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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디어 斷想/부고 · 추모 사이트를 위한 斷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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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사상가 김지하 시인을 추모하며 - 김지하를 추도하며 김지하(金芝河), 1941년 2월 4일~2022년 5월 8일) 본명은 김영일(金英一) 김지하를 추도하며 ⑪유신시대 나의 대학시절은 시작부터 암담했다. 겨우 미술대에 입학은 했어도 미대 커리큘럼과 학풍이 싫었다. 그러다가 자유를 향한 저항의 시들을 만났다. 담시 ‘오적’은 김수영의 시와 수필에 매료되었던 청년학생에게 또 다른 신선한 공기 같았다. 현대문학에선 외면한 운문적 설화문학과 이어지면서도 자유로운 시로 보였다. 동아일보 투고 「1974 고행」, 김지하가 주필인 미술선언문 ‘예술은 현실을 반영한다.’ 등은 암담한 예술학도에게 어두운 밤길 후레시 같았다.저 암울하고 공포스러운 유신시대 미술대학 생활에서 희망의 빛은 탈춤 풍물 마당극 같은 마당예술이었다. 그러나 전통문화에서 미래문화를 눈뜨게 한 것은..
민중대통령후보 백기완을 추모하며 백기완(白基琓), 1932년 1월 24일~2021년 2월 15일백기완 선생이 돌아가셨다. 추모하는 이들이 넘쳐난다. 선생이 맺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가 깊기 때문이다. 살펴보면 추모도 선생과의 관계이다. 어느 시점, 어느 인연으로 닿았는지에 따라 추모는 똑같지 않다.선생의 삶만이 아니라 추모하는 이의 삶도 추모에 묻어난다. 그런 이유로 나는 선생을 민중대통령후보 백기완으로 추모한다. 그런 이유로 선생은 나에게 당이다. 그리고 이 추모는 나만의 것이 아니라 꽤 많은 이들이 선생과 맺은 관계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양식이었고, 지금도 그들의 존재방식이다.선생이 가신 그제 새벽별이 하늘을 스물아홉 번 돌기 전의 그해 겨울이었다. 민중대통령후보 수락연설에서 선생은 두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여기 있는 모두가 ..
부용산 넘어 생명의 길로! - 김지하를 추도하며 김지하(金芝河), 1941년 2월 4일~2022년 5월 8일) 본명은 김영일(金英一) 김지하를 추도하며 ⑩지하형님께서 이승을 떠나신 후 49재 되는 날, 남은 사람들이 형님의 혼령을 편안히 보내드리고자 정성으로 모였습니다.돌아보니 형님과의 만남인연, 시절인연이 어언 51년이었습니다.1971년, 노동자 조직 20만 명이라는 큰 뜻을 가운데에 놓고 원주 봉산동 장일순 형님 댁에서 만났습니다.곧바로 가까운 동네가게로 옮겨가서 소주를 대여섯 병 마셨지요.그때는 기본이 2병,노동자 조직보다는 작품구상 얘기가 호기롭고 장쾌하였지요.세월은 빠르고 세상은 소연한데 마음은 처연합니다.가뭄과 폭염을 걱정하며 숲을 바라보니, 바람에 나뭇잎만 흔들릴 뿐... 생명이 세상에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다’는 정해진 이치를 왜 모르겠..
아들아, 우리는 시대의 양심 하나를 잃었다 - 백기완 선생의 부고를 듣고 백기완(白基琓), 1932년 1월 24일~2021년 2월 15일 아들아, 우리는 시대의 양심 하나를 오늘 잃었다스산한 바람에 새벽비 뿌리더니 새가 떨어졌다. 장산곶에서 날아오른 매가 지친 날개를 접었다. 밖에서는 수리와 겨루고 안에서는 구렁이와 싸우던 장산곶매가 날갯짓을 멈췄다. 황망한 소식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황망함을 아들에게 전했지만, 내 아들은 백기완 선생을 몰랐다. 선생을 모르는 대학생 아들과 밥상을 마주하기 힘들었다. 숟가락을 내려놓고 돌아설 때, 비로소 선생의 부고(訃告)를 절감했다. 아, 선생이 가셨구나. 가셔도 벌써 가시고 이 세상에 없었구나.아들아, 고백하건대 아비는 백기완 선생을 오래도록 흠모했다. 너에게 조언했던 여러 말들 또한 선생의 책과 말과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아비..
주님께서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감당할 자 누구리이까 - 김지하를 추도하며 김지하(金芝河), 1941년 2월 4일~2022년 5월 8일) 본명은 김영일(金英一) 김지하를 추도하며 ⑨“하느님! 주님께서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감당할 자 누구리이까?”(시편 130,4)우리는 오늘 이곳 천도교당에서 김지하 시인을 기리며 인내천(人乃天)의 가르침을 되새깁니다.저는 1970년 6월 로마 유학시절, 노동신문에 실린 ‘오적’을 읽었습니다. 재벌,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고발한 판소리 가락의 이 담시는 힘 있고 흥이 넘친 그러나 무섭고 날카로운 예언자적 고발 문학이기도 했습니다. 먼 이국땅에서 우리는 조국과 하나된 마음으로 이 담시를 판소리 음률에 맞추어 크게 읊으며 기도 했습니다.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지학순 주교님과 함께 우리 사제들의 귀에 익은 김지하 시인,..
용납할 수 없는 자유는 금기가 된다 - 마광수를 애도하며 마광수(馬光洙), 1951년 4월 14일~2017년 9월 5일 마광수 교수의 쓸쓸한 부고를 접하니 잠시 동안 일상이 정지됐다. ‘마광수 사건’은, 한 천재 문학교수가 자신의 성적 판타지를 소설로 써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간 사건이다. 이 사건의 정치·사회적 의미를 들여다보려면 19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이라는 시간이 우리에게 어떤 시간대였는가를 살펴봐야 한다. 흔히 ‘3S 정책’으로 알려진 전두환 정권의 문화정책은 우리 사회의 포르노그래피 허용지수를 한껏 높여 놓았다. 정치로부터 멀어져서 관음에 몰두하라는 권력의 보이지 않는 명령이었다. 국가의 공생활에 관여하지 말고 개인의 사생활에 몰입하라는 명령. 그런데 시대가 바뀌자 ‘권력’은 도대체 왜 마광수를 단죄했을까.마광수 수사를 주도했다고 주장하는 당..
질랄라비 훨훨 - 고 백기완 선생님을 추모하며 백기완(白基琓), 1932년 1월 24일~2021년 2월 15일 질랄라비 훨훨 - 고 백기완 선생님을 추모하며 —이순일 열린사회희망연대 공동대표옛날 옛적부터 황해도 장산곶에 전해오는 이야기 있었으니 그 내력은 이러하거든 닭이 우리 인간과 함께 살기 시작한 것은 삼만 오천 년이나 되었고 날개는 퇴화하여 날지 못하게 된 것은 우리 인간이 잘 아는 바라 장산곶 자락에 있는 한 어진 농부의 닭장에 갇혀 있던 모이를 거부한 암탉이 있었으니 겨우 우리를 탈출하여 장산곶 산 속으로 들어갔거든 산 속을 헤매며 온갖 모이를 주워 먹었는데 그의 목숨을 노리는 짐승들이 오소리며 살쾡이, 오랑캐, 해동청 보라매들뿐이었으랴 그는 발톱을 바위에 갈고 부리는 나무 등걸에 쪼아 날카롭게 벼렸지 눈에 한 번 힘을 ..
살아 있는 사람의 부고 - 살아 있음을 증명하기 위한 절규 평생을 외국에서 살다가 말년엔 모국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었다.그는 그리스와 캐나다를 떠돌며 평생 일했고, 번 돈 대부분을 가족에게 보냈다.자식이 대학을 다니고, 친척이 결혼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그 덕이었다.이제는 자신이 사랑했던 이들과 함께 늙어가고 싶었다.그것이 그의 마지막 소망이었다.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귀국한 지 4년이 넘도록 찾아오는 가족이 한 명도 없었다.전화 한 통, 편지 한 장도 없었다.그의 이름은 잊혀졌고, 그의 존재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다.어느 날, 그는 결심했다.“죽음이라도 빌려야 사람들은 나를 기억하겠지.”그는 신문에 자신의 부고를 냈다.마을에는 장례식이 열린다는 포스터까지 붙였다.그리운 얼굴을 다시 보고 싶었다.단 한 번이라도, 그들의 눈에 다시 ‘아버지’로, ‘친구’로..
우리는 마광수를 너무 오래 오해했다. 명복을 빈다 마광수(馬光洙), 1951년 4월 14일~2017년 9월 5일 이단아로 살았던 그의 쓸쓸한 죽음 그는 페미니즘의 적이기만 했을까 그가 죽고 그에 대한 글이 넘쳐난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죽어서 이루어진다는 게 맞는 모양이다. 시대를 앞서 개인의 내밀한 욕망을 얘기했고, 누구도 편들어 주지 않는 이단아로 살았던 그를 안타깝게 돌아보는 글이 대부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빈소를 찾은 문인은 거의 없다. 문단에서도 ‘왕따’였고, 죽음에 이를 만큼 외로웠단 얘기다.그에 대한 글을 쓰려다 문득 생각해 보니 그의 글을 제대로 읽은 기억이 없다. 그의 에로티시즘이 숱한 외설 시비를 낳고 심지어 법정에도 섰지만 그에 대한 나의 어떤 의견도 정작 그를 꼼꼼하게 읽는 데서 출발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말하는 마광수, ..
흰그늘의 미학행, 향아설위의 자리 - 김지하를 추도하며 김지하(金芝河), 1941년 2월 4일~2022년 5월 8일) 본명은 김영일(金英一) 김지하를 추도하며 ⑧1.무당은 신의 일을 행하는 자라고 스스로 그럽니다.신의 일을 하던 이가 돌아가셨으니 이제 누가 그 일을 하여야 하는 것인지요?노겸 김지하 시인은 살아생전, 이도 저도 발붙이지 못하고 죽어 떠도는 ‘찢어진’ 중음신으로 산다고 하셨습니다. 중음신으로 살던 이가 이제 돌아가셔서 중음신이 되어 떠돌고 있습니다. 살아 중음신이 죽어 또 중음신이 되었으니, 이 노릇을 어찌 할 것인가요? 중음신의 중음신이니, 풍자인가요? 해탈인가요? 역려(逆旅)인가요? 살아남은 자는, 남녘땅 사람들은 언제나 비통하고 억울하고 참담합니다. 거듭되는 고통과 고난과 폭풍우의 바다에 어디라 정착도, 침몰도 못하고 떠도..
연세대생이 추억하는 마광수 교수 마광수(馬光洙), 1951년 4월 14일~2017년 9월 5일 지금은 다른 길을 가고 있지만, 나는 군 시절 당시만 해도 작가를 꿈꿨다. 하지만 군인이라는 신분, 문학과는 전혀 거리가 먼 전공 탓에 주변에 도움을 구할 곳이 없었다. 이십대 초반의 내가 떠올렸던 건 국문학과 교수로 학생 사이에서 가장 유명했던 마교수님. 나는 용기를 내 메일로 조언을 구했다. 그 분의 강의 한번 들어본 적 없는 나였다. 그분은 금새 답을 보내주셨고, 일년 동안 한번도 무시하는 일 없이 내 글에 대한 피드백을 해 주셨다. 제대 후 그분의 강의를 수강하며 감사 인사를 드리자 별일도 아니라며 기억도 못하시던 교수님. 다른 평가는 모르겠으나 연세대 제자를 진정으로 사랑하시던 분이었다. 오늘 정말 슬프네. 앨범에 캡처해 두었던 ..
민주 · 통일운동가 백기완을 기억하며 백기완(白基琓), 1932년 1월 24일~2021년 2월 15일 청년 백기완의 넉넉한 무릎,이제 우리가—명진 | 스님·평화의길 이사장편집자주 | ‌영원한 청년, 백기완 선생이 지난 2월 15일 우리 곁을 떠났다. ‘평화의길’ 이사장이자, 전 봉은사 주지명진 스님이 백기완 선생 추모 글을 썼다. 의 양해를 얻어 지면에 담는다. 다시 한 번 선생님의 명복을 기원한다.조계종에서 승적이 박탈된 뒤, 선생님께서는 뵐 때마다 당신도 넉넉지 않으셨을 텐데 꼭 얼마라도 용채를 손에 쥐어주셨다. 지난 가을 병상에 누워계실 때도 마찬가지였다. 말씀도 못하실 때였는데 내가 찾아뵙자, 선생님을 모시고 있던 채원희 씨에게 무언의 눈짓을 보내셨다. 채원희 씨가 주머니에서 얼마간의 노자를 내어주자 그제서야 마음이 놓이시는지 고개를..
「비로소, 부고」 - 죽음조차 앗아갈 수 없는 우리의 이야기 「비로소, 부고」 - 헤매고 찾고 기다린 끝에, 세상을 향해 내놓은 기억회장, 교수, 대표, 장관, 이사장…. 부고 기사에 등장하는 이들은 대개 이런 직함을 갖고 있다. 한국일보 엑설런스랩이 기획한 「비로소, 부고」는 세상을 떠난 보통 사람을 다룬 프로파일이다. 평범하지만 보통이 아니었던,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고인의 사연에 주목해 보자. —편집자 주무언가 빠뜨린 것 같은 기분이 계속 들었다. 기부, 참사, 교통사고, 빈곤 등 몇 가지 사회 이슈에 대한 기초 취재를 진행하던 취재팀은 연일 현기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회의 테이블에는 몇몇 인물의 이름이 놓여 있었다. 생각할수록 그의 온 생애가 궁금해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은 이들이었다. 다만 각자의 이야기를 어떤 실로 꿰려 해도 어쩐지 억지스럽게 느껴졌..
시인 김지하와의 52년 - 김지하를 추도하며 김지하(金芝河), 1941년 2월 4일~2022년 5월 8일) 본명은 김영일(金英一) 김지하를 추도하며 ⑦ 시인 김지하 씨와 이별을 하기 위해서, 저는 서울에 왔습니다. 깊은 회한을 품고 김지하 씨가 없는 서울에 왔습니다.긴 침묵을 계속한 채 홀로 세상을 떠나버린 시인! 왜 그랬는지 묻는 것조차 불가능한 현실이 나를 움츠려 꼼짝 못 하게 합니다. 발길이 무거운 “서울길”이었습니다.제가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깨닫게 되는 이 나라에 대한 사랑, 여기에서 사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은 김지하씨의 작품을 통해서 내 몸속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김지하 씨와 나의 관계는, 시종 말과 함께 있었습니다.중앙공론사(中央公論社)의 편집자였던 내가 1970년 6월, 편집실 한구석에서 읽던 “주간 아사히”(週刊朝日)에 한국의 ..
백기완이 있었기에 백기완(白基琓), 1932년 1월 24일~2021년 2월 15일 세상을 떠난 백기완 선생은 인생 방향을 결정지은 기억을 말할 때 두 가지 일을 빼놓지 않았다. 첫째는 백범 김구를 만난 것인데, 해방 뒤 부친을 따라 고향인 황해도를 떠나 서울에 살던 1948년의 일이다. 백범은 15살 소년 백기완을 앉혀놓고 민족 통일을 논하고는 책에 시를 적어줬다고 한다. 둘째는 같은 시기 거리에서 또래와 주먹질하다 들었다는 말이다. “없는 사람들끼리 싸우면 코피밖에 더 나느냐. 싸움은 있는 놈, 나쁜 놈과 하는 것이다.” 이 경험들은 가족이 한국전쟁으로 나뉘어 살게 된 일과 함께, 민족주의자이자 민중주의자로서 정체성을 확립한 원체험이 되었던 것 같다.백기완 선생의 인생을 논하자면 장준하 선생과의 인연을 빼놓을 수 없다..
좌절을 비웃지 말라… 마광수, 울분 섞인 애도 속 영면 마광수(馬光洙), 1951년 4월 14일~2017년 9월 5일 마광수는 1989년 엮은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에서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은 아니다/ 그러니 죽을 권리라도 있어야 한다”며 “자살하는 이를 비웃지 말라, 그의 좌절을 비웃지 말라”라고 절규했다. 그는 바란대로 “외롭지 않게 한세상을 살며/ 꿈꾸듯 서로 바라보며/ 따사롭게 위안받을 수 있는/ 그런 많은 이웃들”을 갖지도 못했다.마광수(66) 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끝내 화해하지 못한 세상과 영원히 작별했다.고인의 영결식이 7일 오전 서울 용산구 순천향대병원에서 열렸다. 친지와 고교 · 대학 동문, 제자를 중심으로 100여 명이 모인 영결식장 곳곳에서는 분노 섞인 울음과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고인의 한 제자는 “글 쓰는 게 좋았고..
제대로 된 사망기사는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자 감시자다 부고가 아닌 사망기사를 써야 하는 이유… 이준웅 교수 “제대로 된 사망기사는 곧 ‘감시자’의 역할 그 자체”잭 버틀러, 78, 인디아나, 유년시절의 고향에서 계속 살았던 사람. 수잔 그레이, 97, 웨스트우드, ‘펠넬로페’라는 이름으로 즐거운 글을 썼던 사람. 제임스 데이비드, 72, 뉴시티, 등산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었음. 마리 조 다비토, 82, 톨톤, 사람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걸 즐거워함.지난 5월24일 뉴욕타임스가 1면에 실은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사망한 사람들의 목록 중 일부다. 단순히 죽은 사람 이름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사망한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1줄로 요약해 덧붙였다. 이 명단은 1면을 가득 채웠다. 뉴욕타임스는 어떻게 이 많은 사람 특징을 모두 파악할 수 있었을까. 25일..
「비로소, 부고」 - 고인을 기리는 기억의 조각, 그 곁을 치열하게 마주한 뒤, 비로소 전하는 느린 부고 고인을 기리는 기억의 조각, 그 곁을 치열하게 마주한 뒤, 비로소 전하는 느린 부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의 부고 전문 기자인 제임스 해거티(James R. Hagerty)는 저서 『그렇게 인생은 이야기가 된다(Yours Truly)』를 이렇게 시작한다. 미국 시인 겸 소설가 짐 해리슨(Jim Harrison)이 한 소녀의 갑작스런 죽음을 논하며 쓴 ‘Larson’s Holstein Bull’의 마지막 시구를 인용한 것이다. 해거티는 이 책에서 비관적 뉴스가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부고 읽기와 쓰기를 적극 추천한다.“세상에서 전해지는 뉴스는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다. 이런 상황에 대처할 방법이 하나 있다. 먼저 신문 1면을 펼쳐 최근 일어난 끔찍한 사건에 관한 기사를 읽자. 그러고 나서 부고란..
부고기사는 개인의 죽음을 비추는 ‘작은 창문’, 망자가 살던 사회를 비추는 ‘거대한 백미러’이다 삶이 소중한 이유는 언젠가 끝나기 때문이다. 신체적 죽음은 모두에게 공평하지만 언론이 알리는 사회적 죽음은 공평하지 않다. ‘죽음 알림’은 어떤 이가 죽었다는 고지(告知)나 부고(訃告)의 성격을 넘어, 개인의 죽음을 공유하는 사회적 죽음의 의례에 가깝다. 어떤 이의 죽음은 언론이 지향하는 이념에 따라 선택되거나 배제되기 때문에, 부고기사는 개인의 죽음을 비추는 ‘작은 창문’이나 망자가 살던 사회를 비추는 ‘거대한 백미러’에 비유되기도 했다. 부고기사와 부고광고는 성격이 다르다. 부고광고는 언론사의 광고국 직원이 영업 활동을 통해서 게재를 유치하는 것이며, 부고기사가 무료라면 부고광고는 광고료를 지불하고 지면을 사는 유료의 광고 활동이다. 조사결과 지난 1920년부터 2022년까지 100여 년 동안 일간..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레전드’ 요기 베라 사망 로런스 피터 “요기” 베라(Lawrence Peter “Yogi” Berra), 1925년 5월 12일 ~ 2015년 9월 22일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는 명언을 남긴 미국 야구계 전설 요기 베라가 2015년 9월 22일 향년 91세로 세상을 떠났다.뉴욕 양키스 황금시대를 연 요기 베라 뉴욕 양키스 황금시대를 이끌었던 요기 베라는 1946년 미국 메이저 리그 무대 데뷔 후 2년 동안 포수와 외야수를 겸직했다. 신인 시절을 보내던 요기 베라는 1949년부터 주전 포수 자리에 오르며 12년 동안 뉴욕 양키스 황금시대를 연 일등공신이다. 1950년 타율 0.322, 28홈런, 124타점을 기록하며 MVP급 성적을 선보이기도 했다.요기 베라는 주전 포수에 오른 1949년부터 1953년까지 5년 연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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