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1세대 철학교사. 등 대중을 위한 철학책을 60권 남짓 쓴 작가. 2033년 1월 31일 새벽, 서울의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 향년 64살.
생전에 안광복은 자기 인생을 도스토옙스키에 견주곤 했다. 도스토옙스키는 평생 빚에 쫓겼다. 별처럼 많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은 생계에 대한 절박함이 빚어낸 결과였다. 안광복의 집안은 한국전쟁 때 월남한 실향민이었다.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살아남아야 했던 부모 세대의 비장함은 그의 뇌리에 DNA처럼 박혀 있었다.
어린 시절, 그의 집은 악다구니로 들끓던 시장 한복판에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돈을 놓고 벌이는 세상의 비정함에 일찍 눈떴다. 청소년 시기에 그는 ‘이중(二重)의 콤플렉스’에 빠져들었다. 생존에 대한 두려움이 영혼의 한쪽을 짓눌렀다면, 다른 한쪽은 ‘품위 있는 삶에 대한 갈망’에 사로잡혔던 거다.
삶에는 먹고사는 문제밖에 없을까? 이 물음에는 그가 철학과에 진학한 이유가 담겨 있다. 하지만 그는 생계유지에 대한 공포를 끝내 떨쳐내지 못했다. 졸업 뒤 그는 ‘철밥통’을 좇아 교사가 된다.
교사가 된 다음 그는 엄청난 ‘생산성’을 보여주었다. 수업과 입시에 올인하면서도 매년 평균 2권 이상의 책을 펴냈다. 주말과 방학을 이용해서 해마다 70여 회 인문학 관련 강연을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안광복의 일상은 칸트와 비슷했다. 시계처럼 규칙적이었다는 뜻이다. 아침 8시 출근, 저녁 6시 퇴근. 저녁 식사 뒤 8시 취침. 새벽 2시에 일어나 5시 30분까지 책을 읽고 글쓰기. 5시 30분 다시 취침. 7시에 일어나 출근 준비.
그는 30년 넘게 이런 리듬으로 살았다. 항상(恒常)적인 일과가 높은 생산성을 낳았던 셈이다. 이런 기계 같은 생활에서 그는 과연 행복했을까? 사십 즈음, 안광복은 어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기 인생을 이렇게 갈무리했다.
“중국 철학자 펑유란 선생은 죽을 때 이렇게 말했다지요. ‘나는 살면서 내가 할 일을 모두 끝냈다.’ 저는 제 삶을 마칠 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치열하게 살았다. 그래서 후회가 없다.’”
그는 멈춰 선 순간이 가장 힘들다고 했다. 두려움은 이를 이겨내려는 실천을 통해서만 이겨낼 수 있단다. 그는 생존에 대한 두려움, 품위 있는 삶에 대한 갈망을 부단한 공부를 통해 넘어서려 했다. “치열하게 사는 사람만이 세상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 그가 입에 달고 살았던 삶의 모토다.
그의 책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 영미권에서도 널리 번역돼 읽힌다. 일부 학자들은 그를 어설픈 문체로 학문의 격을 떨어뜨린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내몰곤 한다. 반면 쉽고 간명한 글로 철학의 대중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도 많다. “경제에만 매달리는 사회는 먹고사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위대한 욕망을 품는 사회만이 위대한 역사를 열 수 있습니다. 제가 평생 욕망이론에 매달렸던 이유이지요.” 이 말은 철학자로서, 철학교사로서 안광복의 인생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지 않을까?
덧_
나에게 쓰는 부고가 아니라 누군가 이렇게 써 주었으면 하는 투의 글이다. 다른 이에게 나는 이렇게 보이고 싶다는 바람으로. 미리 쓰는 부고가 원래 희망을 담고 있는 게 아닌가.
남이 쓰는 부고 대신 자신이 미리 써서 삶과 사랑을 기록하기
이것은 너무 늦게 도착한 부고다. “내 아내는 우리나라의 큰 성씨인 안동 김 씨이다. 향년 22살. 그중 8년을 나와 함께 살았다. …아아! 당신처럼 현숙한 사람이 중간의 수명도 누리지 못하고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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