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는 어떤 면에서 진보였다. 민족 내부에는 평등을 가져왔고 밖으로는 반(反)제국주의 저항의 토대였다. 민족국가의 주권론은 약소국의 방패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폐해도 따랐다. 민족국가로 뭉치는 과정에서 하위 언어나 문화는 흡수되거나 탄압됐다. 분쟁과 충돌, 인종 청소, 민족 학살 등의 비극도 속출했다.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피를 부르는 갈등의 주축도 민족 갈등이다.
'민족주의 없는 애국심'은 가능한가. 저자들의 출발점은 '획일적이고 갈등 유발적인 배타적 민족주의 논리에 대한 반성'이었다. 공교롭게도 책 서문의 한 대목은 최근 다시 고조된 한·중·일 갈등을 예견한 듯하다. "영토 분쟁과 시장 경쟁, 그리고 과거사 문제와 불균등한 힘의 분포가 다시 민족주의와 결합되고, 이러한 결합과 재결합의 과정에서 민족주의는 새로운 얼굴로 동아시아를 재구성하고 있다. 동아시아 각국의 민족주의가 제공하는 기억과 망각의 도식은 냉전적 사고에 짓눌렸던 과거보다 더욱 냉전적인 대립을 가져올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제시되는 해법은 '공화주의적 애국주의'다. 고전적 공화주의는 '자기가 태어난 나라에 대한 무조건적 헌신'과 '시민적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는 공화정에 대한 애정'을 구별하려 했다. 하버마스의 헌정적 애국심(constitutional patriotism)도 비슷한 개념이다. 유럽통합을 염두에 둔 이 개념은 애국심의 근거를 문화적 공통 유산의 맹목적인 애착에서 찾는 게 아니라 헌법의 기본 이념에 대한 국민적 동의와 충성에서 찾는다. 공화주의적 애국심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무조건 아름답거나 다른 공동체보다 낫다는 우월 의식을 수반하지 않는다. 오히려 조국이 다른 나라에 지배를 행사하지는 않는지 주목하며, 지배를 겪고 있는 다른 나라 사람들 처지에 공감하고 그들의 자유에 관심을 가진다.
문제는 다시 현실이다. 국가를 넘어선 통합으로 주목받았던 EU마저 지금은 뒷걸음질이다.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은 "이민자들의 정체성에 대해 너무 걱정한 나머지 그들을 받아들인 프랑스의 정체성을 소홀히 여겼다"고 했고, 캐머런 영국 총리도 "영국 국가정체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소리 높인다. 경제·사회 불안으로 민족주의는 다시 드세지고 '이성적 애국심'은 힘을 잃고 있다.
책에도 이런 구절이 나온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기껏해야 국경을 넘는 이웃 사랑이 국가와 국민에게 해가 되지 않는 비배타적 이익의 영역에서만 탈민족주의적 세계시민주의자일 수 있고, 그렇지 않은 배타적 이익의 영역에서는 여전히 민족주의적 애국자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눈앞의 현실은 아직도 민족주의다.
아직도 민족주의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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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박한 석호(潟湖)에 흩어진 118개의 작은 섬, 진흙벌에 참나무 말뚝을 박고 건물을 세워 이뤄진 '물의 도시' 베네치아가 11세기부터 16세기까지 창출한 부(富)에 집중한다. 실용적인 정치·경제체제, 탁월한 위기관리 시스템, 치밀한 외교술에 대한 서술이 생생해 500년 전 이야기임에도 강소국(强小國)의 생존전략 나아가 발전 모델로 삼을 만한 지혜가 있다.
요즘 재정 위기를 겪으며 신용 등급이 강등되고 있는 이탈리아와 달리 이 해상 공화국은 가능한 한 많이 모으고 적게 소비하는 방식으로 현금을 관리했다. 뱃사람도 돈만 있으면 신사가 됐다. '돈이면 다 통한다'(Money talks)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계층 구분이 없던 베네치아의 창조 신화는 무역이었고 영웅은 바로 상인들이었다. 인내와 사업 수완, 강력한 연대로 이윤을 내는 게 미덕이었다. 베네치아는 공무원의 부패, 정실 인사는 엄하게 다스렸다.
그들이 부를 일군 또 하나의 비밀은 규칙성에 있었다. 국가 소유로 매년 경매를 통해 임대된 베네치아 상선들은 14세기 초부터 정해진 항로를 시간표대로 오갔다. 항해의 연중 패턴은 계절의 주기를 따랐다. 인도 대륙에서 불어오는 몬순(계절풍)을 이용해 동방에서 북해로 상품과 금을 운송했고, 서쪽으로 가을바람이 부는 9월이 되면 인도에서 향료를 싣고 아라비아반도로 출항하는 식이었다. 배송을 예측할 수 있게 됐다. 1418년부터는 야파로 가는 순례자 시장도 장악했다. 환전과 도량형, 통역에 대한 실용적인 정보가 축적되면서 이윤은 더 커졌다.
하지만 '바다의 도시 이야기'에서 시오노 나나미가 썼듯이 '성한 자가 반드시 쇠하는 것은 역사의 순리'다. 바스쿠 다 가마가 1499년 인도에서 희망봉을 돌아 포르투갈로 오자 베네치아는 곤두박질 친다.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비용이 덜 들고 변덕스러운 이교도를 다룰 필요도 없어졌기 때문에 베네치아 동방 무역의 성공 모델은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만다.
날개를 단 사자 깃발을 배에 달고 바다를 누볐던 베니치아 상인들의 신화는 베네치아영화제 황금사자상 트로피에 아득히 남아 있다. 출렁이는 불모의 땅에 인구도 적은 이 나라는 무역과 외교로 일어섰다. 신중하게 대사(大使)를 임명했고 교황과 이슬람 세계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했다. 사료가 바탕이 된 이야기체 형식으로 서술된 이 역사서는 꼼꼼하면서 힘차다. 저자는 '현대 외교는 13세기 이 해상 제국에서 시작됐고 영국과 네덜란드가 그것을 벤치마킹했다'고 썼다. 베네치아는 하나의 거대한 회사이자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이어준 통역자였다.
부의 도시, 베네치아 |
저울질과 규칙의 달인들, '富네치아'를 만들다
강소국으로 사는 비결 ‘물의 도시’에서 배운다
15세기 베네치아 동전 ‘두카트’는 글로벌 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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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불교 인구가 약 700만을 헤아린단다. 19세기 말 미국 사회에 선불교가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지 100여년 만에 불교가 미국 엘리트층을 비롯한 주류와 대중사회의 큰 흐름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미국 캘리포니아대(버클리)에서 초기 대승불교 연구로 학위를 받고 뉴욕주립대에서 2002년까지 6년여 동안 비교종교학을 가르친 조성택 고려대 교수의 <불교와 불교학>에 따르면, 미국인들에게 불교는 종교라기보다는 ‘문화’ 또는 ‘철학’에 가깝다. 그들은 붓다(석가모니)의 가르침에 관심을 기울일 뿐 붓다나 승단과 같은 종교적 장치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러다 보니 승려가 없는 재가 중심 불교단체가 많고 참선만 하는 ‘선 센터’가 많다. ‘신심’에는 관심 없는 ‘과학적·이성적 불교도’들, 자칭 ‘불교적 기독교도’ ‘불교적 천주교인’이 수두룩하단다. 그들에게 기독교 ‘교회’는 결혼식장으로서의 의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란다. 주일예배는 거의 노인 차지고, 식사 전에 기도를 올리는 가정을 찾아보기 어렵다. 반면 불자들은 계속 는다. 한국 사회와는 정반대로 가는 것 같다.
신앙 없는 불자들이 다수인 미국 불교가 아직 뿌리를 내린 것으로 볼 순 없다는 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조 교수의 생각은 다르다. 인도 불교가 이질적인 중국문명에 수용되고 동화되는 데 약 500년이 걸렸다. 그가 보기에 최근 100년은 대중매체 발달과 사회적 역동성 등을 고려하면 고대 500년보다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다. 말하자면 미국 불교는 미국 풍토에 맞게 독자적으로 진화하면서 빠른 속도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인도 불교의 중국 정착은 인류 문명사의 일대 사건이었다. 불교의 서방 정착 역시 문명사의 대사건일 수 있다.
기독교가 대표하는 기성문화의 ‘규범적 도덕’ 대신에 ‘내면적 자유’를 추구하는 미국 불자들은 불교에서 “평화, 자연 또는 반문명, 모성 또는 여성의 이미지들로 상징되는 새로운 문화와 삶의 양식을 발견”했다. 기성문화에 대한 ‘반문화’로 집약될 수 있는 미국 불교의 이런 특성은 초기불교와도 상통한다고 조 교수는 본다.
기원전 5~6세기 인도에서도 불교는 반문화였다. 당시 인도 사회는 엄격한 브라만교가 지배했다. 불교를 일으킨 ‘사문’은 바로 그런 기성 문화를 거부하고 집을 뛰쳐나가 새로운 영적 자유를 추구하던 반문화적인 젊은이들이었다. 붓다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반문화의 요체는 건강한 생명력과 자유분방함, 개방성이다. 불교는 여기에다 지금 시대의 화두인 생태주의에 대한 강력한 친화성까지 지니고 있다. “다양한 가치체계와 삶의 양식, 그리고 무엇보다 다종교 사회, 또 탈종교적 사회로 나아가는 오늘날, 이런 개방성과 친화성은 불교야말로 현대에 가장 알맞은 종교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면 한국 불교는 어떠한가?
1990년대 이후 한국 불교에서도 근대화 과정, 1970~80년대 민주화 과정에서 제구실을 하지 못한 데 대한 반성·비판과 함께 변화와 개혁 움직임이 일고 있다. 하지만 지금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불교와 불교학>을 관통하고 있다. “지금까지 해 온 불교 근대화를 위한 조계종단의 노력이 전혀 의미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불교의 근대적 유용성을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모색되었던 불교 근대화의 방향, 이를테면 근대적 지식과 불교의 결합, 출가승 중심의 전통 교단의 변화 등과 같은 획기적이며 전면적인 불교 근대화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점에서 조계종단의 근대화 노력은 단편적이며, 부분적인 대증요법 이상의 의미를 갖기 힘들다고 본다.” 호텔방에서 종단 간부들이 도박판이나 벌이는 작태가 이와 무관할까.
조 교수는 문제는 한국 불교 주류인 조계종단이라 얘기한다. 일제 때부터 한국 불교는 살아남을 가치가 있다는 ‘근대적 (사회)유용성’을 입증하고 일본 불교와는 다른 ‘한국 불교의 정체성’을 지켜내야 했다. 그러나 근대적 유용성을 확보하려고 앞서가던 일본의 근대불교 모델을 따라가면 정체성을 잃고, 정체성만 찾다간 근대적 유용성을 확보할 수 없었다. 근대적 유용성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한국적 근대불교 모델을 창안해내는 길이 있었다. 그걸 위해 승려도 결혼하고 육식도 하자는 ‘대처육식’과 염불당 폐지, 근대적 승려교육 등을 부르짖으며 낡은 전통을 벗어던지자는 외침들이 있었다. 만해 한용운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광복 뒤 정체성 문제는 결국 왜색불교 대 민족불교라는 이항대립적 문제로 단순화됐다. 대처 제도를 현실로 인정하면서 대처는 포교에, 비구는 수행에 전념하는 역할 분담을 통해 한국 근대불교의 새로운 모델을 창출하자는 다수파의 주장은 묵살당했다. 친일청산, 왜색불교 추방이라는 사회 분위기에 편승한 소수 비구승들은 다수파 대처승들을 종단에서 몰아내고 조계종을 세웠다. “근대불교를 항일과 친일의 도식적 관점으로… 한국 근대불교사 전체를 이른바 ‘항일 민족의식’과 ‘전통수호를 통한 한국 불교의 정체성 확립’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현재 한국 불교 최대의 종단인 조계종의 성립을 한국 근대불교의 완성으로 보고자 하는 일종의 목적론적 역사 기술이며 …식민시기를 포함해 근대기 동안 한국 불교인들의 다양한 실험과 모색을 완전히 도외시하는 것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결과적으로 이는 해방 이후 조계종이 등장하는 과정을 정치적으로 정당화하고 은연중에 조계종단을 한국 불교의 유일한 정통교단으로 옹호하는 데 봉사하고 있다.”
조계종식 도식대로라면 1913년에 대처 제도를 주장한 만해는 친일파고, 3·1운동에 앞장선 만해는 민족불교의 대표적 실천가가 된다. 만해는 친일파였던 적이 없다. 그에게 대처 제도 도입은 한국 불교가 승려 중심의 사찰불교를 벗어나 진정으로 민족화·사회화하기 위한 필수요소였다.
서방의 불교 수용이라는 문명사적 대전환이 진행되고 있는 지금, 이제라도 만해의 문제제기를 귀담아듣기를 <불교와 불교학>은 촉구하고 있는 듯하다.
불교와 불교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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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독일을 대표하는 음악가로 꼽히는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사진)는 서구의 수많은 철학자와 예술가에게 줄곧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었다. 그 주된 내용은 그의 음악이 독일 민족 신화에 대한 숭배와 고통에 대한 감상적 극화 등으로 파시즘의 원형을 보여준다는 비판과 공격이었다. 프랑스 철학자 필리프 라쿠라바르트는 <무지카 픽타>에서 “원(原)파시즘적인 정치의 미학화”라는 말로 바그너를 비판하기도 했다.
바디우는 먼저 니체·아도르노 등 기존 철학자들이 바그너를 비난한 내용들을 두루 살핀다. 특히 아도르노가 <부정변증법>에서 제시한 예술관이 비판에 주된 근거를 제공한다고 본다. 아도르노는 차이를 무시하고 ‘일자’(the one)로 모든 것을 환원하는 ‘동일성’ 논리를 비판했다. 곧 ‘아우슈비츠’ 같은 고통의 체험을 화해나 구원과 같은 어떤 ‘개념’으로 섣불리 연결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도르노를 비롯한 비난자들에게 바그너는 “대중에게 통일성을 강제하고 타자성을 녹여버린” 동일성 논리에 빠진 음악가다. ‘무한선율’ 등 인위적 통일성을 만들어낸 그의 음악 이론과 독일 민족 신화 집착에는 동일성에 대한 강요가 있다는 것이다. 음악을 서사에 종속시키고 기술공학적 장치들을 동원해, ‘순수예술 종결자로서 총체화와 신화화, 기술공학적 효과에 의존하는 대중예술의 시작점이 됐다’는 비난도 따른다.
바디우는 이런 비난들을 부정하지 않는다. 대신에, “바그너 스스로도 몰랐던 두 번째 바그너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디우는 우리 시대에 순수예술이 부활할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그것은) 총체성의 미학화로서의 순수예술이 아니라 오로지 총체성에서 분리되는 한에서의 순수예술로서 새로운 유형의 위대함”을 말한다. 마치 영웅화 없는 영웅주의, 전쟁 패러다임에서 빠져나온 위대함같이 동일성 논리에 빠져들지 않은 새로운 위대함을 발견해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런 관점에 따라 바디우는 바그너 음악 속의 역설들을 새롭게 찾아낸다. 바그너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에서 시인이자 음악가인 주인공 작스는 자신의 예술적 권위와 사랑하는 여성에 대한 우월한 지위를 포기하기로 결심한다. 지은이는 여기서 작스의 결심이 대본이나 서사 등 어떤 동일성 전개에 근거를 둔 필연적인 변화가 아니라, 음악 자체를 따라가며 만들어진 예측 불가능한 변화임을 주목한다. 이는 동일성 논리에 저항하는 바그너 음악의 한 성격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경우 이졸데를 기다리는 트리스탄의 긴 기다림을 표현하긴 했지만, 결국 이졸데가 찾아오게 만들어 ‘구원’이라는 궁극적 피날레를 형상화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에 대해서도 지은이는 이졸데의 도착에 트리스탄이 할 수 있는 일은 죽는 것밖에 없다는 점을 들어, 기다림의 해결이 아닌 기다림 자체를 보여준다고 반박한다. 곧 목적론적인 시간 구성만 있다는 아도르노의 비판과 달리, 바그너 음악 속에서 고통의 경험과 분열된 주체, 불확실성에 따른 변화 등을 찾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지은이는 “바그너에겐 그 뒤에 포기된 어떤 새로운 스타일의 발명 같은 것이 있었다”며, “(그는) 여전히 미래의 음악을 대표한다”고 말한다. 그의 모든 것을 파시즘의 원조로 비난해 묻어버릴 것이 아니라, 총체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 했던 음악적 시도 등을 되살려 순수예술의 새로운 시작에 기틀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불가능 딱지가 붙은 가능성을 새롭게 발견해낸다는 차원에서, 바디우의 바그너 연구는 또다른 급진주의 정치적 기획의 연장선 위에 놓여 있다. 사상적 동지인 슬라보이 지제크 역시 책 뒤에 붙은 독립적인 발문에서 바그너 음악을 주체와 주인의 관계로 풀이한 독특한 ‘바그너론’을 펼치고 있다.
바그너는 위험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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