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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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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기록하는 이유, 부고가 남기는 사회적 기억 - 부고의 사회학 죽음을 기록하는 이유, 부고가 남기는 사회적 기억현대 사회에서 부고 기사는 점점 그 의미가 희미해지는 듯 보인다. 휴대폰 문자로 부고 소식을 받는 일은 일상이 되었고, 유명인의 죽음 역시 인터넷에서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빠르게 정보가 흐르는 시대에, 굳이 부고 기사를 읽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하지만 부고는 단순한 뉴스가 아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기억하고, 그의 삶을 사회적 맥락 속에서 자리매김하는 방식이다. 실제로 미국 뉴욕 타임스는 2001년 9·11 테러 이후 ‘슬픔의 초상화’라는 기획 보도를 통해 같은 해 말까지 1천800개에 달하는 부고 기사를 발행했다. 이 기록은 사람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공동체의 상실을 세밀하게 담아내며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Portraits of GriefE..
한 줄 부고에 묻힌 삶, 언론은 어떻게 기록할까 한 줄 부고에 묻힌 삶, 언론은 어떻게 기록할까신문이나 온라인에서 흔히 보는 부고 알림은 대개 이렇게 한 줄로 끝난다.“○씨 별세, ○씨 부친상=○일, ○장례식장, 발인 ○일 ○시. ☎️ ○○-○○-○○”전직 대통령, 정치인, 연예인처럼 널리 알려진 사람의 죽음은 긴 기사나 영상으로 남지만, 일반인의 죽음은 이렇게 한 줄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언론이 조명할 대상은 의미 있는 삶을 남긴 이들이겠지만, 현실은 지나치게 제한적이고 형식도 단조롭다.그럼에도 최근 몇몇 기자들은 덜 조명된 죽음을 발굴하고 기록을 확장하려는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가만한 당신, 못다한 말“(길게 읽고 오래 생각할) 긴 부고가 필요한 까닭”어떤 이의 죽음을 맞아 그의 삶을 알리고 기억하려 쓰는 글을 부고라 한다. 죽음은 모두 같지만..
산재 사망 야간노동자 148명의 기록 담은 서울신문 '달빛노동 리포트' 우리가 잠든 사이, 스러진 사람서울신문 12일자 1면은 평소 우리가 잘 보지 못했던 죽음으로 채워졌다. 골판지 제조업체 노동자, 아파트 경비원, 택배 기사. 올해 상반기 산업재해로 세상을 떠난 야간노동자 42명의 부고가 전면을 가득 메웠다.그 위를 두른 검은 띠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우리가 잠든 사이, 야간노동자들이 스러집니다. 올 상반기에만 148명. 통계 숫자에 가려진 그들의 죽음과 고달픈 밤의 여정을 전합니다.”밤이 깊어도 그들의 노동은 멈추지 않았다. 새벽까지 재봉틀을 돌렸던 전태일, 화력발전소 하청업체에서 사망한 김용균 씨, 그리고 이름 모를 또 다른 수많은 사람들. 그들의 삶은, 그들의 죽음은, 우리가 잠든 사이 사라졌다.서울신문 탐사기획부는 이번 기획에서 화려한 그래픽이나 감정을 자극하는..
금정굴 진상규명 이끈 마임순 전 회장 별세 향년 73세 마임순, ~ 2025년 9월 16일, 향년 73세 어둠 속에서 빛을 판 사람 — 마임순 회장을 기억하며그녀는 평생 삽을 들고 어둠 속으로 내려갔다. 거짓이라 불린 역사의 땅을 파서, 진실의 조각을 하나씩 들어 올렸다. 그 이름, 마임순. 금정굴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운동의 얼굴이자, 한 세대의 고통을 증언한 사람. 그가 2025년 9월 16일, 일산백병원에서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3세였다.그의 인생은 처음부터 ‘빨갱이 시댁 며느리’라는 낙인으로 시작됐다. 그러나 그는 그 이름 아래 숨지 않았다. 오히려 그 낙인 속에서 삶의 방향을 찾아냈다. 억울하게 죽은 시댁의 사람들을 위해, ‘국가의 거짓’을 밝히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고양 금정굴 사건은 한국전쟁이 남긴 가장 깊은 상처 중 하나..
살림의 언어로 남은 시인, 김지하 김지하(金芝河), 1941년 2월 4일~2022년 5월 8일) 본명은 김영일(金英一) 살림의 언어로 남은 시인, 김지하—별세 3년, 오늘 그를 다시 기억하며김지하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어느덧 3년이 흘렀다.2022년 5월 8일, 강원도 원주의 집에서 향년 81세로 생을 마감한 그는지금도 여전히, 이 땅의 언어와 양심 속에서 살아 있다.그는 시인이었고, 사상가였으며, 시대의 양심이었다.1941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한 뒤1970년대 초 시 「오적」으로 세상의 위선을 벼렸다.권력과 재벌, 언론, 종교를 신랄하게 풍자한 그 시 한 편으로 그는 감옥에 갇혔다.하지만 철창 속에서도 그는 언어의 무기를 놓지 않았다.그가 남긴 「타는 목마름으로」는 자유를 향한 갈망의 상징이 되었고,..
기억합니다 - 한겨레가 떠나는 이를 추모하는 방법 가 어언 35살 청년기를 맞았습니다. 1988년 5월 15일 창간에 힘과 뜻을 모아주었던 주주와 독자도 세월만큼 나이를 먹었습니다. 새로 맺는 인연보다 떠나보내는 이가 늘어나는 시절입니다. 지난해부터 코로나19 탓에 이별의 의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억합니다’는 떠나는 이에게 직접 전하지 못한 마지막 인사이자 소중한 추억이 될 것입니다. 부모는 물론 가족, 친척, 지인, 이웃 누구에게나 추모의 글을 띄울 수 있습니다. 사진과 함께 전자우편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원고료를 드립니다.한겨레 주주통신원(mkyoung60@hanmail.net), 인물팀([People@hani.co.kr](mailto:People@hani.co.kr)). 기억합니다가 어언 32살 청년기를 맞았습니다. 1988..
백기완이 없는 거리에서 - 김진숙 백기완(白基琓), 1932년 1월 24일~2021년 2월 15일 ‘아부지’를 미워하는 힘으로 버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미 ‘쓸데도 없는’ 딸이 셋이나 있던 아부지의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넷째 딸. 아부지처럼 안 사는 게 삶의 유일한 목표였던 나는 십대의 넘치는 에너지를 오로지 아부지를 미워하는 데 썼습니다. 중간에서 시달리다 못해 무당을 찾아간 엄마는 ‘둘이 한집에 살면 둘 중 하나는 죽는다’는 박수의 점사를 들고 와선 연속극에서처럼 머리에 띠를 매고 앓아눕고 마침내 저의 가출을 묵인, 방조하게 됩니다.엄마가 준 오천원을 들고 집을 나와 1600원짜리 부산행 기차표를 끊어 같은 한국이지만 말 한마디 못 알아듣는 부산에서의 노동자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고단하고 서러워 밤마다 베갯잇을 눈물로 적시는..
혁명가 존 몰리뉴를 기억하며 John Molyneux 존 몰리뉴, 1948년 9월 2일 ~ 2022년 12월 10일 마르크스주의 작가이자 활동가 존 몰리뉴(John Molyneux)가 12월 11일 더블린에서 74세로 세상을 떠났다.그는 평생을 국제사회주의 운동 속에서 살았다. 처음에는 영국의 국제사회주의자이자 사회주의노동자당(SWP)에서, 나중에는 아일랜드 사회주의노동자당/네트워크에서 활동했다.몰리뉴는 1968년, 전 세계를 휩쓴 반전운동과 혁명적 흐름 속에서 급진화된 세대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곧 국제사회주의 그룹의 핵심 이론가이자 가장 인기 있는 연사로 자리 잡았다.그의 첫 저서 『마르크스주의와 당』(1976) 은 마르크스, 룩셈부르크, 레닌, 트로츠키, 그람시가 남긴 혁명적 조직 이론을 분석하며, 지금도 조직 문제에 씨름하..
혁명가이자 탁월한 마르크스주의 저술가 존 몰리뉴 조사(弔詞) John Molyneux 존 몰리뉴, 1948년 9월 2일 ~ 2022년 12월 10일 존 몰리뉴가 2022년 12월 10일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갑작스럽게 타계했다는 소식에 세계 곳곳의 사회주의자들이 충격을 받고 슬퍼했다. 향년 74세였다.존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체제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학생과 청년 노동자 세대에 속한 가장 중요한 마르크스주의 저술가·활동가 중 한 명이었다.1968년 존은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전신인 ‘국제사회주의자들(IS)’에 가입했다. 당시 사우샘프턴대학교 학생이던 존은 ‘베트남연대운동(VSC)’에 참여하고 프랑스의 1968년 5월 반란 당시 파리를 방문한 경험을 통해 급진화했다. 존을 IS에 가입시킨 사람은 IS의 창립자 토니 클리프였다.존은 이후 평생 동안 ..
명예도 없이 사랑만 남기고, 백기완 선생을 기리며 백기완(白基琓), 1932년 1월 24일~2021년 2월 15일 혁명을 꿈꾸는 통일싸움꾼, 호통과 눈물의 이야기꾼 백기완 선생이 떠났다. 제 둥지를 부수고 날아오른 장산곶매처럼 남과 북을 갈라 치려는 모든 세력과 맞서 싸우고, 천둥 같은 호통을 권력자에게 날리며 밑바닥 민중을 눈물로 감싸주던 이였다. 심장과 폐를 무너뜨리는 병마와 싸우면서도, 일터에서 천대받고 쫓겨나고 죽어가는 노동자들이 눈에 밟혀, 마지막으로 남긴 말씀은 “김미숙·김진숙 힘내라.” 2019년 2월9일, 거듭되는 심장 수술과 치료로 쭉정이처럼 메마른 선생이 지팡이에 몸을 기대어 김용균씨 영결식이 열린 서울 광화문광장을 찾았다. 눈물 맺힌 비통한 얼굴로 “돈이 주인이고 돈밖에 모르는 사회가 용균이를 학살했다, 도살했다, 참살했다”며 분..
죽음을 공유하는 사회, 반려견의 부고장을 보며 이제는 반려견의 부고장도 온라인으로 보낸다.사진을 올리고, 이름을 적고, 사망 날짜를 입력한 뒤, 짧은 추모의 글을 덧붙인다.몇 번의 클릭으로 만들어진 부고장은 링크로 공유되고, 사람들은 댓글로 위로의 말을 남긴다.낯설지만, 이상하지 않다.반려동물을 가족으로 여기는 시대, 사랑의 크기만큼 이별의 무게도 깊어졌다.그래서 사람들은 이제, 반려견의 죽음을 기록하고 남긴다.장례식장은 없지만, 온라인에는 방명록이 있다.짧은 문장 하나에도 그리움과 미안함이 묻어난다.이 변화는 단순한 기술의 진보나 서비스의 확장이 아니다.우리가 ‘죽음’을 대하는 방식이 변하고 있다는 신호다.예전에는 반려동물의 죽음이 개인의 울타리 안에서 조용히 사라졌다면,이제는 공유되고 기억되는 사건이 되었다.죽음을 나눈다는 것은,그만큼 함께 살아..
생면부지 남을 구하려 목숨을 던졌다... 다시 돌아와도 또 도울 사람, 곽한길 의사자 고(故) 곽한길 (1975~ 2024) 비로소 알게 된 고인의 생애의사자 고(故) 곽한길(1975~2024) 1975년 3월 4일 전남 여수에서 5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꽃과 나무를 좋아했다. 넷째 형을 따라 국립부산해사고에 입학했다. 모친상을 겪고,여수공고로 전학해 94년 졸업했다. 94~99년 제5공수특전여단 23대대에서 복무했다. 98년 민주지산 특전사 순직 사태를 겪었다. 17세부터 만난 아내와 25세에 결혼해 1남 1녀를 뒀다. 아르바이트, 사업 등을 거쳐 통신 설비기사로 일했다. 여수 바다와 낚시를 좋아해, 은퇴후에는 여수에서 낚싯배를 하는게 꿈이었다. 사고 전날 딸이 좋아하는 꽃을 물어 초등학교 졸업식에 사가겠다 약속했다. 2024년 1월 31일 오전 1시 경부고속도로 서울방향 ..
반려동물과 작별한 직원에게 회사가 경조 휴가를 지급해야 할까? 반려동물의 죽음에도 경조 휴가가 필요할까?반려동물과 작별한 직원에게 회사가 경조 휴가를 지급해야 할까?대부분의 회사가 직원의 가족 혹은 가까운 친구 등 사랑하는 사람에게 경조사가 발생하면 경조 휴가를 지급한다. 하지만 만약 세상을 떠난 대상이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라면 어떨까?케이티 앳킨스의 5살 된 웰시코기 반려견 ‘골리앗’은 생김새와는 정반대인 이름을 지녔다.앳킨스는 “처음에 데려왔을 때 키가 작아서 농담처럼 ‘골리앗’이라고 지었다. 하지만 골리앗의 내면은 정말 골리앗만큼 컸다. 정말 똑똑하고 항상 활력이 넘쳤다”라고 말했다.하지만 골리앗은 예상치 못하게 죽었고, 앳킨스는 “가장 친한 친구를 잃는 것과 같았다”고 말했다.앳킨스는 “골리앗은 내가 정말로 ‘내 강아지’라고 부른 첫 반려견이..
시인 김수영 1968년 6월 16일 별세 김수영(金洙暎), 1921년 11월 27일 ~ 1968년 6월 16일 자유 · 절망 노래한 한국 시의 뿌리시인 김수영이 한국 지식인 사회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자유주의자에게는 기존의 시적 관습을 벗어나 소시민의 자의식을 대담하게 표현한 모더니스트로, 진보주의자에게는 현실비판과 저항의 진수를 보여준 참여시인으로 추앙받는다. 이는 그의 마지막 작품 「풀」 (1968년)을 놓고 진보주의자는 독재(바람)를 이겨내는 민중(풀)을 노래했다 하고, 자유주의자는 허무적 삶의 단면을 그렸다고 하는 등 제각각 해석하고 있는 것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김수영은 192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41년 유학차 일본 도쿄로 건너가는데 이때 연극연구소에서 연출 수업을 받는다. 해방 후 그는 연극에서 문학으로 전향한다. 해..
문익환 목사가 돌아가시던 날 아침에 범민련 본부에 쓴 마지막 편지 문익환(文益煥), 1918년 6월 1일 ~ 1994년 1월 18일 문익환 목사가 돌아가시던 날 아침에 범민련 본부에 쓴 마지막 편지범민련 북쪽 본부 백인준 의장님범민련 해외 본부 윤이상 의장님범민련 남쪽 본부 강희남 준비위원장님지난해는 민족통일운동이 심각한 시련을 겪어야 했던 해입니다. 그 시련은 아직도 극복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중대한 시기에 저는 범민련 남쪽 본부 준비위원장으로서 제 직책을 다 못 하고 도중하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감천만입니다.제가 남쪽 본부 준비위원장직에서 물러난 것은 통일운동을 그만두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남쪽의 통일운동을 더 크게 묶어 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북쪽과 해외 통일운동 세력과 손을 끊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원만한 관계를 이루려는 것이었습니다.우리는 지금 ..
마지막까지 웃음을 남긴 남자 ‘뒷모습 부고’로 전한 짐 쉬넬러의 메시지지난 일요일, 미국 밀워키 저널 센티널에 한 통의 부고가 실렸다. 그런데 그 부고에는 조금 낯선 사진이 있었다. 망자의 얼굴이 아닌, 뒷모습이었다.사진의 주인공은 예술가이자 위스콘신-밀워키 대학의 교수였던 짐 쉬넬러(Jim Schneller). 그는 지난 9일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1세. 생전 그는 늘 주변 사람들에게 “세상을 유머로 바라보라”고, “창의적인 시선으로 살아가라”고 말하곤 했다.그의 가족은 그 말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 인사에도 그의 웃음을 담기로 했다. 부고 사진으로 고인의 뒷모습을 보낸 것이다.사진은 한여름의 햇살이 포근하게 내리던 날, 이발을 마친 직후 찍은 것이었다. 그날 짐은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 덕분에 숨쉬었습니다. 자유인 마광수 교수 영결식 마광수(馬光洙), 1951년 4월 14일~2017년 9월 5일 “마광수를 누구에 비교하는 이야기가 많지만 우리는 그가 지금껏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마광수는 마광수’입니다.”고 마광수 전 연세대 교수(1951~2017)의 영결식이 7일 오전 서울 용산구 순천향대병원 영결식장에서 거행됐다. 마 교수의 약력을 설명하던 대광고 동창인 이종호씨는 “마광수는 마광수”라면서 어떤 이름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고인의 삶과 문학세계를 표현했다.영결식장에는 유족들과, 고인이 나온 대광중·고교의 벗들, 수십 년간의 교편생활로 배출한 제자들이 자리를 메웠다. 이들은 ‘위선과 가식을 벗어던진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그를 누가 이렇게 만들었냐’며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고인의 애제자였던 유성호 한양대 ..
인간은 왜 기꺼이 동물과 만나고 또 이별하는가 동물을 키운 경험은 우리를 크게 변화시키거나 인생을 더 좋은 방향으로 바꾸고 더욱 강하고 행복한 사람이 되도록 도왔다. 세계적 가수 겸 배우인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는 14년을 함께 지낸 개 사만다의 유전자를 복제한 강아지 두 마리를 기른다. 그는 뉴욕타임스 기고문에 이같이 썼다. “사만다를 잃었지만 어떤 식으로든 계속 함께하고 싶었어요. 사만다의 일부를 살려둘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보내기가 조금 더 쉬워졌죠.”미국에선 스트라이샌드처럼 반려동물과 다양한 형태의 이별 의식을 치르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한국도 비슷하다. 반려동물의 장례를 치러주는 전문 업체가 늘고 있다. 경조 휴가 제도에 ‘반려동물 장례 휴가’를 도입하는 기업도 증가하는 추세다.반려동물을 잃은 슬픔을 ‘권리를 박탈당한 슬픔’이..
마광수, 그는 내게 소중한 스승이었다 마광수(馬光洙), 1951년 4월 14일~2017년 9월 5일 마광수 교수 부고에 붙여소설가이자 연세대 교수를 지냈던 마광수씨가 5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부고를 듣고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내가 대학 시절을 보냈던 1990년대 그의 작품은 내내 논란을 몰고 다녔고, 그 후폭풍은 200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것으로 기억한다.대학원 재학 중이던 1999년 드디어 그의 강연을 들을 기회를 잡았다. 학과 강의에서 그를 특별 강사로 초청한 것이다. 그가 학교에 온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학생들은 술렁이기 시작했고, 당일 강연장은 수강생은 물론 청강생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하두 오래전 일이라 강연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거침없는 언변으로 좌중을 휘어잡은 일만큼은 또렷이 떠오른다. 또 중간중..
잔혹하고 인간 중심적인 행위 같으나,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애도한다 사랑하고 잃는 것이 아예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여러 해 전 어미 잃은 새끼 길고양이 남매를 한꺼번에 둘 데려오기로 마음먹었을 때, 이미 그 결정은 지독한 상실의 고통을 감내하겠다는 의지를 포함한 것이었다. 여전히 이들의 ‘죽음’ 같은 것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최후의 순간이지만, 반려동물의 사체를 땅에 묻는 것은 불법이라 종량제봉투에 버려야 한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을 때 도무지 심란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어떻게 하루 전까지만 해도 살 맞대고 교감했던 존재를 그렇게 처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하여, 언젠가는 도래할 수밖에 없어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계획해야 하는 일을 계속해서 마음 구석으로 미루고야 만다. 마치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겨우 10년 정도 되는 우정과 사랑을 나누고자, 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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