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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외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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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의 신분은 자식의 지위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누가 죽었다고 … 김승희 「한국식 죽음」 오늘 이웃의 장례식이 두 군데가 있었다. 평소 왕래가 빈번했던 분이라 그분의 생전 모습이 여전히 선명하다. 늘 인자하게 웃으시던 할머니의 가시는 길 평안하시라며 찾은 빈소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음식을 먹기에 번다한 모습이다. 어색하게 굳은 영정 사진 앞에 국화를 놓고, 상주와 인사를 하고, 이내 자리를 떴다. 잠시 할머니의 모습을 상기할 시간도 주어지지 않는 장례식이었다. 비단 이 장례식만의 모습은 아니다. 비슷한 모습의 영정사진과 비슷한 옷을 입은 상주들… 장례식장을 찾을 때마다 다른 점은 별로 없다. 누가 돌아가셨든 같은 모습, 같은 절차에 따라 장례는 진행된다. 이런 장례식장의 모습을 보면서 가끔 생각해 본다. 장례식장에 오는 저들 중 과연 망자를 기..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시인 박남철 10주기 박남철(朴南喆), 1953년 11월 23일 ~ 2014년 12월 6일 지난 6일을 아무도 기억하거나 기록하지 않는다. 문단의 괴짜 사고뭉치 이단아를 생각하기 싫은 까닭이다. 그가 절정기를 살았던 중랑천변을 나 홀로 걷는다ᆢ. 강은 얼지 않았지만 시인은 여전히 꽁꽁 언 겨울강에 돌을 던지고 있다. 쩡쩡쩡쩡쩡ᆢ그의 초기 시 ‘시인의 집’을 떠올린다스승 조병화께서 악수로써 껄껄껄 세배를 받으신 다음 구라파적 술잔에 꼬냑을 따라주시면서, 스승의 연구실을 따뜻했습니다.얘 남철아, 시인에겐 집이 없지 여기 장영자씨도 계시지만 평론가에겐 집이 있지 소설가에게도 집은 있고 극작가에게도 집은 있고 심지어 수필가에게도 높은 집은 있는 법이지 그러나 얘야 남철아, 시인에게는 집이 없지 그냥 사람 인자 시인이지 뭐, 헐헐헐...
아, 리영희 선생 - 백기완 리영희(李泳禧), 1929년 12월 2일~2010년 12월 5일 아, 리영희 선생—백기완리영희가 도대체 누구인데 그의 죽음을 두고 그리 시끄러운 거요 이름도 처음 듣는다는 이의 말에 시끄러운 게 아니지요 또다시 목숨을 걸고 한마디 하시는 거지요 그러구선 나는 먼 날을 더듬었다 어느덧 서른 해가 지났는가 선생이 내 병문안을 왔다가 백선생, 나 대포집이요, 나오시오 그때 일어서지도 못하고 죽도 못 삭이는 날 불러내던 그분은 뉘시던가한살매 목숨을 걸고 불러내던 분이다 분단이 쇠벽이 될 땐 겨레 넋을 불러대고 온몸을 묶을 땐 자유혼을 불러대고 되는 마을엔 새벽을 여는 이가 있듯이 내리친 어두움은 우주가 아니라고 외치고 날강도의 거짓부리기는 우상이라 외치고 할 말을 버린 붓끝은 곧..
잘가 박남철 선배. 거기 가서는 싸우지 마라 박남철(朴南喆), 1953년 11월 23일 ~ 2014년 12월 6일박남철 시인이 어제 아침 죽었다. 낮 12시쯤 후배 시인에게서 온 연락을 받고 난 멍해졌다. 문단 최고의 깡패인 그를 안 본 지 20여 년 지난 것 같다. 지난해 말인가 페북 친구 요청이 왔길래 묵살했다. 며칠 뒤 살펴봤더니 그 스스로 철회를 했다. 난 알고 있다. 그와 엮이는 순간 내 인생이 피곤하고 힘들어질 거라는 걸. 그는 내 대학 1년 선배다. 방위를 마친 그와 나는 대학 4년을 같이 보냈다. 그와 지긋지긋하게 싸운 날은 셀 수도 없다. 등판도 거의 같은 시기에 했고 내가 3년 후배인 류시화 박덕규 이문재와 시운동 동인을 시작했을 때 그는 나를 엄청 시기했고 괴롭혔다. 그가 문단에서 벌인 깡패짓은 영원히 한국문학사에 남을 것이다..
리영희 선생 영전에… 진정한 자유인과 함께한 우리는 행복했습니다 리영희(李泳禧), 1929년 12월 2일~2010년 12월 5일 리영희 선생 영전에… 진정한 자유인과 함께한 우리는 행복했습니다리영희 선생님,초겨울의 우중충한 아침에 선생님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셨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습니다. 병환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깊으셔서 오래가시기 어려울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막상 비보를 접하고 보니 한 번 더 찾아뵙지 못한 것이 한탄스럽습니다. 이렇게 낙엽 지고 스산한 겨울에 무엇이 그리 바빠 서둘러 떠나셨습니까?선생님은 고은 시인의 말처럼 ‘어둠의 시간, 아픔의 시간’에 계셨습니다.1970~80년대 군사독재의 터널 속에서 빛을 찾아 헤매던 저희 세대 한국 청년들의 영원한 스승이셨습니다. 대학의 강의실에서는 좀처럼 만날 수 없었던 사표였으며, 만년필 한..
‘새 박사’ 윤무부 경희대 명예교수 별세, 향년 84세 윤무부(尹茂夫), 1941년 4월 15일 ~ 2025년 8월 15일 (향년 84세)‘새 박사’로 이름을 널리 알린 소석(素石) 윤무부(尹茂夫) 경희대 생물학과 명예교수가 15일 0시1분께 경희의료원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유족이 전했다. 향년 84세. 윤 교수는 2006년 뇌경색으로 쓰러졌다가 재활에 성공했지만, 지난 6월에 재발해 경희의료원에서 투병해왔다.경남 통영군 장승포읍(현 거제시 장승포동)에서 태어난 고인은 한영고, 경희대 생물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5년 한국교원대에서 ‘한국에 사는 휘파람새 Song의 지리적 변이’ 논문으로 생물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1979∼2006년 경희대 생물학과에서 강의했다. 2006∼2014년 경희대 생물학과 명예교수로 있었다. 1990년 한국동물학회 이사, 19..
박남철 시인, 그가 갔다 박남철(朴南喆), 1953년 11월 23일 ~ 2014년 12월 6일 지난 1980년대 중반부터 해체시의 선두 주자로 불리고 있는 박남철 시인, 투병 끝에 사망 —여러 가지 일화를 남겨두고 시세계를 영원히 떠나1979년 『문학과 지성사』로 등단한 박남철 시인은 황지우와 더불어 해체시의 선두 주자로 불리고 있는 시인이다.1980년대 중반부터 모든 금기를 해체하는 ‘해체시’로 유명해졌다. 그의 작품은 수사나 시의 구조보다는 형태 파괴, 풍자, 분노 등을 여과 없이 표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독자놈 길들이기」라는 시는 시인과 독자의 관계까지 파괴하는 파격을 보여주었으며, 문학평론가 김수이는 박남철을 “문법 해체를 통해 억압에 저항하려는 문학적 시도”라고 평가했다. ​ 여섯 번째 시집인 『바다 속의 흰..
최진실 - 21세기의 제망매(祭亡妹) 최진실. 1968.12.24 ~ 2008.10.2 2008년 내 일상의 평정을 가장 사납게 무너뜨린 것은 최진실의 죽음이었다. 그 죽음은 내 삶의 지침인 ‘안심입명’이나 ‘처변불경’ 같은 말을 탄지지간에 웃음거리로 만들었다.별일이었다. 지난해 삶을 버린 연예인이 최진실만은 아니었고, 평소 ‘배우 최진실’한테 홀딱 반해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이 해에는 또 홍성원, 박경리, 이청준 같은 한국 산문문학의 대가들이 타계했다. 이 죽음이 남긴 자국은 내 마음에서 이내 희미해졌다.가령 이청준의 죽음은, 아릿한 슬픔과 함께, 이제 한국문학의 한 시대가 막을 내렸구나, 하는 소회를 남겼으나, 내 마음을 거칠게 샐그러뜨리진 않았다.지난해 대한민국의 대사(大事)는 이런저런 개인의 죽음이 아니었다. 진짜 큰일은 제6..
신경림 성좌(星座)를 지상에 두고 신경림(申庚林), 1936년 4월 6일~2024년 5월 22일고(故) 신경림 선생님을 추모하며지상의 시(詩) 쓰기를 멈추신 선생님 ‘강정마을 지키기’에 같이 한 기억의 소중함 말로만 떠드는 환경운동가들에 비판과 걱정 하늘의 큰곰~ 전갈자리서 길 잃었을 거목마을 숲 같았던 선생님마을 숲은 난해하지 않다. 오르기에 힘들지 않다. 산길이 문득 깊어서 ‘이쯤에서 길을 잃어야겠다 ‘고 스며들어도 길을 잃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마을 숲의 다정한 보살핌을 그리워한다.시도 비슷한 면이 있다. 난해하지 않으나 엄하고 가지런하고 따뜻한 향기를 지닌 시들은 일종의 공공선처럼 느껴진다.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안온해지기도 하니 말이다.일주일 전, 마을 숲 같으셨던 시인께서 세상을 뜨셨다는 소식을 들었..
인생이 망한 것 같아 억울할 때 나는 부고를 쓴다 인생이 망한 것 같아 억울할 때 나는 부고를 쓴다 특별하지 않은 삶이 어디 있나 신문 귀퉁이에 자리해 지나치게 쉬운 글어떤 사람이 어떠한 이유로 세상을 떠났다는 공고타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매개체이자장례비용을 나눌 수 있도록 연결해 주는 문화적 장치그런데잘 쓴 부고에는그 이상의 감동이 있다.나의 첫 번째 부고누구와 함께 헸는지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무엇을 이루었는지대부분 시시콜콜한 이야기지만부고는 인생이 응축된 문장이 모인작은 평전죽음으로 읽는 삶의 이야기때로는 단점도 가감 없이 드러내고사랑하는 사람에게 충실하면서도바람둥이였으며, 대중의 관심에늘 목말라하는 뜨거운 열정의 스페인 남자였다.—피카소 부고당부가 담기기도 한다.내 무덤에 와서 울지 마라.나는 거기에 없고 잠자는 것도 아니다.나는 수천 개의..
반성 2025 - 검찰 사망 부고에 부쳐 쓸쓸하다.사생활이 걸레 같고 그 인간성이 개판인어떤 유능한 판·검사가고결한 인품과 깊은 사랑의 성자의 얼굴을 하고정의를 선고할 때처럼역겹다.그리고 보통 살아가는 어리숙하고 착하고가끔 밴댕이 소갈딱지 같기도 한 이런저런 모습의평범한 시민에게 법의 잣대를 들이댈 때처럼.그보다 훨씬 똑똑하고 세련된 그가그보다 훨씬 자극적이고 도색적인 그가권력 앞에서는 비굴하게 굽실대면서서민 앞에서는 도덕을 설교하는 순간처럼.국민을 위한다 말하며 제 배를 불리고,법치를 말하며 정치에 줄을 대고,역사를 심판한다 떠들면서도스스로는 단 한 번도 심판대에 서지 않는 판·검사와.어쨌든 나는 견디며 살았었다.오늘도, 숨을 뱉는다. 덧_김영승 「반성 190」을 빌어 반성 190 - 김영승반성 190—김영승쓸쓸하다. 사생활이 걸레 같고..
“가난하다고 사랑을 모르겠는가” 하늘로 떠난 민중시인 신경림 신경림(申庚林), 1936년 4월 6일~2024년 5월 22일 가난한 사랑 노래—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농무 —신경림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 대원의 호각 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 없이 뇌어 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 소리도 그려 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
뉴욕 타임스 부고 기사를 통해 본 미국문화 아이콘 요기 베라 로런스 피터 “요기” 베라(Lawrence Peter “Yogi” Berra), 1925년 5월 12일 ~ 2015년 9월 22일미국 최고 권위의 신문 뉴욕 타임스 부고 기사를 온라인으로 즐겨본다. 하루에 한 번 정도는 꼭 빼먹지 않고 찾아 읽는다.‘Obituaries’란 컷제목의 부고 기사는 많은 이의 죽음을 통해 여러 사람의 인생을 되짚어보며 새로운 삶을 깨우칠 수 있게 한다. 개인의 이력서나 단순한 경력 나열 중심의 국내 신문의 부고기사와는 달리, 뉴욕 타임스는 고인의 삶을 다양한 모습으로 포착해 자세하게 묘사하며 흥미로운 기사거리로 만든다. 뉴욕 타임스의 부고기사가 인터넷판과 종이신문에서 모두 분량의 제약을 받지 않고 장문의 수준 높은 기사가 많은 것은 독자가 그만큼 즐겨 읽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농무」 「가난한 사랑노래」 쓴 문단 거목 신경림 시인 별세 신경림(申庚林), 1936년 4월 6일~2024년 5월 22일 못 가져 서러운 이들의 한과 신명을 정감 있게 그려 사랑받은 『농무(農舞)』의 시인 신경림 씨가 22일 오전 8시 경기도 고양시 국립암센터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의대 재학 시절부터 고인과 인연을 맺어 온 센터장 서홍관 시인 등이 고인의 마지막 길을 지켰다고 한다. 88세. 1936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중학생 때 한국전쟁을 겪었다. 충주고를 거쳐 동국대 영문과에 진학, 56년 ‘문학예술’에 ‘갈대’ 등이 추천돼 등단했지만 시 쓰는 일에 회의를 느꼈다고 한다.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고 생생한 마당에 시작(詩作)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생각이었다. 65년 “네가 시를 쓰지 않으면 나도 쓰지 않겠다”며 붙드는 김관식 시인의 손에 ..
민주화가 나은 역설, 검찰 사망 검찰(檢察), ~ 2025년 9월 26일 민주화는 권위주의의 직접적 폭력을 약화시켰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권력의 공백이 생기면 누군가가 그 자리를 메운다. 한국의 경우, 군부와 정보기관의 영향력이 축소되는 과정에서 검찰이 그 공백을 차지했고, 오늘날 사실상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조직으로 자리 잡았다. 이 아이러니는 민주화가 곧바로 모든 권력 집중을 해소하지는 못함을 보여준다. 권력 구조의 계보: 누가 ‘국가 권력’의 주인이었나해방 이후, 이승만 정권기에는 경찰이 정권의 핵심 통제 도구 역할을 했다. 언론 통제, 학생 · 시민 동원, 반공 통치 등에서 경찰력이 동원되며 정권 유지를 보조했다는 역사적 평가가 있다. 박정희 군사정권이 등장한 뒤에는 정보기관과 군부의 비중이 커졌다. 중앙정보부(중정)와 방..
전두환 부고에 부쳐…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전두환(全斗煥), 1931년 1월 18일~2021년 11월 23일 호남에 대설주의보가 발효된 날 아침, 서울 인사동으로 ‘글과 수묵, 사진으로 만나는 윤상원’ 전시회를 보러 가기 위해 시내버스를 탔다. 갑자기 찾아온 추위에 사람은 옷깃을 여미고 종종걸음을 쳤다. 버스 차창 밖으로 초겨울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윤상원을 오랫동안 그려온 하성흡 작가를 생각하다가 전두환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한순간, 멍해지더니 수많은 장면이 눈앞에 영화처럼 흘러갔다. 오래된 슬픔을 창문에 새긴 채 금남로를 바라보고 있는 전남도청이 떠올랐다. 그리고 인사동의 전시장에서 윤상원을 만났다.“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입니다.”5·18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이 남긴 말이다. 윤상..
시인 김수영 씨 버스에 치여 절명 - 1968년 6월 16일 김수영(金洙暎), 1921년 11월 27일 ~ 1968년 6월 16일 시인 김수영 씨 버스에 치여 절명 시인 김수영(金洙暎) 씨가 15일 밤 11시 20분쯤 서울 마포구 구수동 96 앞길에서 길을 건너다 서울영25277호 좌석버스(운전사 장육인·36)에 치여 중상을 입고 적십자병원에 입원 중 16일 오전 9시 별세했다. 향년 47세. 유가족으로는 서울 마포구 구수동 41의 2에 미망인 김현경(金顯敬) 여사(41)와 장남 준(雋) 군(18) 등 2남이 있다. 김 씨는 해방 직전 문단에 데뷔, 주로 주지적 사회참여의 저항시를 써왔으며 시집 『달나라의 장난』 외 300여 편의 시와 역서 『20세기의 문학평론』 등 10여 권을 냈다. 장례는 18일 오전 10시 예총광장에서 문인장으로.
검찰개혁이지 검찰개편이 아니다. 「법률신문」의 이상한 논리 나는 감히 단언코자 한다. 반개혁가의 개혁가에 대한 악랄한 박해는 한 번도 미뤄진 적이 없으며, 그 수단의 극렬함도 이미 극에 달했다. 오직 개혁가만이 아직도 꿈을 꾸고 있으며, 늘 손해만 보고 있다. 이 때문에 중국은 아직도 개혁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이후, 이러한 태도와 방법은 반드시 고쳐야 한다! 100여 년 전, 노신은 말했다. 100년이 지났지만 다르지 않다. 「법률신문」이라는 곳에서 말장난을 하고 있다. 누구의 발상인지 모르지만, 잘못을 잘못으로, 나쁜 일을 했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방법을 찾았다. 말 또한 번지르하다. '가치중립적'인 표현을 쓴다고. 방송프로그램 개편하는 것과 같다는 것인지. 검찰개혁이지 검찰개편이 아니다. 알림‘개혁’ 대신 ‘개편’을 씁니다최근 ‘검찰 개혁’, ‘사법 개..
박남철 시인이시여, 분노와 핏대 없는 그곳에서 영원히 안식하시라 박남철(朴南喆), 1953년 11월 23일 ~ 2014년 12월 6일 박남철 시인과의 짧은 인연 6년 전 어느 초가을날 지성찬 시조시인과 함께 박남철 시인을 처음 만났다. 그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민경환 시인과 같이 안성에서 제법 규모가 있는 식당을 공동운영(적어도 형식적으로는)하고 있었다. 마을의 한 식당에서 술을 마셨고 다른 테이블의 손님과 시비가 붙었으며 그 시비는 고래심줄처럼 끈질기게 이어졌다. 여차하면 몸싸움이라도 벌어질 일촉즉발의 험악한 분위기였다. 물론 처음엔 뜯어말렸으나 상대편의 기세도 만만찮아 만약 집단패싸움으로 번질 경우 나도 거들기 위해 예비동작까지 머릿속에 그려 넣고 있었다. 다행히 마침 경찰이 출동하는 바람에 구체적인 몸싸움까지 가진 않았지만 덕택에 밤새 통음으로 시달려야 했다...
후반에 청춘을 뒀던 사나이 - 故 송해 방송인 송해(宋海), 1927년 4월 27일~2022년 6월 8일 후반에 청춘을 뒀던 사나이—방송인 송해—장재선세상 곳곳에 노래를 퍼트리는 삐에로를 자처했으나 그는 떠나온 곳에 대한 그리움을 누르느라 매일 면벽한 수도승이었는지 모른다 어느 날 도가 통해 조물주와의 타협에 성공한 듯 청춘을 생애 뒷부분에 두는 능력이 그에게는 있었다주름진 얼굴의 세월을 경쾌한 웃음으로 바꾸고 늦가을과 겨울의 무거운 공기를 메쳤는데 여름날의 푸른빛만 사랑한 것은 아니어서 모든 색을 다 껴안고 취흥에 겨워서 흔들거리는 척 세상의 시름을 보듬어 달래다가 툭, 사라졌으나지금도 누구 눈에는 가끔 보인다 노래하고 춤추며 웃는 청춘의 그 마음들 곁에서.시작노트송해 선생이 지난 6월 95세로 타계했을 때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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