳐가 모아두는 일종의 변태들일 뿐이잖아. 남자는 이 변태들의 세계가 역시 마음에 들었다. 남자는 항상 여왕이 되고 싶었다. 자신만이 이 별의 변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구를 재활용해보겠다고 애쓰는 이 사람들 모두 변태가 아닌가. 아무리 지구가 자신에게 사랑을 되돌려주지 않아도, 여전히 이 별에 대한 사랑을 멈출 수 없는 변태들. 그들은 모두 보잘것없는 하나의 점에 불과하지만 하나의 점이기 때문에 모이면 지구에 아름다운 무늬를 새길 수도 있었다. 먼 우주에서 보면, 전 세계에 먼지처럼 퍼져 있는 클린맨들은 거대한 은하수가 되어 아름답게 반짝이며 흐를지도 몰랐다. 반딧불처럼, 별똥별처럼, 어쩌면 거대한 청소기의 파워 버튼처럼 깜박일지도.
아직 식사 되나요? 문을 닫으려는데 청년 한 명이 문을 열었다. 영업시간은 이미 지나있었다. 너무 늦었죠, 어머니. 미안한 얼굴로 청년이 물었다. 어머니는 그릇에 계란 세 개를 깨어 젓기 시작했다. 늦기는. 손님 있는데 가게가 문 닫아? 얼른 들어와 처먹기나 해.
어머니들은 언제나 옳다. 올바른 질문을 던지지 않아도 올바른 답을 주신다. 배고픈 손님들이 있는 한 가게는 문을 닫을 수 없는 것이다. 손님들이 다 집에 돌아가고 난 뒤, 어머니는 그제야 가게 문을 닫았다. 구석에는 남자의 회사에서 만든 청소기가 놓여 있었다. 나의 별을 청소해야지. 클린 클린 클린맨. 전원을 누르자 위잉 작동을 시작하는 소리가 났다. 멈춰 있던 지구가 돌아가는 것 같았다. 따뜻한 먼지가 춤추듯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청소를 끝내고 남자는 청소기를 청소하기 위해 제품을 분해했다. 쿨럭, 청소기는 흡입구에 뭉친 작은 먼지 덩어리를 뱉어냈다. 하마터면 남자가 사라지게 할 뻔한 작은, 지구였다.
*
아저씨는 나의 영웅이에요.
남자는 앨리스가 한글로 삐뚤게 쓴 글씨를 오래오래 쳐다보았다. 앨리스의 편지는 신용카드 청구서와 마트 세일 전단지 사이에 끼어 있었다. 남자가 보낸 공주 옷을 입은 앨리스가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아래 알아보기 힘든 글씨가 있었다. 우주에서 보내온 신호를 해독하듯 남자는 한 글자 한 글자 눈으로 밑줄을 그으며 읽었다. 아저씨는 나의 영웅이에요.
1달러로 영웅이 될 수 있는 시대. 남자는 이 싸구려 영웅들의 시대가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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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야. 너는 이미 공주란다.
남자는 영어사전을 펼쳐놓고 앨리스에게 편지를 썼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소통할 때 말 뒤의 진짜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는 태어날 때부터 공주였단다. 네가 아직 우주의 씨앗이었을 때 너는 동쪽에서 누구보다 반짝이는 별이었다. 내가 여왕이었을 때, 나는 가장 빛나는 우주의 별을 따다 내 뱃속에 넣었다. 그렇게 네가 태어났지. 나는 가장 빛나는 별을 딴 죄로 너와 헤어지게 되었어. 지금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나는 너의 반짝임을 보고 너를 찾아낼 수 있었단다. 네가 남들과 다르다는 생각에 힘들거나, 누군가 너를 괴롭히거나, 이 생이 널 배신하거나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껴질 때면, 언제나 생각해라. 너는 별에서 온 공주님이란다. 공주의 생각을 하고 공주의 언어로 말하고 공주의 꿈을 가지렴.
남자는 앨리스가 공주라는 것을 진심으로 믿었다. 자신이 여왕이라는 것을 믿듯이. 매일 아침 여섯시면 눈을 떠서 매일 저녁 일곱시까지 일을 했다. 매일 더 용감한 사자가 되었고 똑똑한 양철로봇이 되었고 가슴이 따뜻한 허수아비가 되었다. 이것이 여왕의 삶이 아닌가, 남자는 생각했다. 매일 아침 하찮은 나 자신으로 살기 위해 깨어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인지 남자는 안다. 60억분의 1. 수많은 인류 중 한명으로 살기 위해 잠을 자면서도 허공에 발길질을 하며 지구를 돌리는 사람들. 그 모든 용감한 사람들에게 기사의 칭호를 내려주고 싶었다. 이곳은 내가 사랑하는 나의 영토, 나의 백성들.
새 부품 대신 중고부품을 교체하고 남은 돈으로 남자는 후원계좌를 만들었다. 그동안 벌금을 부과했던 고객들에게 긴 사과의 편지를 쓰고, 고객의 이름으로 후원한 몽골의 어린이들의 연락처를 동봉했다. 56명의 고객 중에 23명이, 본사에 항의하는 대신 꾸준히 몽골의 아이들을 후원했다. 23명이었다. 이 지구는 아직도 이렇게 놀라운 일을 벌이곤 했다. 아직은 23명이지만 곧 230명, 2300명까지 늘어날지도 몰랐다. 몽골에서 배부르게 점심을 먹는 아이들만큼 지구도 건강해질 것 같았다. 씨앗을, 심는 거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남자도 스피노자와 똑같은 생각을 했다. 남자가 스피노자처럼 역사에 기록될 수 없는 건 단지 스피노자보다 너무 늦게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시간의 문제였지만 남자는 더 이상 자신이 잘못된 시간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몽골의 7살 여자아이와 서울의 33살 남자가 가족이 될 수 있는 2009년이란 시간이 마음에 들었다.
남자는 올해의 우수사원으로 뽑혔다. 재활용품을 이용한 지구를 구하는 청소기는 사내 아이디어 공모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제품 폐기 시에도 청소기의 98퍼센트를 재활용할 수 있는 친환경 진공청소기였다. 남자는 원한다면 특별휴가를 신청할 수도 있었다. 몽골에, 갈까? 갈라파고스군도 사진 옆에 남자는 몽골의 사진을 붙여놓았다.
청량리, 서울역, 신촌 같은 익숙한 정류장 이름이 적힌 204번 버스는 서울 시내를 달리듯 울란바토르 시내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저 버스는, 실은 우주선이 아닐까. 청량리를 출발해서 울란바토르를 지나 신촌에 도착하려면 멀리 우주정거장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테니까. 몽골이 남자의 두 번째 고향처럼 가깝게 생각되었다. 남자는 언젠가 서울역에서 그 버스를 타고 몽골에 갈 생각이었다. 언젠가는.
Q〉 먼지가 안 생기게 할 수는 없나요?
남자는 여전히 궁극의 질문을 찾는다. 남자는 답변을 입력했다.
A〉 물론 먼지가 없으면 세상은 좀 더 살기 편안해지겠죠. 매일 청소를 하지 않아도 되고, 매일 와이셔츠를 빨지 않아도 깨끗할 테니까요. 하지만 먼지들은 세상을 한층 아름답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늘의 노을은 대기층을 덮은 먼지 입자 덕분에 생깁니다. 또한 구름이나 안개를 형성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먼지가 없다면 눈이나 비가 내리는 확률이 훨씬 줄어들어 날씨와 기후가 크게 변할 것입니다.
지구가 따뜻한 먼지로 이루어진 행성이라는 걸 아시나요? 어쩌면, 먼지가 다 사라진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별, 지구도 사라지게 될지 모릅니다.
아직 궁극의 질문은 찾지 못했지만 남자는 이 세계가 좋았다. 질문을 하면 누군가 답을 한다. 아무리 시시한 질문일지라도, 아무리 헛된 답일지라도, 모두가 어두운 우주에 떠있는 별들처럼 반짝였다. 먼지처럼 보잘것없는 익명의 너와 내가 만나 지식을 나눈다. 우리는 모두 이 생을 잘 살아내고 싶은 것이다. 지겹고 덧없는 질문과 답변이 끝나지 않을 때까지 지구는 문을 닫을 수 없는 것이다. 남자는 궁극의 질문을 찾은 것도 같았다.
앨리스에게 보낼 편지를 빨간 우체통에 넣고 돌아오며 남자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은 보이지 않았지만 남자는 그곳에 수많은 별들과 사라진 꿀벌과 잊혀진 것들이 잊혀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안다. 남자는 히치하이킹을 하는 것처럼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청량리를 출발해 은하수를 건너 울란바토르로 가는 204번 버스가 먼 우주를 돌아와 남자를 태우기 위해 끼익, 브레이크를 밟고 정지할 것 같았다. 우주에 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늘을 향해 엄지손가락만 치켜들면 되었다. 〈끝〉
-심사평
본심에 오른 10편이 모두 잘 읽혔고 이야기도 비교적 잘 끌어갔다. 그러나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는 응모작은 한 편뿐이었다. 쉽게 당선작을 결정했다. '슈팅게임'은 서술이 차분하고 구성도 매끄러웠지만, 그만큼 단선적이고 이미 정리가 끝난 보편적인 이야기에 머물러 있다는 느낌이었다. '식물인간'은 귀찮다는 듯한 독특한 서술이 인상적이었지만 주제의 구심점이 애매했다. '어항'은 카메라가 돌아가는 듯 시각적인 정밀묘사가 매력적이었지만 부정확한 언어 사용과, 특히 어머니와 딸로 이어지는 불륜의 트라우마라는 상투성이 거슬렸다. '틈'은 안정적이었지만 착한 이야기일 뿐이었다. '미스 갈라의 겨울비'는 할 말이 뚜렷하다는 면에서 호감을 주었지만 세계가 좁고 작가 자신이 지나치게 노출되어 있다는 점이 미숙함으로 비쳤다. '드라마틱'은 문제제기나 군더더기 없는 구성, 흥분하지 않는 서술에서 솜씨가 엿보였지만 결말이 상투적이고 설정에도 무리가 있었다.
당선작은 '청소기로 지구를 구하는 법'이다. 당선 이유를 세 가지로 말하고 싶다.
첫째, 굳이 사회적 사건을 소재로 삼지 않더라도, 개인의 사소한 일상사라고 해도, 지금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과 구조적 성찰이 없으면 그건 이야기일 뿐이다. 둘째, 소설은 콩트가 아니므로 무조건 뜻밖의 결말이라고 해서 반전이 성립되는 건 아니다. 셋째, 당선작을 놓고 작가가 여성인지 남성인지 심사위원 둘의 생각이 엇갈렸다. 화자가 남성이고 그 시점을 무리 없이 소화해내고 있지만, 디테일과 언어를 다루는 방식의 섬세함으로 보아 여성이리라는 의견. 남성의 변형된 성적 판타지를 실감나게 묘사하는 점에서 남성이리라는 의견. 결론은 '멋진 신인작가의 탄생'이었다. 축하를 보낸다.
-당선소감
소설을 고치던 중이었다. 글을 쓴답시고, 매일 따뜻한 카페에 나와 4천원짜리 카페라테를 마셨다. 하나의 형태가 되지 못하고, 400원의 경제적인 가치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문장들이 컴퓨터 안에서 눅눅히 좀이 슬어가곤 했다. 나는 12월 18일의 다이어리에 커피 4천원, 이라고 적고, 내가 언제까지 뻔뻔하고 염치없이 글을 쓰는 '척' 하며 매일 4천원의 커피 값을 지불해도 좋은가, 에 대해 생각했다.
당선 연락을 받고 우주를 떠돌던 남자를 다시 꺼내 보았다. 우격다짐과 아우성 가득한 글이었지만 최소한 거짓은 아니었다. 클린맨이 진짜 영웅이었다니. 내가 쓰는 사람으로 이 지구에서 쓰여도 좋다고, 남자가 내 파워 버튼을 꾹 눌러주며 웃는 모습이 보였다. 고마워요, 클린맨.
소설 속의 남자를 따라 후원계좌를 열었다. 앞으로 소설 하나를 발표할 때마다 하나씩 더, 다짐하면서. 허공중에 헛발질하던 내 발밑에 페달이 닿기 시작했으니, 앞으로 열심히 돌리겠다. 열심히 페달을 돌리면 내 두 발이 어두운 지구 어디선가 가로등 하나쯤 반짝 켤 수 있으리라, 믿으면서.
세상이 내게 이렇게 좋은 일을 해줄 이유는 없다. 내가 아니라, 게으른 내가 오래 꿈꿀 수 있도록 지켜봐 주신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보내는 위로라 생각한다. 나는 더 미안하고 더 부끄러워하겠다. 따뜻한 카페에서 비싼 4천원짜리 카페라테를 마시며 글을 쓰는 일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알고 있다. 매일 부끄러워하면서 다만 성실하게 쓰고 또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