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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외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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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마음 곁에서 - 故 송해 방송인 송해(宋海), 1927년 4월 27일~2022년 6월 8일 노래하는 마음 곁에서 - 故 송해 방송인—장재선세상 고샅고샅 노래를 전하는 삐에로를 자처했으나 그는 망향의 시간을 다스리느라 나날이 면벽한 도인이었는지 모른다 어느 날 도통해 청춘으로만 살게 돼 푸른 계절의 빛을 노래에 실어 가을과 겨울에도 마구 퍼트렸다 무거운 세월을 경쾌한 웃음으로 바꾸고 취흥에 겨워서 흔들거리는 척 모든 계절의 곡조를 다 품어주다가 툭, 사라졌으나 지금도 누구 눈에는 그가 보인다 노래하고 춤추며 웃는 그 봄의 마음들 곁에서. —『별들의 위로』 ‘전국 노래자랑’을 34년간 진행한 단일 TV 프로그램 최장수 진행자, 기네스북에 등재된 ‘세계 최고령 TV 음악경연 프로그램 쇼 진행자’, 3년 전 95세..
야수의 피를 지닌 한 시인이 영면했다 - 박남철 박남철(朴南喆), 1953년 11월 23일 ~ 2014년 12월 6일 최근 야수의 피를 지닌 한 시인이 영면했다. 박남철 시인이다. 박남철은 이성복, 황지우와 함께 80년대 해체시의 선두주자로 평가되는 시인이다. 1980년대는 리얼리즘적 민중시가 유행하던 시대였다. 이런 시대에 그는 모든 금기에 도전하는 과감한 시를 보여주었다. 전통적 수사나 구조를 파괴함으로써 냉소, 분노 등을 여과 없이 표현했다. 해체를 통해 모든 억압에 저항하려는 문학적 시도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독자놈들 길들이기」라는 시는 시인과 독자의 전통적 관계를 부정하는 파격을 보여주었다. 한마디로 기본적인 불문율을 깨뜨린 하나의 사건이라 할 만하다. 독자놈들 길들이기 —박남철 내 詩에 대하여 의아해하는 구시대의 독자 놈들에게— 차렷..
전유성, 그저 웃긴 사람이 아니다. 천재다. 편히 쉬시라. 전유성(全裕成), 1949년 1월 28일 ~ 2025년 9월 25일 (향년 76세) 전유성은 말은 어눌해 보여도 그의 깊이가 있듯이 글도 약(? 나는 구라를 약이라 말하고 싶다)을 정말 잘 판다고 생각한다. 시골 장터에서 약을 팔 때 약의 효능을 분석, 검증하고 사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모두 파는 사람의 약(말)에 넘어가 약을 사지 않았던가. 물론 거기에 약간의 유희, 장돌뱅이나 원숭이 또는 차력이 양념으로 곁들여진다.하늘무대, 그곳에서도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으리라.전유성에게 고정관념이란 단지 만들어 낸 단어에 불과하다.말이 느리면 빨리하라고 하고, 빠르면 느리게 하라고 하는 게 맞을까? 느리면 더 느리게 해봐 이게 더 맞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내 생각엔 느려야 더 빛나는 사람이 있다. 전유성,..
우리 모두가 '죄 없는 잘난 사람'이 아닐까 틀림없이 정통성과 정당성이 결여된 권력의 출현은 사회 · 문화 · 경제 · 교육, 기타 여러 분야에 그릇된 영향을 주고 그 본질을 왜곡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틀림없는 것은 사회 여러 분야가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그런 부당하고 부정한 권력이 출현할 수도 있다.현실성 없는 예가 될지 모르지만 이른바 신군부 세력이 워싱턴이나 파리나 런던에 출현했다고 가상해 보자. 한 정보사령관과 몇몇 장성이 몇천 명의 군대를 풀어 워싱턴 · 파리 · 런던을 장악하고 각료를 연금했다고 해서 미국이나 프랑스 · 영국에 우리 식의 5공이 생겨났을 것 같지는 않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서만 유독 5공이 가능했던 대는 우리 사회 전체가 책임져야 할 부분도 있는 셈이 된다.그런데도 우리의 5공 문제 처리는 철두철미 연..
하늘무대로 떠나다, 전유성 별세 향년 76세 전유성(全裕成), 1949년 1월 28일 ~ 2025년 9월 25일 (향년 76세) 코미디 대부, 개그계 스승, 1호 개그맨.2025년 9월 25일 세상을 떠난 전유성은 느릿하면서도 촌철살인의 언변으로 온 국민을 웃기고, 수많은 희극인 후배의 존경을 받는 코미디언이었다.1949년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서 태어난 그는 서라벌고등학교,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연출과를 졸업한 뒤 배우를 꿈꿨다.탤런트 시험에서 4번 연달아 낙방한 뒤 TV에 출연하는 직업을 찾다가 코미디계 문을 두드렸다.당시 인기 MC 겸 코미디언이었던 ‘후라이보이’ 곽규석을 막무가내로 찾아가 방송 원고를 써주는 일종의 희극 작가로 출발했고, 1969년 TBC ‘쑈쑈쑈’의 작가로 방송가에 본격 발을 들였다.코미디언으로 주목받게 된 것은 KBS ‘유..
모르고 싶어도 알게 되는 죽음이 너무 많았다 부고를 연달아 쓰게 되는 날엔 이 직업이 결국 타인의 죽음을 기록하는 일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 전 생애에 걸쳐 남긴 발자취를 허겁지겁 요약하는 일. 그래서 죽지 마라, 아무도 죽지 마라, 하고 ‘[사망]’ 속보가 뜰 때마다 주문처럼 외었다. 목숨이 아까워서라기보단 그 사연 속으로 또 뛰어들 생각을 하면 아득해져서 그랬다. 모르고 싶어도 알게 되는 죽음이 너무 많았다. —『청춘유감』, 한소범, 「아무도 죽지 마라」
부디 혼자 먼저 가지 말자. 우리 함께 오래오래 남아 자연사하자 우리는 모두 자살 생존자이다자신이 자신을 놓을 때 영생을 얻을 수 있다. 영생을 얻는 길은 자살뿐이다. 자고 일어나면 듣는 수많은 자살 소식, 하지만 그 많은 자살 중 진정한 자살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자살을 가장한 사회적 타살이다. 자신을 놓으려는 행위가 아닌 타인이나 다른 이유가 나를 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었다. 수많은 자살은 진정한 의미의 자살이 아니다.자연이 인간에게 선물한 온갖 선물 중에서 적절한 시기에 죽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는 것을, 각자는 무엇보다도 자기 영혼의 약으로서 기억해 두는 것이 좋다. 더구나 그 가운데에서 가장 뛰어난 선물은 자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이라고 할지라도 결코 만능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은 설사 스스로 자살하기를 바란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
이땅의 메마른 사상 지평 넓힌 전환시대의 지식인, 리영희 리영희(李泳禧), 1929년 12월 2일~2010년 12월 5일리영희(81). 5일 타계한 그는 한국 민주화운동사에서 이름 석자로 통하는 몇 안 되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기자·교수·사회운동가 등 여러 직함이 있지만 ‘지식인’이란 호칭이 어울리는 삶을 살았다.1970∼80년대는 그의 시대이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을 필두로 대한민국의 산업화가 속도를 내던 시절, 대한민국의 다른 한 축을 이루는 민주화운동 진영에 리영희가 있었다. 기자 출신의 대학 교수였고, 가진 것은 펜밖에 없었지만, ‘약한 펜’으로 군사독재의 ‘강한 벽’을 허무는 데 앞장섰다. 네 번의 해직, 세 번의 투옥을 겪었다. 고통이었지만 영광이기도 했다. 여기까지는 우리 현대사에 그가 기록해 놓은 공적으로 평가된다.한국 현대사의 명암고인의..
고양 금정굴 사건 진상규명 시작… 마임순 전 유족회장 별세 마임순, ~ 2025년 9월 16일, 향년 73세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최소 153명이 북한에 부역한 혐의자 및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집단 총살당한 고양 ‘금정굴 사건’. 1990년 진상규명 운동을 시작해 2007년 정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로부터 이 사건을 ‘국가의 불법적 폭력’으로 인정받는 데 앞장선 마임순 전 고양금정굴유족회장이 지난 16일 오전 10시 10분께 일산백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유족이 18일 전했다. 향년 78세.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난 고인의 시댁(남편의 가족)은 1950년 한국전쟁 와중에 남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삼촌, 큰형, 작은형 등 5명이 경찰에 끌려갔다가 금정굴에서 희생당했다. 남편의 작은아버지가 월북했다는 게 이유였다. 가족들은 연좌제 그늘에서 숨..
韓 당구 산증인, 이제 역사로… 김기제 빌리어즈 발행인 타계 김기제, ~ 2025년 9월 21일 (향년 90세) 당구계의 또 하나의 별이 졌다. 한국 당구의 산증인 ‘빌리어즈’ 김기제 발행인이 21일 새벽 3시 15분에 타계했다. 향년 90세.고인은 1935년 경남 창원시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일간스포츠, 주부생활, 학원사(농원), 영화세계 등 스포츠·문화부 기자로 활동했다.1981년 팔복원을 설립한 고인은 국내 최초로 월간 자동차와 월간 주유소, 월간 빌리어즈(월간당구)를 창간해 자동차 및 당구 문화 창달에 기여했다.특히, 1986년에 빌리어즈를 창간한 고인은 40여 년 동안 국내에서 당구를 스포츠로 격상시키기 위해 법률과 제도적 장치를 정비하고, ‘미성년자 당구장 출입금지’ 위헌 판결(1993)과 국내 최초 아마추어 전국당구투어 개최(1993..
주머니에 단돈 5천원…법정 안팎의 의인 백기완 - 한승헌 백기완(白基琓), 1932년 1월 24일~2021년 2월 15일추모글 _ 한승헌 변호사21일 오전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에서 열린 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삼우제에서 유족들이 절을 하고 있다.고인이 되신 백기완 선생이 겪은 수난 내지 박해엔 법정이라는, 일반에 알려지지 않은 특수 공간을 빼놓을 수 없다. 따라서 변호인인 나는 증언자의 소임까지도 염두에 두어야 할 때가 있다.박정희의 폭주가 끝날 줄 모르자 대학가 반정부 시위가 격화됐고, 1973년 12월엔 마침내 함석헌·윤보선 등 지도급 인사를 망라한 ‘개헌청원운동본부’가 장준하, 백기완의 주도 아래 ‘유신헌법 폐지 100만 인 서명운동’에 돌입했다.박 정권이 최악의 위기를 벗어나려는 대증요법으로 긴급히 내놓은 조치가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였다. ..
부고를 써라, 인생이 달라진다 – 워런 버핏의 조언 부고는 죽음을 기록하는 글이 아니라, 오늘을 비추는 거울이다.‘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워런 버핏도 부고를 삶의 나침반으로 삼았다. 그는 “사업과 인생에서 큰 실수를 피하려면 자신의 부고 기사를 미리 써보라”라고 조언했다. 미리 부고를 써본다면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무엇을 남기고 싶은지가 드러난다. 버핏은 “그 부고에 맞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찾아내면 된다.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라고 덧붙였다.버핏이 강조한 메시지는 단순하다. 삶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의 선택이 달라진다. 돈을 모으는 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가의 문제다. 그는 “친절한데 친구가 없이 죽은 사람은 본 적이 없다”며, 돈은 많아도 친구 없이 생을 마친 경우는 수없이 보아왔다고 했다. 돈보다 인간관계, 재산..
고양금정굴 학살사건 -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위원회 과거사 - 고양 금정굴 사건 1993년 9월 25일 오후 2시경 경기 고양시 탄현동 고봉산 기슭에서 금정굴양민희생자유족회와 진상규명위원회 회원, 고 백기완 선생, 제정구 국회의원 등 1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43주기(1회) 금정굴양민희생자위령제가 열렸다.위령제에 참석한 유족들은 “1950년 9·28수복 후 조직된 치안대와 경찰, 그에 더해 인민군들에게 가족을 희생당한 일부 주민이 합세해 인민군 점령 기간의 좌익 활동자와 부역자 및 그들의 가족들을 떼죽음시켰다”며 “이들 희생자의 주검은 대부분 이곳 금정굴에 묻혔다”고 증언했다. 금정굴은 일제 말기에 금광 개발을 위해 50m 깊이로 뚫어놓고 방치한 굴인데 당시에는 흙으로 입구가 메워져 움푹 팬 구덩이만 남아 있었다. 첫 위령제가 열리고 2년 뒤인 199..
빨갱이 낙인 무서워 아무도 유해 근처에 안가려 해, 유족회장 마임순씨 2011년 9월 24일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설문동의 봉안시설 청아공원에 들어선 마임순(64) 고양금정굴유족회 회장은 흐르는 눈물을 가누지 못했다. 가슴속에서는 ‘그동안 헛고생한 것은 아니었다’는 회한이 밀려왔다. 서울대 의과대학 창고에 16년간 보관됐던 고양 금정굴 사건 희생자의 유해는 이날 청아공원에 안치됐다. 마 회장은 “이제야 원점으로 돌아왔다”라고 말했다.16년 전인 1995년 가을. 당시 유족이 100만 원씩 각출한 발굴비와 시민단체가 모금한 성금으로 일산서구 탄현동 황룡산 자락의 금정굴에서 유해 발굴이 시작됐다. 발굴 작업은 예상과 달리 수월했다. 주민들은 희생자가 묻힌 곳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빨갱이’란 낙인이 두려워 민간인 학살이 자행된 뒤 45년 동안 아무도 근처에 가지 않..
금정굴 진상규명 이끈 마임순 전 회장 별세 향년 73세 마임순, ~ 2025년 9월 16일, 향년 73세 ‘금정굴 진상규명’ 이끈 마임순 전 회장 별세 ‘빨갱이 시댁 며느리’에서 인권운동가로 1993년 유족회 결성, 30년간 진실규명 앞장 금정굴 학살 국가 불법 인정, 소송 승소 유해안치시설 건립 등 완성 못한 채 눈 감아마임순 고양금정굴유족회 전 회장이 지난 16일 폐렴으로 별세했다. 향년 73세.금정굴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운동을 이끈 마임순 고양금정굴유족회 전 회장이 지난 16일 폐렴으로 일산백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73세. 고인은 30여 년 동안 고양의 현대사에서 가장 어두운 장면으로 남은 금정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고, 국가 책임을 처음으로 공식화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렇게 그는 ‘빨갱이 시댁 며느리’라는 낙인에서 인권운동가, 역사의 주체로 ..
당구를 음지에서 양지로… 빌리어즈 발행인 김기제씨 별세 김기제, ~ 2025년 9월 21일 (향년 90세) 1987년부터 당구 잡지를 발행하며 당구가 스포츠 종목으로 인정받는 데 공헌한 김기제 빌리어즈 발행인이 21일 오전 3시 15분께 세상을 떠났다고 유족이 전했다. 향년 90세.1935년 경남 창원에서 태어난 고인은 고려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일간스포츠, 주부생활 등의 기자로 일하다 1981년 군사 안보 전문 출판사 팔복원을 설립했다. 다른 한편 잡지에 관심을 두고 ‘월간 자동차’와 ‘월간 주유소’를 발행했다.지인 중 한 명이 “빌딩마다 당구장이 있는데 당구 잡지가 없다”라고 권한 것을 계기로 1987년 2월 ‘월간 당구’ (현 빌리어즈) 창간호를 펴냈다. 당시 당구 관련 법정단체는 보건사회부 산하에 등록된 사단법인 대한당구협회가 유일했다. 2020년 빌리..
장산곶매 같았던 백기완 선생의 민주 · 통일 한평생 백기완(白基琓), 1932년 1월 24일~2021년 2월 15일 황해도 장산곶 마을에 깃든 매 한 마리. 약한 동물들 괴롭히지 않고, 한해 딱 두 번 자기 둥지 부수고 대륙으로 사냥 나가던 장수매. 어느 날 대륙에서 거대한 독수리가 쳐들어와 마을을 쑥밭으로 만들자 장산곶매 날아올라 피투성이 되도록 싸웠다. 독수리를 물리치고 낙락장송 위에 앉은 장산곶매. 이번엔 큰 구렁이가 매를 노리고 나무를 오르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소리치며 기진맥진한 매를 깨우려 했다.백기완 선생의 삶에는 동시대를 거친 누구나 마찬가지로 우리 현대사가 응축돼 있다. 황해도가 고향인 선생은 해방 뒤 서울로 내려왔다가 남북이 갈리는 바람에 이산의 아픔을 겪었다. 식민통치와 전쟁으로 얼룩진 유소년기에는 마땅한 학교 교육도 받지..
소리없이 사그라지는 역사의 증인에게 우리 언론은 너무 소홀하다 10년이 지난 칼럼이라 현실과는 차이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논하는 맥락은 지금도 다르지 않다. 종이신문의 위세가 무너진 시대에 1면, 2면의 배치가 더 이상 중요하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오늘의 신문 부고란은 ‘한국식 죽음’을 나열하는 형식에 머물러 있다. 고인의 삶은 사라지고, 기자의 이름조차 없는 부고기사만 남았다. 제 역할을 잃은 지면이라면 차라리 없는 편이 낫다. 이제는 부고를 전문적으로 다루고, 고인을 중심에 세우는 새로운 부고 사이트가 필요하다. “영국 신문의 지면을 한국에 수입할 수 있다면?” 이 질문에 개인적으로 답을 붙인다면 두 개의 지면은 한국에 가져오고 싶다. 영국 신문의 여론면과 부..
‘진보정치’ 꿈 접고 떠난 박은지 노동당 부대표, 무엇이 젊은 그를 좌절케 했나 박은지(朴恩智), 1979년 1월 23일 ~ 2014년 3월 8일 “한 해 동안 아이는 키가 9.4cm 컸고, 방과 후 학교 어딘가에서 수업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가방 한 번, 실내화 주머니를 두 번 잃어버렸다 다시 찾았고, 꿈을 기관사에서 딱지장사로 바꿨다…”고 박은지 노동당 부대표(35)가 지난달 14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남긴 “아이가 1학년을 무사히 마쳤다”로 시작하는 글이다.‘싱글맘’으로 홀로 아들을 키워오던 그는 사랑하는 아들을 남긴 채 지난 8일 오전 서울 사당동 자택에서 목을 매 숨졌다. 그의 아들은 이제 겨우 아홉 살. 자신 역시 서른다섯 살에 불과했던 젊은 진보 정치인은 예고도 없이 일찍 세상을 떠났다.경찰 조사 결과 박 부대표는 우울증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새로운 세상..
아이디어의 계급사회 모든 아이디어가 같은 대우를 받지는 않는다. 누구의 주말 프로젝트는 뉴스가 되고, 누구의 앱은 다운로드된다. 같은 아이디어라도 누가 만드느냐에 따라 관심이 달라진다.아이디어에도 계급이 있다. 유명인의 아이디어는 태생부터 주목받지만, 무명인의 아이디어는 아무리 좋아도 묻힌다. AI가 코딩을 민주화했지만, 관심은 여전히 불평등하다.AI 덕분에 누구나 앱을 만들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코딩을 몰라도, 디자인을 못해도, 아이디어만 있으면 된다. 창작의 문턱은 낮아졌지만, 모든 창작물이 같은 주목을 받는 것은 아니다. 유명인의 앱은 기사거리가 되지만, 똑같은 기능을 가진 무명의 앱은 사라진다. 창작은 민주화되었지만, 관심은 여전히 소수의 몫이다. 이것이 AI 시대의 새로운 불평등일지도 모른다.성공한 사람의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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