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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間/술 사주는 읽고쓰기

가장 엄밀한 의미를 좇는 쾌락주의자가 되고 싶다 : 장정일의 독서일기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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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마흔에
다섯 번째 독서일기를 내게 되었다.
기쁘기 한량없다.
- 서문을 대신해

장정일은 마흔에 다섯 번째 독서일기를 출간했다. 그에 대해 더 논하면 장정일에 대한 부러움이 더 커지기에 그만하기로 하자.

그보다는 책의 뒷면에 있는 그가 되고 싶은 것에 공감한다.

오늘날 누가 얼굴을 똑바로 하고 자기 자신을 쾌락주의자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 단어가 가진 가장 엄밀한 의미를 좇는, 쾌락주의자가 되고 싶다.

이제 장정일의 독서일기를 1권부터 7권까지 책꽂이에 넣어두었다. 이제 7권을 읽으면 그의 독서일기에 대한 여정이 끝난다.



장정일의 독서일기 5
장정일 지음/범우사




덧_
독서일기를 읽고 내가 다시 세상에 내놓은 책을 아래에 적는다.
장정일이 책에 대한 인용한 부분과 그것에 대한 생각이다. 장정일의 부연과 인용을 별도로 구분하지 않았다. ( )에 부연 된 것은 나의 생각이다.


<미저리> 스티븐 킹

미저리
스티븐 킹 지음, 조재형 옮김/황금가지

베스트셀러 작가가 대중은 어떤 소설을 싫어하는가? 에 대한 고언. "이것은 따라가기가 어려워요. 때론 다시 뒤로 가서 읽게 해요." 그러니까 이야기를 꼬지 말고, 달님 해님 이야기처럼 혹은 도미노 게임처럼, 똑바로 일직선으로.

(20여 년 전 영화를 본 것이 전부다. 아직도 영화는 충격적으로 남아있다. 마지막 장면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영화가 좋아서 기억하는 것일까, 원작이 좋아서일까? 확인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장정일은 스테픈 킹이라고 적고 있다. 지금은 스티븐 킹. 뭐가 맞는지.)

<신라 최초의 고승들> 신종원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 김용옥

최치원이 신라문명의 기저를 논하면서 삼교, 유, 불, 도가 신라에 들어오기 전에 풍류風流가 있었다고 적었던 바 그 풍류가 곧 신라의 토착적 샤머니즘이란 것이다.

하지만 신라의 기층종교인 샤먼은 불교에 의해 표면적으로 폐퇴하거나 융합된다. 신라가 여러 개의 호족국가로 존재했을 때에는 샤먼으로 족했지만,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불교와 같이 고등한 제도적 종교가 필요했다.

김용옥은 이차돈의 처형사건은 종교적 문제가 그 테마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순수히 정치적 사건이며 왕이 위세를 과시하는 일종의 모략적 고륙계였다고 말한다. 김용옥은 이차돈의 손교를 애써 순교로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불교는 스스로를 호국불교라는 환상 속에 가두었다, 기원에 대한 집요한 탐사자이며 과격한 해석가인 김용옥은 호국불교라는 한국 불교의 환상을 이차돈에서 찾았고, 그의 죽음이 결코 종교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는 것을 밝힌다. 그러니 꿈에서 꺠라는 것이다.

이차돈의 죽음은 무엇일까? 불교를 위한 순교인가, 더러운 정치 놀음의 희생자인가. ... 그러므로 이차돈의 죽음은 온전히 정치적인 것만도 아니며 그렇다고 종교적인 것만도 아니다.

(하나의 원인이 아니라, 둘이 혼재되어 일어난 사건이라는 말인지. 더 흥미로운 것은 다음이다.)

신라는 삼국 중에서 불교를 가장 늦게 받아들인 나라다. 고구려는 372년, 백제는 384년 그리고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가 국교화되었다는 신라는 527년에 가서야 불교를 받아들인다. 요즈음 말로 하면 신라는 세계화가 가장 늦게 진척된 후진국이다. 그런데 삼국 통일은 신라가 했다. 김용옥은 그 이유를 신라가 불교를 가장 늦게 받아들였다는 것은 그만큼 토착성이 강했다는 것이고 그 줏대(주체성)가 통일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던 저력이자 동력이었다. 이 사실은 새로운 천년을 맞는 한국인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김용옥의 주장은 신선하다. 역사가 그것 하나만으로 정해지지 않지만, 가정으로는 충분히 가능하다. 한데 이러한 점을 나는 왜 처음 듣는가. 내 게으름으로 책을 읽지 않아서일까? 다른 주장은 허용하지 않는 풍토 탓일까?)

<다시 읽는 하멜표류기> 강준식

다시 읽는 하멜표류기
강준식 지음/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강준식은 이 책의 머리말에서 숭명배청의 기치를 들고 북벌 계획을 진행하고 있던 효종이 하멜 일행을 받아들이는 것을 계기로 서구 세계에 대한 정보와 그들의 과학 기술을 축척하고 개항에까지 나아갔더라면 우리 역사는 어떻게 바뀌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만약 화란측의 계획이 무리없이 진행되고 조선 왕실이 허용했다면 일본이 본격적인 서구 근대화로 가지 이전에 착실히 닦았던 난학의 기회를 우리도 가져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멜이 제주도에 표류하고 나서 2세기가 지난 뒤, 한반도의 역사는 일제에 의한 치욕적인 식민통치라는 파국을 맞는다.

(<우리는 코레아의 광대였다>가 개정되었다. 역사는 가정이 없지만, 우리 역사에서 위화도회군만큼 결정적인 실수가 하멜에 대한 조선정부의 태도라 말할 수 있다.)

<해월 최시형가의 사람들 > 최정간
동학의 두 번째 교주였던 해월 최시형과 그 후손의 가계사이다. 그러면서 이 가계사는 천도교사와 중첩되며 나아가 항일 독립운동사라는 한국사에 접속된다. 일부 동학 연구자 사이에서는 해월과 북접을 동학혁명의 걸림돌인 동시에 전봉준의 기포를 저지한 보수반동집단이라고 몰아붙이는 반면, 전봉준과 남접은 의로운 진보세력이요 동학농민혁명의 햇불로 추앙받는 설이 지배적이다.

수운과 해월에 의해 태동된 위대한 한울님(시천주) 사상인 동학도 자칫 남접 중심의 반봉건 민중혁명의 외피로만 기술될까 두렵다. 전봉준에게는 동학의 종교적 비젼이나 해월의 후천개벽의 고뇌보다도 긴박한 사회현실의 개혁이 더욱 절실하였다. 즉 해월은 동학이라는 비전을 통하여 역사를 개벽하려 했지만, 전봉준은 절박한 사회현실 문제를 개혁하기 위해 동학 조직을 활용하는데 그쳐 버리고 만 것이다.

까닭은 저자가 해월가의 후손으로 절통하고 안타까운 심정이 가득한 때문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해월의 후천개벽 사상과 전봉준의 무력 혁명에 대한 저자의 설명은 매우 부족하다.

(해월과 전봉준에 대해 궁금했다. 거기에 손병희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해야 할지 늘 고민이었다. 이 책이 답을 주지 못하겠지만, 고민의 실마리는 제공해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마일스 데이비스 자서전> 마일스 데이비스, 퀸시 투르프

마일스 데이비스 자서전 1
마일스 데이비스 외 지음, 성기완 옮김/집사재

흑인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퀸시 트루프와 마일스 데이비스 간에 이루어진 오랜 대담과 방계 자료를 바탕으로 쓰여진 마일스 데이비스의 자서전이기도 하지만 재즈 그 자신의 저서전이기도 하다. 까닭은 마일스 데이비스가 재즈의 온갖 사조를 섭렵하고 창도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며, 이 책은 마일스 데이비스 개인의 신변잡사를 떠나 흑인 음악인 재즈와 재즈 음악인이 예술로 대접받기까지 미국의 사회를 어떻게 헤쳐 나왔던 가에 대한 생생한 기록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번역자는 역자 후기의 마지막에 이젠 번역도 끝났으니 음악이나 들어야지. 무거운 짐을 벗은 느낌이다. 하지만 무거운 짐이 없었던 독자는 줄곧 마일스 데이비스의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었다.

(3권이다. 또 절판이다. 책이야 어떻게 구하겠지만 마일스를 소리가 아닌 활자로 읽을 자신이 없다.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이제 먼저 책을 구하는 것이 먼저이고 읽는 것은 그다음 문제로다.)

<재즈 음악의 역사> 제임스 링컨 콜리어
재즈의 천일야화라고 해야 할제임스 링컨 콜리어의 이 책은, 연대기적인 기술과 열전체의 기술을 유기적으로 종합하고 덧붙여 자기만의 형식과 개성으로 일가를 이룬 아티스트의 음악적 특성을 꼼꼼히 분석하는 삼중의 작업으로 빛난다. 이런 고단한 작업을 저자의 재즈관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런 정도가 되지 않을까. 즉흥으로 규정지어지는 재즈는 형식이 부재한 음악이다. 그래서 많은 장르의 음악이 재즈의 빈 몸을 채웠고, 끝내 해결되지 않는 부분을 유럽의 전통음악(클래식)이 대신해 주었다.

(밀린 재즈 관련 책도 많지만, 절판이다. 독서일기에 항상 재즈 관련 책이 있다. 고전을 해설서보다는 원전을 읽으라 하듯이 재즈도 책보다 소리로 들으면 더 친근하게 다가온다. 장정일의 말처럼 재즈를 들으면서 재즈책을 본다면 더 좋겠지만.)

<번역과 일본의 근대> 가토 슈이치, 마루야마 마사오

번역과 일본의 근대
마루야마 마사오+가토 슈이치 지음,
임성모 옮김/이산

비서구 문명권이 서구의 근대를 받아들이는 통로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강제적인 식민 과정을 통해서이며 두 번째는 이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번역을 통해서이다. 번역의 사전적 의미는 다른 언어로 쓰여진 저작을 또 다른 어어로 바꾸는 일이다. 하지만 이 책은 번역이 시전적 의미만을 충실히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번역이란 번역되어야 할 자구와 번역되는 자구 사이의 일방적인 기호교환에 그치는 일이 아니다. 번역이 그런 것이라면 문화 혹은 문명이란 한 쪽에서 또 다른 쪽으로 일방적으로 흘러내리는 자연현상과 같을 것이다. 모든 문화는 받아들이는 쪽의 응전과 접변과정을 거친다.

중화주의에 빠져있었던 중국(청)은 물론이고 소중화에 젖어 있었던 한국(조선)은 근대의 학습조건인 번역 자체를 거부했다. 번역을 한 편의 근대적 드라마라고 할 수 있을 때, 번역은 우선 타자에 대한 인정이다. 즉 내가 쓰는 언어(문화)와 틀리는 또 다른 언어(문화)가 있을 수 있다는 인정 없이는 번역이란 성립할 수 없다.

그런데 일본이 개항을 준비할 당시의 우리 문제는, 내 언어와 다른 언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말고의 차원이 아니었다. 당대의 대다수 한국 지식인들에게는 다른 언어가 있다는 것에 맹목일 뿐 아니라 바로 내 언어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 한자를 우리말이라고 였던 까닭이다. 우리 나라 소리와 글로 쓰면 한자도 우리말이라고 말한 선비는 나왔지만, 그 순간까지도 자국어에 대한 주체의식으로 철저히 무자한 지식인 집단은 나오지 않았다. 내 언어도 없고 다른 언어도 없이 한자와 중국문화를 우리 것으로 착각해야 했던 데에 조선 근대화의 어려운 이중 질곡이 있지 않았을까?

우리가 읽고 있는 논어, 맹자라는 것은  외국어로 쓰여져 있다. 우리는 그것을 번역해서 읽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던 오규 소라이, 이 학자는 1666년에서 1728년 사이에 살았던 이 학자의 발언은 중국과 한자를 타자화하면서 주체성에 눈 뜰 계기를 마련해 주었고 일본어 번역으로 읽을 때 중국인도 모르는 중국을 더 잘 알 수 있다는 말로 비교언어학적 방법은 일신이생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일본 특유의 문화수용관을 준비했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대부분의 서양 개념들이 일본에 의해 번역된 것이다. 100여 년 전에는 언어에 대한 주체성이 없었고 타자에 대한 인식도 없다. 지금은 어떠한가.)

<알몸 박정희> 최상천
<이순신> 이광수

알몸 박정희
최상천 지음/인물과사상사

이순신
이광수 지음/다나기획

세종로에는 세종대왕이 없다. (지금은 어정쩡한 모습으로 이순신과 공존하고 있다.) 아주 몰품없는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있다. 이것을 세우기로 한 것이 박정희다.

(이순신 장군 동상의 친일적 논란은 따로 논의하기로 하자.)

박정희의 독서체험은 소박하다. 그가 확실히 읽은 책이라곤 <이순신>, <나폴레옹 전기>, <알렉산더 대왕전>, <플루타르크 영웅전> 그리고 <삼국지>이다. 이중에서 <나폴레옹 전기>는 청와대 시절에도 짬짬이 읽었을 만큼 영향과 큰 감동을 주었다. 코르시카의 시골뜨기에서 황제로 등극하는 나폴레옹에게서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 박정희도 나도 천황(황제)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본 것이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의 끝물에 시민들의 폭동 진압의 책무를 맡아 파리에 진입했다가 그길로 황제가 된 사람이다. (박정희도 그것을 사용하려했다. 결국 불발로 끝났지만.) 결국 그 다음 해에 박정희는 성공한다.

박정희가 두번째로 애지중지한 책이 이광수가 쓴 <이순신>이다. 이 소설은 1931년 5월 30일부터 이듬해 4월 3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다. 그런대 이 때에 일본제국이 중국침략을 위한 전초전으로 만주사변을 일으키던 해와 일치한다. 일본으로서는 대륙진출의 꿈이 이룩되느냐 무산되느냐하는 중대한 시기에, 왜적을 물리친 조선의 호국영웅담이 신문에 연재된다? 있을 수도 없는 일이 가능했던 까닭은 간단하다. 이광수의 <이순신>은 그가 1922년에 발표했던 <민족개조론>의 소설적 번안이다. 즉 조선인은 당파 싸움만 일삼고 국가에 대한 충성심도 없는 사악한 민족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광수가 쓴 <이순신> 속의 이순신은 왜적과 싸우지 않고 조선 왕실의 무능과 부패와 싸우다가 모함을 뒤집어 쓰고 백의종군한다. 임진왜란은 조선과 왜적의 싸움이 아니라 성웅과 속물의 싸움으로 치환된다. 거기에 반해 왜장의 용맹과 행동거지를 칭찬까지 해주는데 조선총독부가 왜 연재를 막으랴?

(이광수의 <이순신>에는 비판과 그 비판에 대한 비판의 논란이 있다. 하지만 시기적으로 장정일의 지적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이광수가 내세운 <민족개조론>은 애초에 그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던 (물론 의도했지만) 일제에 의해 많이 애용되고 그것으로 조선침탈을 정당화 하려 했다.)

어린 박정희는 <이순신>을 읽고 일본인에 대한 적개심은 간곳 없고 조센징에 대한 환멸만 갖제 되었는데, 그것이야말로 일제가 우리 민족에게 심어준 '민족적 자기 부정'이다. 박정희는 일제의 식민사관에 단단히 세뇌된 사람으로 '당파 싸움이 나라 망쳤다'는 것과 '조센징은 때려야 말을 듣는다'는 신조를 신봉했고 먼 미래에 쿠데타로 탈취하게 될 나라를 일사분란과 무한폭력으로 다스리게 된다. 박정희는 <이순신>을 통해 '조센징론'을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모함과 삭탈관직에도 묵묵히 백의종군하는 이순신의 모습에서 놀랍게도 '나'는 없고 '국가'만 있는 성웅 이순신을 추출한다.이광수와 박정희에 의해 조작된 '바보 이순신', 성웅의 정신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멸사봉공. 나를 죽이고 국가를 받든다는 끗을 가진 이 무시무시한 구호는 원래가 주군에 대한 끝없는 충성을 좌우명으로 했던 사무라이 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나쁜 책은 개인에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나라와 인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일제 엘리트 교육을 통해 '나'는 없고 '국가'만 알도록 세뇌된 사무라이 박정희의 뇌 속에서 성웅 이순신, 또 다른 말로는 바보 이순신(왜? '나'에 대한 존엄이 없으니까)이 탄생했다고 말한다.

<국가와 혁명과 나>라는 저서에서 "이 혁명은 인간 개조 - 즉 국민 개혁혁명인 것이다"고 박정희가 내세웠던 "인간 개조"가 그러니 얼마나 섬뜩한 것인가. 박정희는 멸사봉공하는 국민들로 가득찬 국가만능의 세계를 꿈꿨고 자신은 초국가적인 존재가 되길 원했다. 천황과 같은 영구 집권자와 일사불란한 국민의 복종에 의해 유지되는 유신체제가 그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한부분을 인용하면서 저자의 의중이 무엇이었나를 짐작해 본다. "이런 자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나는 문득 한 단어가 떠오른다. 그러나 종교적 용어를 사용하는 게 뭣해 나는 그를 야수라고 부르기로 했다." 뭘까? 악마?

<재즈우화> 빌 크로
<재즈> 루시엥 말송, 크리스티앙 벨레스토

재즈 우화
빌 크로 지음, 윤태희 옮김/열림원

재즈
뤼시앵 말송 외 지음, 박인철 옮김/한길사

재즈는 미국의 음악이지만 재즈 비평의 시작과 발전은 모두 유럽에서 이루어졌다. 특히 재즈에 열성적인 프랑스인과 독일인의 노력이 없었다면 재즈는 아직까지 미국의 여러 대중 음악 가운데 하나로 힘겨운 명맥을 이어갔을지도 모른다.

<칼의 노래> 김훈

칼의 노래
김훈 지음/문학동네

역사소설이 갖는 국수주의와 영웅전 모두를 대신 <칼의 노래>가 전하는 것은, '칼로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는 명예에 대한 사유와 칼 쥔 자의 운명에 대한 비틀기아다. 이 낯설고 이상한 소설은, 칼을 든 자는 적군과 아군이 모두 적으로 화하는 운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말하는 듯하다. 이순신의 예에서처럼 한 개인에서 집중된 무장력은 곧바로 감시와 의심이 대상이 된다. 그래서 한 나라의 무장력을 온통 자신의 어깨에 짊어진 장군은 '자연사'하기를 원한다. "나는 결국 자연사 이외의 방식으로는 죽을 수 없었다. 적탄에 쓰러져 죽는 나의 죽음까지도 결국은 자연사일 것이다." 장군은 그렇게 죽기를 원했고 그래서 살기를 바랏다. 이순신 최대의 라이벌 선조는 거기에 안도하며 사후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순신에 대한 평가는 항상 조심스럽다. 앞에서 이광수의 <이순신> 그리고 박정희의 이순신이 겹친다. 이순신이 선조의 라이벌이 될 수 있었을까. 책장에서 오래된 이 책을 다시 꺼내야 할 이유가 생겼다.)

덧붙임_
행복한 책읽기와 독서일기
[읽을책]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 장정일
인민人民이 책을 읽지 않으면 우중愚衆이 된다 : 장정일의 독서일기 6
가장 엄밀한 의미를 좇는 쾌락주의자가 되고 싶다 : 장정일의 독서일기 5
독서에도 습관의 때가 묻는다 : 장정일의 독서일기 4
책을 만드는 모든 분들께 절을 올리고 싶다 : 장정일의 독서일기 3
책을 파고들수록 현실로 돌아온다 :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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