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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디어 斷想/부고 · 추모 사이트를 위한 斷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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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 부고에 묻힌 삶, 언론은 어떻게 기록할까 한 줄 부고에 묻힌 삶, 언론은 어떻게 기록할까신문이나 온라인에서 흔히 보는 부고 알림은 대개 이렇게 한 줄로 끝난다.“○씨 별세, ○씨 부친상=○일, ○장례식장, 발인 ○일 ○시. ☎️ ○○-○○-○○”전직 대통령, 정치인, 연예인처럼 널리 알려진 사람의 죽음은 긴 기사나 영상으로 남지만, 일반인의 죽음은 이렇게 한 줄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언론이 조명할 대상은 의미 있는 삶을 남긴 이들이겠지만, 현실은 지나치게 제한적이고 형식도 단조롭다.그럼에도 최근 몇몇 기자들은 덜 조명된 죽음을 발굴하고 기록을 확장하려는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가만한 당신, 못다한 말“(길게 읽고 오래 생각할) 긴 부고가 필요한 까닭”어떤 이의 죽음을 맞아 그의 삶을 알리고 기억하려 쓰는 글을 부고라 한다. 죽음은 모두 같지만..
산재 사망 야간노동자 148명의 기록 담은 서울신문 '달빛노동 리포트' 우리가 잠든 사이, 스러진 사람서울신문 12일자 1면은 평소 우리가 잘 보지 못했던 죽음으로 채워졌다. 골판지 제조업체 노동자, 아파트 경비원, 택배 기사. 올해 상반기 산업재해로 세상을 떠난 야간노동자 42명의 부고가 전면을 가득 메웠다.그 위를 두른 검은 띠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우리가 잠든 사이, 야간노동자들이 스러집니다. 올 상반기에만 148명. 통계 숫자에 가려진 그들의 죽음과 고달픈 밤의 여정을 전합니다.”밤이 깊어도 그들의 노동은 멈추지 않았다. 새벽까지 재봉틀을 돌렸던 전태일, 화력발전소 하청업체에서 사망한 김용균 씨, 그리고 이름 모를 또 다른 수많은 사람들. 그들의 삶은, 그들의 죽음은, 우리가 잠든 사이 사라졌다.서울신문 탐사기획부는 이번 기획에서 화려한 그래픽이나 감정을 자극하는..
금정굴 진상규명 이끈 마임순 전 회장 별세 향년 73세 마임순, ~ 2025년 9월 16일, 향년 73세 어둠 속에서 빛을 판 사람 — 마임순 회장을 기억하며그녀는 평생 삽을 들고 어둠 속으로 내려갔다. 거짓이라 불린 역사의 땅을 파서, 진실의 조각을 하나씩 들어 올렸다. 그 이름, 마임순. 금정굴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운동의 얼굴이자, 한 세대의 고통을 증언한 사람. 그가 2025년 9월 16일, 일산백병원에서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3세였다.그의 인생은 처음부터 ‘빨갱이 시댁 며느리’라는 낙인으로 시작됐다. 그러나 그는 그 이름 아래 숨지 않았다. 오히려 그 낙인 속에서 삶의 방향을 찾아냈다. 억울하게 죽은 시댁의 사람들을 위해, ‘국가의 거짓’을 밝히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고양 금정굴 사건은 한국전쟁이 남긴 가장 깊은 상처 중 하나..
살림의 언어로 남은 시인, 김지하 김지하(金芝河), 1941년 2월 4일~2022년 5월 8일) 본명은 김영일(金英一) 살림의 언어로 남은 시인, 김지하—별세 3년, 오늘 그를 다시 기억하며김지하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어느덧 3년이 흘렀다.2022년 5월 8일, 강원도 원주의 집에서 향년 81세로 생을 마감한 그는지금도 여전히, 이 땅의 언어와 양심 속에서 살아 있다.그는 시인이었고, 사상가였으며, 시대의 양심이었다.1941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한 뒤1970년대 초 시 「오적」으로 세상의 위선을 벼렸다.권력과 재벌, 언론, 종교를 신랄하게 풍자한 그 시 한 편으로 그는 감옥에 갇혔다.하지만 철창 속에서도 그는 언어의 무기를 놓지 않았다.그가 남긴 「타는 목마름으로」는 자유를 향한 갈망의 상징이 되었고,..
기억합니다 - 한겨레가 떠나는 이를 추모하는 방법 가 어언 35살 청년기를 맞았습니다. 1988년 5월 15일 창간에 힘과 뜻을 모아주었던 주주와 독자도 세월만큼 나이를 먹었습니다. 새로 맺는 인연보다 떠나보내는 이가 늘어나는 시절입니다. 지난해부터 코로나19 탓에 이별의 의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억합니다’는 떠나는 이에게 직접 전하지 못한 마지막 인사이자 소중한 추억이 될 것입니다. 부모는 물론 가족, 친척, 지인, 이웃 누구에게나 추모의 글을 띄울 수 있습니다. 사진과 함께 전자우편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원고료를 드립니다.한겨레 주주통신원(mkyoung60@hanmail.net), 인물팀([People@hani.co.kr](mailto:People@hani.co.kr)). 기억합니다가 어언 32살 청년기를 맞았습니다. 1988..
백기완이 없는 거리에서 - 김진숙 백기완(白基琓), 1932년 1월 24일~2021년 2월 15일 ‘아부지’를 미워하는 힘으로 버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미 ‘쓸데도 없는’ 딸이 셋이나 있던 아부지의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넷째 딸. 아부지처럼 안 사는 게 삶의 유일한 목표였던 나는 십대의 넘치는 에너지를 오로지 아부지를 미워하는 데 썼습니다. 중간에서 시달리다 못해 무당을 찾아간 엄마는 ‘둘이 한집에 살면 둘 중 하나는 죽는다’는 박수의 점사를 들고 와선 연속극에서처럼 머리에 띠를 매고 앓아눕고 마침내 저의 가출을 묵인, 방조하게 됩니다.엄마가 준 오천원을 들고 집을 나와 1600원짜리 부산행 기차표를 끊어 같은 한국이지만 말 한마디 못 알아듣는 부산에서의 노동자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고단하고 서러워 밤마다 베갯잇을 눈물로 적시는..
혁명가 존 몰리뉴를 기억하며 John Molyneux 존 몰리뉴, 1948년 9월 2일 ~ 2022년 12월 10일 마르크스주의 작가이자 활동가 존 몰리뉴(John Molyneux)가 12월 11일 더블린에서 74세로 세상을 떠났다.그는 평생을 국제사회주의 운동 속에서 살았다. 처음에는 영국의 국제사회주의자이자 사회주의노동자당(SWP)에서, 나중에는 아일랜드 사회주의노동자당/네트워크에서 활동했다.몰리뉴는 1968년, 전 세계를 휩쓴 반전운동과 혁명적 흐름 속에서 급진화된 세대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곧 국제사회주의 그룹의 핵심 이론가이자 가장 인기 있는 연사로 자리 잡았다.그의 첫 저서 『마르크스주의와 당』(1976) 은 마르크스, 룩셈부르크, 레닌, 트로츠키, 그람시가 남긴 혁명적 조직 이론을 분석하며, 지금도 조직 문제에 씨름하..
혁명가이자 탁월한 마르크스주의 저술가 존 몰리뉴 조사(弔詞) John Molyneux 존 몰리뉴, 1948년 9월 2일 ~ 2022년 12월 10일 존 몰리뉴가 2022년 12월 10일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갑작스럽게 타계했다는 소식에 세계 곳곳의 사회주의자들이 충격을 받고 슬퍼했다. 향년 74세였다.존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체제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학생과 청년 노동자 세대에 속한 가장 중요한 마르크스주의 저술가·활동가 중 한 명이었다.1968년 존은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전신인 ‘국제사회주의자들(IS)’에 가입했다. 당시 사우샘프턴대학교 학생이던 존은 ‘베트남연대운동(VSC)’에 참여하고 프랑스의 1968년 5월 반란 당시 파리를 방문한 경험을 통해 급진화했다. 존을 IS에 가입시킨 사람은 IS의 창립자 토니 클리프였다.존은 이후 평생 동안 ..
명예도 없이 사랑만 남기고, 백기완 선생을 기리며 백기완(白基琓), 1932년 1월 24일~2021년 2월 15일 혁명을 꿈꾸는 통일싸움꾼, 호통과 눈물의 이야기꾼 백기완 선생이 떠났다. 제 둥지를 부수고 날아오른 장산곶매처럼 남과 북을 갈라 치려는 모든 세력과 맞서 싸우고, 천둥 같은 호통을 권력자에게 날리며 밑바닥 민중을 눈물로 감싸주던 이였다. 심장과 폐를 무너뜨리는 병마와 싸우면서도, 일터에서 천대받고 쫓겨나고 죽어가는 노동자들이 눈에 밟혀, 마지막으로 남긴 말씀은 “김미숙·김진숙 힘내라.” 2019년 2월9일, 거듭되는 심장 수술과 치료로 쭉정이처럼 메마른 선생이 지팡이에 몸을 기대어 김용균씨 영결식이 열린 서울 광화문광장을 찾았다. 눈물 맺힌 비통한 얼굴로 “돈이 주인이고 돈밖에 모르는 사회가 용균이를 학살했다, 도살했다, 참살했다”며 분..
생면부지 남을 구하려 목숨을 던졌다... 다시 돌아와도 또 도울 사람, 곽한길 의사자 고(故) 곽한길 (1975~ 2024) 비로소 알게 된 고인의 생애의사자 고(故) 곽한길(1975~2024) 1975년 3월 4일 전남 여수에서 5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꽃과 나무를 좋아했다. 넷째 형을 따라 국립부산해사고에 입학했다. 모친상을 겪고,여수공고로 전학해 94년 졸업했다. 94~99년 제5공수특전여단 23대대에서 복무했다. 98년 민주지산 특전사 순직 사태를 겪었다. 17세부터 만난 아내와 25세에 결혼해 1남 1녀를 뒀다. 아르바이트, 사업 등을 거쳐 통신 설비기사로 일했다. 여수 바다와 낚시를 좋아해, 은퇴후에는 여수에서 낚싯배를 하는게 꿈이었다. 사고 전날 딸이 좋아하는 꽃을 물어 초등학교 졸업식에 사가겠다 약속했다. 2024년 1월 31일 오전 1시 경부고속도로 서울방향 ..
시인 김수영 1968년 6월 16일 별세 김수영(金洙暎), 1921년 11월 27일 ~ 1968년 6월 16일 자유 · 절망 노래한 한국 시의 뿌리시인 김수영이 한국 지식인 사회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자유주의자에게는 기존의 시적 관습을 벗어나 소시민의 자의식을 대담하게 표현한 모더니스트로, 진보주의자에게는 현실비판과 저항의 진수를 보여준 참여시인으로 추앙받는다. 이는 그의 마지막 작품 「풀」 (1968년)을 놓고 진보주의자는 독재(바람)를 이겨내는 민중(풀)을 노래했다 하고, 자유주의자는 허무적 삶의 단면을 그렸다고 하는 등 제각각 해석하고 있는 것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김수영은 192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41년 유학차 일본 도쿄로 건너가는데 이때 연극연구소에서 연출 수업을 받는다. 해방 후 그는 연극에서 문학으로 전향한다. 해..
문익환 목사가 돌아가시던 날 아침에 범민련 본부에 쓴 마지막 편지 문익환(文益煥), 1918년 6월 1일 ~ 1994년 1월 18일 문익환 목사가 돌아가시던 날 아침에 범민련 본부에 쓴 마지막 편지범민련 북쪽 본부 백인준 의장님범민련 해외 본부 윤이상 의장님범민련 남쪽 본부 강희남 준비위원장님지난해는 민족통일운동이 심각한 시련을 겪어야 했던 해입니다. 그 시련은 아직도 극복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중대한 시기에 저는 범민련 남쪽 본부 준비위원장으로서 제 직책을 다 못 하고 도중하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감천만입니다.제가 남쪽 본부 준비위원장직에서 물러난 것은 통일운동을 그만두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남쪽의 통일운동을 더 크게 묶어 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북쪽과 해외 통일운동 세력과 손을 끊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원만한 관계를 이루려는 것이었습니다.우리는 지금 ..
마지막까지 웃음을 남긴 남자 ‘뒷모습 부고’로 전한 짐 쉬넬러의 메시지지난 일요일, 미국 밀워키 저널 센티널에 한 통의 부고가 실렸다. 그런데 그 부고에는 조금 낯선 사진이 있었다. 망자의 얼굴이 아닌, 뒷모습이었다.사진의 주인공은 예술가이자 위스콘신-밀워키 대학의 교수였던 짐 쉬넬러(Jim Schneller). 그는 지난 9일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1세. 생전 그는 늘 주변 사람들에게 “세상을 유머로 바라보라”고, “창의적인 시선으로 살아가라”고 말하곤 했다.그의 가족은 그 말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 인사에도 그의 웃음을 담기로 했다. 부고 사진으로 고인의 뒷모습을 보낸 것이다.사진은 한여름의 햇살이 포근하게 내리던 날, 이발을 마친 직후 찍은 것이었다. 그날 짐은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 덕분에 숨쉬었습니다. 자유인 마광수 교수 영결식 마광수(馬光洙), 1951년 4월 14일~2017년 9월 5일 “마광수를 누구에 비교하는 이야기가 많지만 우리는 그가 지금껏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마광수는 마광수’입니다.”고 마광수 전 연세대 교수(1951~2017)의 영결식이 7일 오전 서울 용산구 순천향대병원 영결식장에서 거행됐다. 마 교수의 약력을 설명하던 대광고 동창인 이종호씨는 “마광수는 마광수”라면서 어떤 이름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고인의 삶과 문학세계를 표현했다.영결식장에는 유족들과, 고인이 나온 대광중·고교의 벗들, 수십 년간의 교편생활로 배출한 제자들이 자리를 메웠다. 이들은 ‘위선과 가식을 벗어던진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그를 누가 이렇게 만들었냐’며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고인의 애제자였던 유성호 한양대 ..
마광수, 그는 내게 소중한 스승이었다 마광수(馬光洙), 1951년 4월 14일~2017년 9월 5일 마광수 교수 부고에 붙여소설가이자 연세대 교수를 지냈던 마광수씨가 5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부고를 듣고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내가 대학 시절을 보냈던 1990년대 그의 작품은 내내 논란을 몰고 다녔고, 그 후폭풍은 200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것으로 기억한다.대학원 재학 중이던 1999년 드디어 그의 강연을 들을 기회를 잡았다. 학과 강의에서 그를 특별 강사로 초청한 것이다. 그가 학교에 온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학생들은 술렁이기 시작했고, 당일 강연장은 수강생은 물론 청강생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하두 오래전 일이라 강연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거침없는 언변으로 좌중을 휘어잡은 일만큼은 또렷이 떠오른다. 또 중간중..
고독사(孤獨死)야, 마광수는 외롭고 괴로워서 자살한 거야 마광수(馬光洙), 1951년 4월 14일~2017년 9월 5일 그동안 너무했다. 그에게 낙관처럼 붉게 남은 상처를 이제는 닦아줄 때가 됐다 인간에 대한 배신, 아내와의 이혼, 왕따, 외로움, 허망함... 그의 생에 점철된 것들“고독사(孤獨死)야. 광수는 외롭고 괴로워서 자살한 거야.”고(故) 마광수 전 연세대 교수와 친구사이였던 서양화가 이목일 화백은 그의 죽음을 이렇게 말했다.“죽기 하루 전날에도 통화했어요. 그날은 어쩐 일인지 광수가 전화를 두 번 걸어왔어요. 한 시간 넘게 통화했지 아마... 그날따라 신세한탄을 많이 하더군요. ‘그 누구도 전화 한 통화 걸어오는 놈이 없다’며 ‘모든 게 허망하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광수야, 내가 전화 자주 하잖아’라고 했더니 ‘너 말고’라고 해요. 아무튼 ..
연탄재처럼 스러져 간 시인, 마광수 마광수(馬光洙), 1951년 4월 14일~2017년 9월 5일 연탄재처럼 스러져 간 시인, 마광수‘혼자’라는 외로움의 끝은 어디일까. 죽음이다. 마침내 죽음에 이르는 시기와 사유는 다를지언정 언젠가는 혼자 떠날 수밖에 없다. 마지막 외로움조차 부정하기 위해 동반결의(同伴決意)를 실행에 옮기기도 하지만, 그 또한 공간의 동일함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죽음 이후의 시간은 어떤 것도 명확하게 증빙된 것은 없으니 말이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서 수많은 이들의 위로와 격려를 받기도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는 이들도 그들이다. 소설이나 영화와는 달리 현실은 영원한 선악의 개체는 없다. 애매모호한 각자의 입장과 처신으로 인해서 본의 아니게 피해를 주기도 하고 그에 못지않은 피해를 보기도 한다. 그래서..
김지하의 글씨와 그림에 서린 절절한 울림 - 김지하를 추도하며 김지하(金芝河), 1941년 2월 4일~2022년 5월 8일) 본명은 김영일(金英一) 김지하를 추도하며 ⑫김지하는 글씨와 그림에서도 당신의 시 못지않은 독특한 예술세계를 보여주었다. 글씨보다 그림으로 더 잘 알려져 있고 또 그림에 더 열중하였지만, 사실상 그의 그림과 글씨는 둘로 나누어지지 않았다. 그의 그림에는 반듯이 거기에 걸맞은 화제를 들어감으로써 작품으로서 완결미를 갖추었으니, 서화(書畵)가 일체로 되는 세계였다.김지하의 글씨는 그의 시와 마찬가지로 기존의 정형과 법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글자의 크기가 일정치 않고 한 글자 안에서도 강약의 리듬이 강하다. 그의 난초 그림 중에는 ‘불계공졸(不計工拙)’이라는 화제가 쓰여 있는 작품이 있다. 풀이하여 ‘잘 되고 못 됨을 따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백발의 전사에게 - 백기완 선생님 영전에 드리는 시 백기완(白基琓), 1932년 1월 24일~2021년 2월 15일 백발의 전사에게—백기완 선생님 영전에 드리는 시—송경동제대로 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과 노동자 김진숙의 복직을 위해 청와대 앞에서 47일의 단식을 하면서도 ‘딱 한 발 떼기에 목숨을 걸어라’던 선생님은 제 곁에 내내 계셨죠전사는 집이 없는 거라고 돌아갈 곳을 부수고 싸워야 한다고 전사의 집은 불의에 맞서는 거리며 광장이며 일터이며 감옥이며 법정이어야 한다고 하셨죠 선생님께 드리는 시는 동지에게 드리는 시는 이런 투쟁의 거리에서 쓰여져야 제맛이겠죠깨트리지 않으면 깨져야 하는 게 무산자들의 철학이라고 하셨죠 철이 들었다는 속배들이여 썩은 구정물이 너희들의 안방까지 들이닥치고 있구나 하셨죠 내 배지만 부르고 내 등만 따..
마광수 교수를 위한 뒤늦은 변명 마광수(馬光洙), 1951년 4월 14일~2017년 9월 5일 마광수를 위한 뒤늦은 변명온통 검정색이었다. 검정 스커트에 검정 재킷, 검정 구두. 보이는 대로 집어 입고 나온 차림이 이상스레 이 모양이었다. 사소한 감상, 별다를 것 없는 9월 5일이 지나고 있었다. 오후 4시가 좀 안 됐을까. 책상 위 전화기를 붙들고 시민단체 활동가와 입씨름이 한창이었다. 발암물질에 관해서다. ‘지금 나에겐 당신이 발암물질이다’ 막말이 혀끝까지 밀고 올라오는 판이었다.(환경단체 활동가들은 요즘 예민하다. 생리대를 둘러싼 일련의 사태 때문이다.) 분노로 갈팡질팡하던 눈길이 휴대전화에 닿았다. 문자 메시지가 와 있었다. ‘마광수 교수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 수화기 너머 목소리가 잠시 아득하게 들렸다. 뒷부분을 안 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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